글 - 칼럼/단상2015. 2. 21. 16:12

 


Fishing in the Lake Boomer

 

 

 
 YB speaking to her fish friends in aquarium

                                                                   

 

 

 긴긴 설 명절 내내 서울을 지키다 보니 좀이 쑤셨던 걸까.

점심을 사겠다는 핑계로 밖에서 영빈(永彬)을 만난 것도 그 때문. 이제 막 돌 지낸 녀석의 말하려 애쓰는 모습이 신기하다. ‘할아버지를 불러보라 애타게 주문해도 어렵사리 내놓는 발음은 한결같이 하메이~’. ‘할아버지 어디 있나?’라는 물음에 손가락으로 정확히 짚어내긴 하는데, 발음은 여전히 하메이. 어찌어찌 할머니까지는 성공했는데, 네 음절을 뱉어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인가. 네 음절 발음을 주문하는 성화에 가까스로 세 음절을 뱉어내곤 녀석도 쑥스러운지 웃음으로 눙친다. 인간이 말을 익혀가는 모습을 녀석에게서 새삼 흥미롭게 발견한다.

 지금의 녀석처럼 호사스럽진(?) 않았지만, 내게도 저렇게 말을 배우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문득 녀석의 부모를 보니, 재롱부리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솜털처럼 아련히 남아 있는 것 아닌가벌써 아버지의 포스를 갖춰가고 있는 모습. 그동안 내게도 네게도 시간은 여지없이 흘렀구나!     

 

                                                ***

 

 모두들 잠들어 사방이 적막할수록 내 의식은 또렷해진다. 책상에 앉으니 당장 생각을 굴려야 할 일들과 밀린 글들이 산적해 있지만, 여러 갈래로 마음이 부서진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먹고 사는 문제 뿐 아니라, 이제 어떤 마음과 표정, 태도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갓난아기와 젊은 아이들이 뒷물이 되어 나를 밀어내고 있는데, 방향을 제대로 잡고 밀려가는 앞물의 모습을 아름답게 갖추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리라. 세대마다 다르기 마련인 그 문제를 공자 문하의 똑똑한 제자들도 깨달았던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한 듯 선생께 여쭈었다. <<논어>>공야장(公冶長)26번째 대목이 바로 그것. 자로(子路)수레와 말과 가벼운 가죽옷을 친구와 함께 쓰다가 망가져도 원망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으며, 안연(顔淵)남에게 착하게 했노라 자랑하지 않고 남에게 공치사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늙은이들이 편안하게 여기고, 친구들이 믿음직하게 여기며, 젊은이들이 기억하고 그리워해주었으면 한다(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고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바른말 한답시고 가까이에 있는 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한 일, 가까운 친구들을 살갑게 대하지 못해 믿음을 주지 못한 일, 그런 가운데 아름답지 못한 말을 무사려하게 내뱉어 주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사지 못한 일 등등. 내 아픈 곳을 어찌 이리도 정확히 짚어냈을까. 혹시 공자도 만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문제의 근원이 가까이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일까.

 

 가까운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편안하고, 믿고, 그리워하게 만들려면어떻게 해야 할까. 법대로 원칙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다. 나이 든 자의 여유와 너그러움, 그리고 스스로 즐거워함으로써 남들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해결책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세상이다. 정치도 마찬가지. 틈만 나면 신뢰와 원칙을 언급하는 박 대통령은 왜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 긴긴 설 연휴에 혼자 구중궁궐을 지키시는가. 혹시 대통령의 언행이 나이 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친구들을 미덥지 못하게 하며, 어린 사람들을 소원(疏遠)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섭공(葉公)이 정치를 묻자 공자는 가까이에 있는 자가 즐거우면,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몰려온다(近者悅 遠者來)”고 했다. 굳이 대통령까지 갈 필요도 없다.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살아가는 것만이 세상의 무대에서 사라질 때까지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임은 나 같은 필부(匹夫)들도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진리이리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30. 10:42

 


데이비드 킴볼 앤더슨(David Kimball Anderson) 작 <Big Mind: Bowing, Black Robe>,
뉴멕시코 주 산타페의 'New Mexico Museum of Art' 소장

 

 

 

 

설날 인사

 

 

 

작년 여름 저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땐 땡볕 더위에 외출조차 못할 정도였습니다.

시각이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게으름을 부릴 때도 많았는데,

벌써 갑오년 설을 맞이하였습니다.

 

먼저 저를 아껴 주시고 자주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손님 여러분께 세배 올립니다.

갑오년 새해에도 큰 복 받으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지금 설인지 뭔지 알지도 못하는 미국 사람들 틈에 끼어 있긴 하지만,

저희들은 늘 조상과 후손을 생각하고 나라의 장래까지 걱정하며

살얼음 밟듯남의 땅에서 한동안 잘 지냈습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이야말로 저희 같은 민초들의 한결같은 바람 아니겠는지요?

