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7. 5. 23:01

백규서옥의 옥호[은사 연민 이가원 선생님의 유작/연민체]

 

 

                                                                                                                     조규익

2020. 6. 30. 무성산 끝자락 조용한 곳에 그동안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오던 백규서옥을 드디어 실물로 완공했다. 만 5개월 동안의 큰 역사(役事)였다.^^ 50여 년 전 대여섯 살 무렵, 당시 젊은 부모님께서 나무와 흙으로 지으시던 고향집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는데, 마음속의 그 그림 위에 '내 집'을 덧 지은 것이다.

 

무성산의 용맥(龍脈)이 흘러내려 혈(穴)을 맺은 곳. 그 안온한 곳을 내 최후의 은거처(隱居處)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제법 많은 곳들을 떠돌아다녔고, 정처 없이 그려온 노마드(nomad)의 궤적 속에 내 알량한 내면은 무거운 피로감으로 절어 온 게 사실이다. 마무리해야 할 공부들은 아직도 수두룩한데 세상은 내 뜻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내 사고방식이나 삶의 양식은 더 이상 세상의 추이(推移)와 맞지도 않음을 절감한다. 그럴 경우 굴원(屈原)이 그려낸 <어부사(漁父辭)> 속의 어부처럼 방향을 틀어 세상에 맞추거나 조화를 가장한 아부라도 떨어야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고서야 내 성격에 어찌 단하루인들 맘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내가 핍박했고 나를 핍박해온 사회에서 내 불만과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 나를 반성하는 데서 내 자아와 본래 면목을 찾으려는 것이니, 저 석문(釋門)의 이른바 ‘회광반조(廻光返照)’ 정신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내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허둥대지 않고, 이미 어긋난 세상과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 궤변과 아부를 농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당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올해 그 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로부터 받은 마지막 연구년 덕이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몇 발짝 만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집을 짓는 일’이 난감했고 남 보기에도 미안했지만, 내친걸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일’은 대안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족들을 태운 채 달리던 내 차의 핸들을 급히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어려운 시기 잠시라도 내게 와서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장인(匠人)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동안 참으로 성실하고 실력 출중하며 성격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담건축사사무소 남궁 담 대표, 임전수 감리사, 김병호 대목장(大木匠), 천명선・이종식・양승만・김수남・김창례 목장(木匠), 이재필 전기장(電氣匠), 고현용 조적장(組積匠), 상량문을 써 주신 서예가 우공(愚工) 이일권 선생, 나를 대신하여 모든 관리업무를 총괄해주신 유수근 사장 등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과, 레미콘・타일・벽돌・기와・철근・창호・각종 장식 돌・각종 건재・중장비・미장・설비・용접・난방・목공・페인트 등을 제공한 거래처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전문가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단계마다 노역을 제공해주신 분들의 이름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어주신 전력회사 직원들과 엔지니어들, 인력들의 맛있는 점심을 늘 시간에 맞게 제공함으로써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신 부흥식당 정연희 사장도 잊을 수 없다.

 

백규서옥의 기념 동판

 

백규서옥을 지으며, ‘집을 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종합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주와 장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재료들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 숨결이 음표로 바뀌어 생명을 노래하고 춤추는 마술임을 알게 되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자기만의 세계와 자아의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집이 없으면 정주(定住)할 수 없고, 정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변함없는 존재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동안 백규서옥은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왔다. 은사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님께서 내려주신 이 옥호(屋號)의 이면에는 이상을 품고 노력하여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보라는 지엄한 명령이 들어있다.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과 이해를 다투지 말고, 자신의 흠결을 갈아내기 위해 수양할 것이며, 항상 근원을 추탐(推探)하여 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라는 것이 그 명령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용한 곳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자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이 ‘무성산 백규서옥 건축’의 정신적 바탕이다. 바야흐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백규서옥

 

백규서옥 문앞에서 백규

 

 

