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7. 20:28

길 잃은 교육부, 휘청대는 지식사회

 

                                                                                                                                                     조규익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 피터 드러커가 말한 바와 같은 ‘지식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기술의 혁신이나 정책 결정의 기초가 되는 사회, 지식의 생산이나 응용에 종사하는 이른바 ‘지식노동자’가 힘을 갖고 있는 사회를 지식사회라 하는데, 그 경우의 지식사회는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을 대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가 지식인들인가? 권력을 잡은 계층이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지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이 무한경쟁과 무질서로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 혹은 ‘약삭빠른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지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실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이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데, 최소한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연마한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지식사회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식사회이려면, 그 지식은 ‘건전한 양식이나 합리성’과 연동(連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지식사회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최근 우리의 자화상을 목격한 뒤 하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다 보니 ‘지식사회’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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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육부는 98년부터 시작한 ‘학술지 등재’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 다양한 학문분야에 많은 학회들이 있었는데, 누구의 발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학회들만 다잡아서 획일화 시키면 학문의 질이 저절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관변에서 단물을 즐기던 일군의 학자들이 ‘통치적 발상’의 부림을 받아 그런 묘안을 만들어 올렸을 것이다. 사실 학문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정부가 나서서 학술지의 등급을 매기는 나라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고,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에 이 분야가 있었다면, 단연 우리나라의 교육부가 단독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리라. 오죽 답답했으면 나라가 학문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섰을까 생각하면 지식사회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고 착각하는 필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물며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이야 오죽했으랴! 머리 성성한 노학자들이 서류뭉치를 들고 학진의 사무원들 앞에 굽신거리며 ‘등재’의 재가를 받아오면서 희희낙락해온 것이 그동안의 희화(戱畵)였다. 모든 학회의 이름을 ‘○○학회’로 통일해야 한다면서 ‘연구회, 세미나, 포럼’ 등 모임의 다양한 명칭들을 없애버렸고, 참고문헌의 형태, 요약문의 길이, 주제어의 개수 등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점수를 매기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것이 이 나라의 지식사회다. 단 몇 년 사이에 수백 수천 개의 학회들이 국군의 날 의장대 정열하듯 정연해졌고, 그 형식요건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으며, 편의성을 좋아하는 대학들은 얼씨구나 하고 그걸로 업적평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키보드에 교수 이름만 쳐 넣으면 학진의 홈페이지에 연동되어 1년간 발표한 논문이 주르르 흘러나오니 행정적으로 얼마나 편한 일이며, 시비 또한 일어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학진의 규정만 잘 따르면 일반 학회는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 등재후보 학회는 등재학회가 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규정이라는 것이 형식요건에 그치는 것이라서 사실 심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굳이 심사라는 절차를 만들어 학회 운영진을 애태우는 일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어떤 사회인가. 온정으로 똘똘 뭉친 사회다. 서로 품앗이하듯 서로의 학회들을 웬만하면 올려주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인 것을!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자 신청한 학회들을 무슨 근거로 탈락시킬 것인가. 자연스레 기본 요건만 갖추면 모두 등재후보, 등재학회로 등극하게 된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등재(후보)학회의 경우 웬만하면 학술지 발간비에 학술회의 비용까지 지원해주고 있으니, 그간 한국의 학회들은 학진의 품속에서 꿀맛 같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 덕에 한국의 학계가 많은 논문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학에 입성하려는 학인들 가운데 분야에 따라 한 해에 열편도 넘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고 지금도 학진 등재논문으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학자들이 많으니, 그 점만큼은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논문 쓰는 맛을 비로소 보기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하는 분이 있을 정도다. 분명 이 점은 등재 제도가 갖고 있는 기능들 가운데 긍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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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그 제도의 문을 닫겠다고 한다. 별 뚜렷한 대안도 없이 13년 동안 한국의 지식사회를 순치(馴致)시켜 온 제도의 막을 아예 내려버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등재 학술지로 승격하는 학회의 수를 제한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초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형식요건이 갖추어져 있는 이상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학회들도 없고, 형식요건에 맞는 것들을 내용상의 문제로 퇴짜를 놓을 강심장의 학자들도 없다. 그러니 너무 많은 학회들이 등재의 범주에 들어와 버렸고, 국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교육부와 학계의 일부는 그 탓을 이젠 학자들에게 돌린다. 제도를 만들고 제대로 엄정하게 관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둔 채 일부 드러나는 문제들만 거론하며 학자들의 ‘양식 없음’ 만 탓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 원래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대안도 없이 송두리째 없애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자들의 학문적 생산과 평가, 혹은 학회라는 학문 공동체를 정부의 획일적인 잣대나 틀에 의해 재단하려 한 것은 상식 이하의 처사였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13년 된 제도를 보완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송두리째 없애겠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아파트 재건축’만도 못한 하책(下策)이다.

