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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25 '부러진 화살'의 불편한 진실
  2. 2008.02.05 ‘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
글 - 칼럼/단상2012. 1. 25. 09:01

‘부러진 화살’의 불편한 진실


                                                                                                       백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그간 언론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익히 들어온 사건이라서 내용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스토리의 전개나 분위기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기득권 수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조계의 비리가 영화 속 사건의 핵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의 발단 부분에 관심이 컸다. 감독이 좀 더 심사숙고했다면, 대학이나 교수들의 집단 심리를 스토리 전개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삼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봉직하던 S대학 입학시험으로 출제된 수학문항이 원천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고,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김명호 교수. 그 지점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학자와 교육자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문제 하나’였지만, 그것이 수많은 학생들의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건이었다. 동시에 해당 전공의 교수로서는 학문적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 순간 관련 당사자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을까. 김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바로잡는 것이 옳았을까, 아니면 실제 일어난 사건처럼 ‘공동체의 대외 이미지 실추’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얼렁뚱땅 넘어 가면서 김 교수를 핍박하는 게 옳았을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진실의 공개나 규명이 공동체의 이익과 과연 상치되는 것인가?’ 등의 두 문제로 압축된다. 결정적 키는 바로 ‘정의’에 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이다. 양심 혹은 양식에 달린 문제, 즉 정의와 집단이익 혹은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역력히 보여주는 문제라는 것이다. 입시문제의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공개할 경우 S대학은 물론 학과의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니 일단 덮고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학교 당국과 교수들의 공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학교 당국의 그런 판단과 회유에 넘어 간 교수들이 김 교수를 압박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교당국의 회유에 넘어갔든 스스로의 판단이었든, 결과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심대하게 손상시킨 일종의 ‘만행(蠻行)’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동료를 비난하며 학교당국의 종용에 따르는 순간 교수들의 내면에서 작동되던 양식이나 정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순간 마이클 샌덜(Michael J. Sandel)이 정의(正義)와 도덕적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물음들 가운데 하나[‘조난을 당해 오랫동안 굶주린 선원들이 제일 약한 소년을 잡아먹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연 ‘굶주린 선원들’이었으며, 김 교수는 과연 ‘약한 소년’이었는가? 물론 교수들은 학교당국에 의해 채용된 ‘피고용인들’이다.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된 바 있지만, ‘교수의 재임용은 학원의 고유권한’이라는 사립학교법에 의한다면, 교수들이야말로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면 ‘밥이 필요하고, 권력의 우산이 필요한’ ‘굶주린 선원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켕기기야 했겠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약한 소년’을 잡아먹고도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허울이 양심과 정의의 화살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도덕의 문제가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 또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이 사건에 관련된 교수들이 도덕이나 정의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공준(公準)을 저버린 점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음은 영화를 보며 무의식중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의 공감에서 입증된다. 교수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간 대학 당국의 행위 또한 말할 것도 없이 독재시대에나 통했을 시대착오적 만행일 뿐이다. 일이 불거진 시점에 과감하게 문제를 공개하고 사과했다면, 역으로 그들의 판단이나 행위는 정의와 도덕의 빛나는 기치(旗幟)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늦었고, 아마도 한동안 S대학당국과 그 학과 교수들은 성난 대중으로부터 난타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드높은 꽹과리 소리와 함께 권력에 당하기만 해온 민중의 ‘한풀이’가 이제 시작되려는 지금부터 앞으로 상당기간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 역시 ‘굶주린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교수들 가운데 누가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살짝 보여준 ‘불편한 진실’이다.<2012. 1. 2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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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

                                        
                                                                 조규익

작년 하반기에 출범한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과 지금도 논란중인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선정 과정은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국가적 아젠다 실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전자의 경우 탈락의 이유나 명분을 상당수의 대학들이나 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의 권위를 상징하는 총장과 교수들까지 교육부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만큼 후자의 경우 또한 결과 자체가 석연치 못하다.

 두 사업이 갖는 표면적 의미는 단순하다. 인문학 진흥을 위해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의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의 재정을 듬뿍 풀겠다는 것이 전자이고,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 권부의 한 축인 법조계 인맥의 공급처로 삼겠다는 것이 후자이다. 

 이제 로스쿨은 단순히 ‘법학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육수요자들이 이것을 학교전체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 원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인들은 로스쿨의 유무가 대학 생존을 결정하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인문한국이든 로스쿨이든 주관 부서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 미래지향적 의미를 크게 지녔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런 기준에 대하여 우리의 지식사회가 제대로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인문학을 새롭게 진흥시킨다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학 교육을 시키자고 하는 마당에 그에 입각한 아젠다나 철학 혹은 참신한 아이디어 등을 따지지 않고, 예컨대 과거의 업적이나 인프라에 무게중심을 두거나 기존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시키는 등의 일이 지식사회의 미래지향적 구도에 그다지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 때문에 선정결과의 발표를 서너 차례 연기했을 만큼 인문한국 사업은 시작부터 갈팡질팡했으며, 로스쿨 역시 ‘정치적인 고려’ 등 본질적인 철학 부재의 함정에 빠져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자 모두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지 않은 대학의 현실을 그 결정적인 요인으로 거론하는 인사들도 많다.

 국가나 대학의 조직은 매니지먼트의 측면에서 공통되며, 그 자연스런 결과로 평가에 관한 기준이 물적 인프라의 규모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자칫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과거부터 누적되어오는 물적 인프라의 기준에 밀려 평가의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점은 큰 문제다. 큰 대학들은 늘 국가적 혜택을 받는 반면, 작은 대학들의 경우 제대로 도약의 계기를 얻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잘 하는 쪽을 밀어주는 것은 잘 나가는 집단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잘 하고 못함’을 가르는 기준이 미래 지향적 의지를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은 ‘힘 있는 세력’의 떳떳하지 못한 자기 합리화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 없는 기준에 바탕을 둔 ‘승자독식(勝者獨食)’이야말로 ‘만년 우등/만년 열등’의 구조를 고착시키게 되고, 그것이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학문정책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대신 구태의연한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가 걸린 일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감행하면서도 ‘할일을 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지식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반성이 결여된 지식사회의 행태가 우리 시대 최고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