백규서옥 기념동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관계자들[왼쪽부터 임미숙・임효수・대목장 김병호・백규・총관리 유수근・목장 이종식・전기장 이재필・목장 김창례. 중앙에 유 사장의 상추도 함께 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4. 10. 19:24

상량식을 앞두고 대장목수 김병호 사장과 함께

 

 

                                                                                                                                          조규익

 

 

대장목수와 감독 유수근 사장이 상량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내겐 어릴 적 상량식의 어렴풋한 추억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붓글씨가 적힌 대들보 양끝을 광목천으로 매어 걸어놓고 어른들이 기원 비슷한 것을 늘어놓으시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천지신명은 분명 잡신의 범주에 든다고 보아, 시큰둥한 반응을 내보이니 공사 팀원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주변의 어른들에게 물었더니, “상량식은 인부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휴식과 보너스를 주는 기회여~!”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계속되는 작업에 휴식이 있어야 사고 없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짓고 있는 집이 한옥은 아니지만, 떡과 고기를 준비하고 상량보에 상량문을 써서 간소한 의식을 갖기로 했다. 공주의 뛰어난 서예가로서 국전 초대작가 출신인 우공(愚工) 이일권(李一權) 선생에게 급히 상량문을 부탁하니 쾌락(快諾)했다트럭에 송판을 싣고 이 선생에게 달려간 유수근 사장. 순식간에 완성된 3m 길이의 상량보를 되싣고 돌아왔다. 단정하고 빼어난 우공체의 상량문이 송진내음 그윽한 송판에 새겨진 것이다. 가슴이 뛸 정도로 멋진 예술이었다.

 

龍翔 歲在庚子年三月十七日申時上梁成造丙申生運大通鳳舞/應天上之三光/備人間之五福                                             

 

용이 날고 봉이 춤추도다/경자년 317일 신시에 상량 성조하니 병신생인 집주인이 운수 대통할 것이며/하늘의 삼광에 응하고 인간의 오복을 갖출 것이로다

 

그렇다. 이걸 천정에 붙인 채 누울 때마다 바라보고 염원하면 말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내 어찌 현대판상량문 한 편을 쓰지 않으랴?

 

****

 

무성산(武城山) 백규서옥(白圭書屋) 건립(建立) 상량문(上梁文)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백규(白圭)는 고향 땅과 부모 슬하를 떠난 십대 중반 이래 반세기 가까이 객지를 떠돌다가 천지신명의 보살피심 덕택으로 이곳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 무성산 자락에 새 터를 잡았습니다.

 

학문을 통해 입신보국(立身輔國)하겠다는 일념으로 풍파 드높은 세상을 쉬지 않고 항해하여 왔으나, 학문의 바다는 끝이 없고 인생은 덧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세속에서의 학구(學究)생활을 마감하고 천지신명이 허락하신 나머지 반생은 또 다른 성취의 꿈을 새로이 가꾸고자 합니다.

 

지난 수십 년 세월 은둔강학(隱遁講學)하며 후반생을 보낼만한 길지(吉地)를 찾아다니던 중 이곳 무성산 자락 고사터에서 가거지(可居地)를 발견한 것이 2012년 봄이었고, 그로부터 8년 만인 경자년 정월 하순 정초(定礎)를 하게 되었으며, 3월 17일 신시(申時)에 드디어 감격스런 상량식을 갖고 천지신명께 고유(告由)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조용한 산수(山水)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후반생을 살다가 이곳의 흙 속으로 스며 들어 풀과 나무들을 위한 한 줌 거름이 되고자 합니다. 새롭게 만난 이웃들과 강호의 벗들을 두루 불러 인생과 학문을 토론하며 지역사회에 선한 추억을 남기고자 합니다.