정치하시는 분들, 옳은 판단으로 정신 좀 바짝 차리시고,

국가의 공직에 있는 분들, 한 결 같이 바른 마음을 가지시고,

기업하시는 분들,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 주신다면,

밑에 있는 저희들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위기가 기회라는 평범한 진리가

새해에는 남북통일의 결정적 계기로 구현되리라 믿어봅니다.

궤도를 벗어나 방황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화해와 화평의 큰 장에서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갑오년 첫날 아침

 

미국에서

 

백규 인사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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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

이번 설날엔 두어 가지 일로 제주에 오게 되었고, 한라산엘 올랐다. 비교적 평탄한 성판악 코스를 산책하듯 오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수목대(樹木帶). 그 사이에서 내 눈을 끈 것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나무들이었다. 삶의 윤기를 잃어버린 채 나신(裸身)으로 서 있는 것들, 줄기에 큰 구멍이 뚫려 껍데기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들, 뿌리와 연결된 밑동이 부러져 가로 누운 것들, 다 썩어 문드러져 몽당연필처럼 외로이 서 있는 것들, 중동이 꺾여 옆의 생생한 나무에 기대고 죽은 것들...무수한 나무의 시신들이 그렇게 넉넉한 산을 그득 채우고 있었다.
물론 간간이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으면서도 당당한 자태로 서 있는 나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이미 밑동부터 중간까지는 ‘주검의 빛’이 이미 침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삶에 대한 강한 집념과 오기로 버틴다는 인상을 줄 뿐이었다.
버썩 마른 겨울이기 때문일까? 산은 온통 나무들의 시신들로 채워진 것 같고, 간간이 진녹색의 침엽수들이 그 사이에서 외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죽어가거나 죽은 나무들은 그런 녹색의 젊음이 사랑스러운 듯 그를 옹위하고 서 있거나 벌렁 누워 있기도 했다. 어떤 나무는 슬그머니 젊은 그에게 기대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갖가지 자태의 노사목(老死木)들은 그들이 그런 상태로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을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 내가 오를 수 있었던 곳까지 7km의 거리를 왕복하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추억의 서사시’를 실컷 들을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이 있다. 나무들의 세계도 그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자진하여 그들이 겪은 삶의 신산(辛酸)함을 제게 토로하는 것이었다. 갖가지 사연들이 너무도 진솔하고 서러워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한 가지. ‘내 곁에 있는 저 녹색의 젊음을 보시오. 나는 저 친구가 저리도 당당한 모습으로 내 꿈을 나대신 실현시켜 주는 것이 너무도 좋소. 그러니 내가 죽어 저 젊은 친구의 거름이 되는 거야 영광 아니겠소?’ 라고들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간 한라산을 여러 차례 오르면서도 만나지 못한 감동을 드디어 올해 설날 만나게 된 것이었다.

         ***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올해 따라 유난히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내 가슴에 와 닿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푸름의 천지인 산 속에서 참으로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나도 그런 이치를 이해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이리라.
오늘 내가 만난 노사목들의 공통점은 욕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터득한 진실(사실은 진리이겠지요)이라면 ‘나이 들면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인가? 어느 정치가가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우리에게 던진 적이 있다. 그가 진정으로 마음을 비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이야말로 속이 텅 빈 채 죽어있는 노사목들이 내게 들려준 삶의 서사시, 그 핵심적 주제였다. 탐욕에 가까운 욕심을 부리다가 추한 모습으로 스러져가는 주변의 선배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역설의 가르침 역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법정스님의 말씀대로 ‘무소유(無所有)’의 단순명료한 철리(哲理)를 깨치는 것도 그 한 방법일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생겨난 재물, 지위, 명예 등이 모두 우리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이니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지자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 같은 필부필부들이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거추장스런 육신을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것들로부터 아주 떠날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베푸는 일과 물러서는 일’ 정도이리라.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일, 후배들의 말을 들어줄 뿐 가급적 입을 열지 않는 일, 알량한 이해관계를 놓고 후배들과 다투지 않는 일, 노후를 대비하여 꼼수를 부리지 않는 일, 후배들을 믿고 모든 걸 맡기며 넌지시 도와주는 일 등등.
회갑이 되어서도, 칠순 팔순이 되어서도 세속적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경우가 또 있을까?  

         ***

나는 언젠가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때는 나무들의 푸르름만 눈에 들어왔었다. ‘거침없는 힘’과 무지갯빛 희망에 들썩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노사목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추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연습에 돌입할 때가 된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이며 시간을 끌지 말라’는 한라산 노사목들의 다그침이 이 깊은 밤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정해년 정월 초하룻날 밤
제주 애월읍 바닷가에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