정부에서 내 놓은 안은 올해 10개, 내년에 15개, 내후년에 20개 내외의 학회를 선정하여 매년 1억 5천만원씩 최장 5년간 지원해 ‘세계적인 학술지’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좋아 할까. 학회나 학술지들이 어찌 돈을 퍼붓는다고 단숨에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세계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으로 천문학적 돈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실패로 판명되고 있는 ‘WCU(World Class University ;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 )’ 제도를 보면서도 다시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사용하는 배짱은 과연 어디서 연유된 것인가. 우리 민족의 DNA 때문일까. 1억 5천만 원씩 5년간 특정 학회에 퍼붓는다고 ‘세계적인 학회’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과연 누구로부터 나왔을까. 따져 보자. 아무리 큰 학회라 할지라도 1년에 네 번 정도의 학술지를 간행할 것이다. 1회 간행비를 5백만 원으로 잡는다면 학술지 간행에 2천만 원이면 넉넉하고도 남는다. 학술회의를 두 번 한다고 쳐도[매번 국제학술회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매년 한 번씩만 국제학술회의를 한다면] 2천만 원이면 넘칠 정도다. 그렇다면 남는 돈은 회원들의 연구비로 지급할 것인가? 아니면 학회 통장에 적립할 것인가?

10개나 15개의 학회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학문분야만 따져도 수십에 이를 것인데, 그 정도로 전 분야를 커버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나가는 분야가 독점하거나, 상당수의 분야는 한두 개를 배정받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예컨대 필자가 속해 있는 국어국문학[혹은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 수백의 학회가 있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몇 개의 학회들에 걸쳐 있는데,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한 두 개의 학회를 선정할 것인가. 여기서도 특정 부류의 소수 인사들에 의해 학문 외적인 ‘힘’이 구사될 것은 뻔한 일이다. 온정주의나 연고주의가 정치권 못지않게 판을 치는 곳이 학계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고, 기존 정책들의 실패 또한 근원적으로 여기서 연유되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다시 그런 부조리와 말썽을 반복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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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온당한 일일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어떤 제도이든 부작용 없이 안착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 학문의 본질이나 학자들의 자존심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등재’ 제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출범하여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원래의 취지를 살려가는 쪽으로 보완해가는 것이 나라 전체를 위해 최선이다. 13년을 끌고 가다가 ‘이게 아닌가봐!’ 하고 내팽개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보완해 써야 한다. 맘에 안 든다고 내팽개치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 한국의 모든 대학들이 등재 제도에 기대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해오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제도 자체를 버린다면 대학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또 미래의 결과가 불투명한 시험에 돌입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대학사회는 영원히 모르모트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고, 똑 같은 착오의 고리 또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2014년까지 등재심사를 유예하겠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제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면 된다. 현 제도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논문의 질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도 학회지 별로 개별 논문의 심사를 시행함으로써 질의 평가는 어느 정도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논문의 인용지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니, 그 점을 추가하면 된다. 유예기간 4년 동안 학술지의 인용도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보는 것이다. 인용도에 따른 순위나 점수를 학술지들에 적용하여 등재[후보] 학술지들을 다시 스크린할 경우 우열이 판명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술지 전체를 ‘일반학술지-등재후보학술지-등재학술지-선도학술지[가칭]’의 4단계 시스템으로 재편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선도학술지에 선정된 학회들에는 상당액의 지원금[1억 5천만 원까지 줄 필요는 없다!]을 지원함으로써 국제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해야 한다. 다만 각 단계마다 ‘진짜로 엄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쉽게 승급할 수 없도록 관리한다면 학회의 질서는 저절로 잡혀 갈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지금의 제도를 부수지 않고도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용도를 새로운 잣대로 채용한다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그 인용도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젊은 학인들이 논문의 우열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도교수나 선후배들의 논문만 인용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속한 학회의 학회지만을 인용하게 되는 폐단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폐단은 우리 지식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면 저절로 사라질 문제일 것이니,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메이저 대학 교수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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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만큼 지식사회 또한 휘청대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바뀔 수 있으나, 정책이나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육제도나 학문정책이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며, 바뀌더라도 구성원들이 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연구실에서 밤을 밝혀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대학에 채용되기 위해 논문 집필에 매진하는 ‘교수 지망생들’이 있다. ‘진정한 학자라면 학술 평가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질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든 그렇지 않은 학자든 모두 ‘제도 속의 구성원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제도에 의해 유불리(有不利)가 결정되는 생활인들이자 세속적 존재들이란 말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참에 제도를 한 번 확 바꿔버릴까?’라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떠올려야 할 덕목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이나 제도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지식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항심(恒心)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2012. 1.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0. 25. 10:57
 

 교수들을 ‘구름 위의 신선’이나 ‘도덕군자’ 쯤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요즘 들어 교수가 관련된 파렴치 범죄들이 노출되면서 교수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주어왔던 기본점수까지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의 가상한 정서다. 전통시대에 형성된 스승관(觀)이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정신적 거래행위’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질적 거래행위’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범주에 올려놓고 전자를 신성시하는 행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렵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요즘의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행위(商行爲)와 일치시킴으로써 교육과 관련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혹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성된 보통사람들의 교수관(觀)이야말로 교수직에 대한 일종의 ‘우스꽝스런 외경심(畏敬心)(?)’이라고나 할까.