 

아, 무성산의 용맥(龍脈)이 백규서옥을 감아들어 사뿐히 내려앉으니, 평화와 안식의 꽃비가 고사터 골짜기에 가득하옵니다. 새로운 시대의 대운(大運)이 이로부터 현현(顯現)될 것인즉 은사(隱士)의 미덕을 심고 가꾸어 좋은 결실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더 겸허한 자세로 노력할 것입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아무도 다치지 않고 어렵지 않은 가운데 이 공사가 수월히 끝날 수 있도록 참여한 장인(匠人)들에게 힘을 주시고, 백규 가족 및 동네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행복의 꺼짐 없는 서광(瑞光)을 퍼부어 주시옵소서.

 

2020. 음 3월 17일

 

무성산 백규서옥 주인 복원(伏願)

 

상량판[우공 이일권 선생 글씨]

 

상량식을 앞두고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 장인(匠人)들과 함께

 

상량식에서 문구를 설명하며

 

상량을 끝낸 건물

 

건축주의 상량문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19. 11. 24. 00:33

 

                                                                                                                                                                                                                                       백규

 

  최근 들어 귀촌준비에 ‘올인’하다시피 해온 지난 몇 년간이 자꾸만 떠오르고, 부질없는 질문들만 꼬리를 잇는다. ‘조율만 하다가 연주다운 연주는 해보지도 못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준비에만 내 인생의 진액을 모두 소진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길게 느껴지기만 하던 시간의 여울들을 넘다 보니 어느 새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던져야 할 타이밍에 도달하면서 자꾸 주춤거려지는 것은 왜인가. 몸에서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것과 정비례로 마음에서도 자신감이 빠지고 있는 것일까. 늙어갈수록 생활에 편리한 대도시가 좋을 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귓전으로 흘려 들었는데, 그 말들이 고장 난 레코드판 다시 돌아가듯 지금서야 새록새록 마음에 되살아나는 것은 왜인가.

 

  얼마 전 시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았고, ‘대지 분할・경계 측량’을 끝냈으며, 오늘 집터와 주변 땅의 지번(地番)을 받았다. 지난 몇 달 간 토목사무소를 통해 토목측량을 했고, 건축설계사무소를 들락거리며 건축설계를 마쳤으며, 그 설계를 구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까지 비로소 마무리한 것이다. 초보 농부의 서툰 농법으로 잡초에 휩싸여 신음하다가 올 한 해 가색(稼穡)의 장인(匠人)들로부터 ‘땅 대접’을 제대로 받은 내 아름다운 땅에 붉은 고추 대신 집을 심게 된 것이다! 바로 내년 봄에.

 

  그동안 집 짓는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는 충고들을 선배들로부터 무수히 들었다. 닳고 닳은 건축 시공업자들을 상대하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며, 돈은 돈대로 들고 집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폭삭’ 늙고 만다는 것이다. 그동안 살던 아파트에서 그냥 눌러 살든지, 굳이 시골에 가려거든 누가 살다 내 놓은 집을 얻어 잠시 살아본 뒤 결정하는 게 백 번 현명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었다. 사실 집 한 채를 짓는 데 드는 돈이나 정력을 생각하면 은근슬쩍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냥 그런 말들을 수용하여 도시 한 구석의 내 후줄근한 공간이나 시골 어느 골짜기 누군가 살다가 버려두고 떠난 공간에서 내 삶을 마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살았다. 농부로 자수성가하신 부모님이 나무와 흙으로 지으신 집에서 10대 중반까지 살다가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십 년 세월, 하숙집・자취집・아파트 등을 전전하며 이 날까지 살고 있다. 부모님의 집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만 빼면, 모두 ‘남의 집’에서 살아온 것이다. 부모님의 집도 내 집은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남이 지어놓은 ‘끔찍하게 획일적인 공간’일 뿐, 아직도 내 집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덧없이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인생, 잠시라도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다 가는 것을 사치라 타박할 수 있는가. 나는 내 뜻에 따라 지은 내 집, 그것도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집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2년 반 후에 찾아올 정년. 내겐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자연과의 대화와 사색을 통해 내 공부와 인생을 마무리해 가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4년 전 유럽 여행 중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너편 언덕에서 만난 ‘철학자의 길’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네카 강이 흐르고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대학촌이 손에 잡힐 듯이 건네다 보이던 그 언덕길. 그 때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 옛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을 떠올려 보았다. 칼 야스퍼스, 칼 만하임, 헤겔, 가다머 등등. 쟁쟁한 철학자들이 그 길을 걸으며 생각을 다졌을 것이다. 내가 집을 지으려는 곳에 그렇게 예쁜 대학촌은 없다. 눈을 들면 폐교된 옛 초등학교와 띄엄띄엄 무리지어 서 있는 민가들이 전부다. 그러나 그것들을 품어 안고 있는 산세는 하이델베르크 못지않게 아름답고 보암직하다. 그 경치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은 생각의 샘물이 퐁퐁 솟아남을 느낀다. 그래서 그곳에 내 작은 와옥(蝸屋)을 앉히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고 아일랜드의 문인 조지 무어(George Moore)는 말했다. 그간 나는 내가 필요로 하고 세상이 필요로 한다고 믿는 것들을 찾아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어쩌면 그것들은 환상이나 신기루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조지 무어의 말처럼 그것들 모두는 앞으로 내가 지을 집 안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을 짓는다. 아니, 지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간 환상을 찾아 헤매 온 내 영혼을 포근히 안식하게 하는 길일 수 있다.

 

에코팜은 밤 천지다

                                          

이 배추를 누가 다 먹을꼬

 

 

일을 마치고 동네 분들과 가볍게 한 잔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7. 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3. 14. 14:45

최근 광주의 찻집에서

 

 

 

 

친구를 보내며

 

 

                                                                                                               백규

 

 

다정하던 친구 김성원이 이승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 온 다음 날부터

그는 급격히 혼돈에 빠져들었고,

드디어 12일 새벽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이른 시각

너무나 짧은 발인식을 마치고

그는 뜨거운 불의 정화(淨化) 의식을 거쳐 저승으로,

나는 현실의 원리가 작동하는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눈을 감기 나흘 전

병원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나를 보고 싶어했고

나 역시 그가 몹시 궁금했다.

서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우리는 힘주어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밝은 웃음이 모처럼 그의 얼굴에 번졌다.

언젠가 그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지금껏 나는 인천 방향으론 소변도 보지 않았노라!”.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겪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듬뿍 실려 있었다.

그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동안 나의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음을

병상 머리맡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폰을 집어 들더니

어느 부분엔가 저장해 놓은 사진 한 장을 찾아 더듬거렸다.

마지막 순간 내게 보여주려고 잘 갈무리해 두었겠지만,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결국 사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릴 적 동생을 안고 있는 사진이라는데,

무뎌진 손끝과 흐려진 정신으론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엉망이 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려는속 깊은 마음씀이었으리라.

 

그 뿐 아니다.

모든 면에서 참 사려 깊은 그였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친구들 일이라면 빠진 적 없었고,

함께 어울리기 좋아한 그였다.

자신이 정한 원칙은 한 치도 어김없이 지키려 했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원하다 보니,

그들 역시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으리라.

그래도 늘 넉넉한 웃음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삶과 이승에 대한 애정이 유독 도타운 친구였다.

그래서인가.

이렇게나 빨리 홀로 먼 길 나선 그가 안쓰러울 뿐이다.

붙잡는 이승의 손길을 지긋이 뿌리친 채,

그는 떠났다.

삭막한 세상을 함께 할 친구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이 상실감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절망으로 연결된다면,

그 때문에 나 또한 세상을 뜨게 되리라.

허무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 또한 이승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리라.

 

오늘

햇살은 이리도 좋은데,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길가에 주막 한 채라도 있거든

병마 탓에 그동안 끊었던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사 마시며

얼큰 취한 목소리로 <희망가> 한 자락이라도 불러 보시게나,

사랑하는 친구여!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2018. 3. 14.

 

 성원을  보내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