 그 뿐 아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일의 지난(至難)함 아니 극난(極難)함이 교수직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고조시키는 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 보라! 넘쳐나는 교수임용 대기자들, 예비 학자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구체제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대학원생들... 교수직을 아예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비정년직으로 대충 땜질하고 있는, 교수시장의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면,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교수직 진입의 어려움’은 ‘교수직에 대한 선망’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교수직에 대한 선망은 다시 교수직에 대한 진입 욕구를 증진시킬 것이다. 이런 현실은 유능한 대기자들의 교수직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일종의 ‘악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직 혹은 교수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더욱 왜곡되어 갈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아니 생활인이다. 뿔을 마주 대고 싸우는 벼랑 위의 산양(山羊)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해관계로 첨예하게 다투고, 한줌의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음해하기도 한다. 정론을 펴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입방아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바깥의 사람들보다 저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상아탑의 교수들을 ‘맹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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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고려대 정 아무개 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론보도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왕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따’의 원인을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대표적인 메이저 대학들 가운데 하나가 고려대학이다. 한국 대학들의 저급한 관행으로 미루어 고려대학 교수진이라면 대부분 고려대학 출신 이상들만 모여 있을 것이니, 지방대학인 공주대학 출신의 정교수가 흡사 ‘붕어 떼 틈새의 피라미’ 정도로 여겨졌을까? 피라미 정도가 붕어 급인 자신들 사이에서 노니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을까? 그들은 왜 ‘가련한’ 그를 왕따시킨 걸까?

 사실 한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 구성원들과 다른 행동양태를 갖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평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 양자 모두 사회적 병리현상들로서 ‘치유 불가능한 부정적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입(移入)된 구성원의 능력이나 자질이 자신들의 평균보다 낮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당황스런 다수는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까닭 없이 특정인을 배척하는 행태, 그것이 바로 ‘왕따’다.

 나는 정교수의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 교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카르텔’을 고려해볼 때, 그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고려대학 같은 메이저 대학에 입성했다는 그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그가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런 암초들을 피해 ‘교수임용’이라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었으랴. 아마도 간신히[혹은 너끈히] 접안(接岸)에 성공한 그를 보며, 선배교수들이나 동료들은 ‘어라, 저 놈 봐라!’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장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학부 졸업장을 쥐고 있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노비문서’인 학부 졸업장의 원천적인 핸디캡을 시원스레 극복해낸 그에게 박수를 치는 대신, 도리어 새로운 양태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으리라.
교수들이 뜻만 합친다면 동료교수 하나쯤 ‘왕따’시키는 일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교수가 관여해야 할 온갖 일들이 ‘왕따 작전의 현장’일 것이니, 그 속에서 갓 40의 여린 그가 감내해야 할 부담은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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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대학이고 교수집단이다. 그러나 ‘실력을 제외한’ 온갖 기준들을 지뢰처럼 묻어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무자비한 집단’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방, 서울과 수도권, 본교와 분교 등은 1차적 차별 기준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라고 모두 ‘서울대학’은 아니다. 그 속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 서울의 1류라고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초일류와 범일류가 있고, 준일류도 있다. 2류와 3류도 같은 방식으로 세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상의 대학 내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기준들이 엄존한다. 이런 차별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은 단 두 갈래다. 가당찮은 우월감과 비참한 열등의식이 그것들이다. 일류대학 구성원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묘한 차별이 자행되고, 그에 따르는 ‘상대적 열등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지식사회의 그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실력에 의한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나라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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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세칭 일류대학 출신의 유학생을 한 사람 만난 적이 있다. 학교에 갔다가 자신보다 먼저 유학 온 어떤 사람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어중이떠중이대학 출신들이 모두 유학이란 걸 오는구나!”라고 말하더란다. 자신이 나온 대학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서열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그가 자존심이 상했던 듯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을 거라고 씁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다. ‘글로벌 시대’를 고창(高唱)하며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누가 감히 우리를 넘보랴?’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못난이들이 바로 우리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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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순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고려대학의 정교수가 아쉬운 것이다. 까짓것 못난이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굳세게 버티며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잘한 참새들의 입방아를 넌지시 웃어주며 학문의 대로(大路)를 뚜벅뚜벅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0. 10. 22.

      타쉬켄트의 호텔방에서  
      백규,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