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5. 2. 3. 14:08

한국문예연구소 2015년도 상반기 전국학술발표대회 안내

 

 

 

 

 

안녕하신지요?

을미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는 작년 여러 권의 학술총서들을 발간했고, 논문집 <<한국문학과 예술>>이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로 승격되었으며, 연구소의 과제[용비어천가와 악무 <봉래의>의 복원과 문화코드 탐색]2014년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지원사업 '인문사회 우수성과'로 선발돼 표창을 받은바 있습니다.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힘써 주시고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17세기 연행록을 중심으로 2015년도 상반기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갖고자 합니다. 많이들 참석하시어 경청해 주시고, 고견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추운 겨울,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국문예연구소 드림

 

 

학술대회 안내

 

일시 : 201526일 금요일 오후 1~오후 530

장소 : 숭실대학교 벤처관 311

주최 :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사회 : 허명숙(숭실대)

 

13:10~13:50 17세기 사행록의 연구현황과 전망

발표 : 정영문(숭실대)

토론 : 박성순(동국대)

 

13:50~14:30 17세기 초 사행록 서술의 양상

발표 : 김지현(한중연)

토론 : 김동석(성균관대)

14:30~15:10 17세기 초 사행록에 나타난 조선 지식인의 대외인식

- 정두원의 [조천기지도]를 중심으로

발표 : 서지원(숭실대)

토론 : 신춘호(방송통신대학 TV)

 

15:10~15:20 중간휴식

 

15:20~16:00 17세기 명청교체와 대중국사행의 변화

발표 : 김경록(전쟁기념관)

토론 : 황민호(숭실대)

 

16:00~16:40 17세기 초 사행록에 나타난 중화질서의 혼란양상

발표 : 윤세형(서일대)

토론 : 양훈식(숭실대)

 

16:40~16:20 휴식 및 회의장 정리

 

16:20~17:30 종합토론

좌장 : 조규익(숭실대)

 

오시는 길

 

지하철 : 7호선 숭실대학교 입구(살피재)3번 출구

용산역 택시 : 15

버스 : 신용산역 이동(4분 소요) 후에 501, 506, 750A, 750B, 751 승차, 26

노들 역 택시 : 8

버스 : 노들역에서 501, 752, 5517, 751, 501 승차, 20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 7. 20:28

길 잃은 교육부, 휘청대는 지식사회

 

                                                                                                                                                     조규익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 피터 드러커가 말한 바와 같은 ‘지식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기술의 혁신이나 정책 결정의 기초가 되는 사회, 지식의 생산이나 응용에 종사하는 이른바 ‘지식노동자’가 힘을 갖고 있는 사회를 지식사회라 하는데, 그 경우의 지식사회는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을 대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가 지식인들인가? 권력을 잡은 계층이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지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이 무한경쟁과 무질서로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 혹은 ‘약삭빠른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지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실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이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데, 최소한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연마한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지식사회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식사회이려면, 그 지식은 ‘건전한 양식이나 합리성’과 연동(連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지식사회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최근 우리의 자화상을 목격한 뒤 하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다 보니 ‘지식사회’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뿐이다.

 

***

 

얼마 전 교육부는 98년부터 시작한 ‘학술지 등재’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 다양한 학문분야에 많은 학회들이 있었는데, 누구의 발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학회들만 다잡아서 획일화 시키면 학문의 질이 저절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관변에서 단물을 즐기던 일군의 학자들이 ‘통치적 발상’의 부림을 받아 그런 묘안을 만들어 올렸을 것이다. 사실 학문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정부가 나서서 학술지의 등급을 매기는 나라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고,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에 이 분야가 있었다면, 단연 우리나라의 교육부가 단독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리라. 오죽 답답했으면 나라가 학문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섰을까 생각하면 지식사회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고 착각하는 필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물며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이야 오죽했으랴! 머리 성성한 노학자들이 서류뭉치를 들고 학진의 사무원들 앞에 굽신거리며 ‘등재’의 재가를 받아오면서 희희낙락해온 것이 그동안의 희화(戱畵)였다. 모든 학회의 이름을 ‘○○학회’로 통일해야 한다면서 ‘연구회, 세미나, 포럼’ 등 모임의 다양한 명칭들을 없애버렸고, 참고문헌의 형태, 요약문의 길이, 주제어의 개수 등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점수를 매기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것이 이 나라의 지식사회다. 단 몇 년 사이에 수백 수천 개의 학회들이 국군의 날 의장대 정열하듯 정연해졌고, 그 형식요건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으며, 편의성을 좋아하는 대학들은 얼씨구나 하고 그걸로 업적평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키보드에 교수 이름만 쳐 넣으면 학진의 홈페이지에 연동되어 1년간 발표한 논문이 주르르 흘러나오니 행정적으로 얼마나 편한 일이며, 시비 또한 일어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학진의 규정만 잘 따르면 일반 학회는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 등재후보 학회는 등재학회가 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규정이라는 것이 형식요건에 그치는 것이라서 사실 심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굳이 심사라는 절차를 만들어 학회 운영진을 애태우는 일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어떤 사회인가. 온정으로 똘똘 뭉친 사회다. 서로 품앗이하듯 서로의 학회들을 웬만하면 올려주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인 것을!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자 신청한 학회들을 무슨 근거로 탈락시킬 것인가. 자연스레 기본 요건만 갖추면 모두 등재후보, 등재학회로 등극하게 된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등재(후보)학회의 경우 웬만하면 학술지 발간비에 학술회의 비용까지 지원해주고 있으니, 그간 한국의 학회들은 학진의 품속에서 꿀맛 같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 덕에 한국의 학계가 많은 논문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학에 입성하려는 학인들 가운데 분야에 따라 한 해에 열편도 넘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고 지금도 학진 등재논문으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학자들이 많으니, 그 점만큼은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논문 쓰는 맛을 비로소 보기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하는 분이 있을 정도다. 분명 이 점은 등재 제도가 갖고 있는 기능들 가운데 긍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

 

그런데, 이제 그 제도의 문을 닫겠다고 한다. 별 뚜렷한 대안도 없이 13년 동안 한국의 지식사회를 순치(馴致)시켜 온 제도의 막을 아예 내려버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등재 학술지로 승격하는 학회의 수를 제한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초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형식요건이 갖추어져 있는 이상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학회들도 없고, 형식요건에 맞는 것들을 내용상의 문제로 퇴짜를 놓을 강심장의 학자들도 없다. 그러니 너무 많은 학회들이 등재의 범주에 들어와 버렸고, 국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교육부와 학계의 일부는 그 탓을 이젠 학자들에게 돌린다. 제도를 만들고 제대로 엄정하게 관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둔 채 일부 드러나는 문제들만 거론하며 학자들의 ‘양식 없음’ 만 탓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 원래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대안도 없이 송두리째 없애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자들의 학문적 생산과 평가, 혹은 학회라는 학문 공동체를 정부의 획일적인 잣대나 틀에 의해 재단하려 한 것은 상식 이하의 처사였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13년 된 제도를 보완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송두리째 없애겠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아파트 재건축’만도 못한 하책(下策)이다.

정부에서 내 놓은 안은 올해 10개, 내년에 15개, 내후년에 20개 내외의 학회를 선정하여 매년 1억 5천만원씩 최장 5년간 지원해 ‘세계적인 학술지’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좋아 할까. 학회나 학술지들이 어찌 돈을 퍼붓는다고 단숨에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세계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으로 천문학적 돈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실패로 판명되고 있는 ‘WCU(World Class University ;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 )’ 제도를 보면서도 다시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사용하는 배짱은 과연 어디서 연유된 것인가. 우리 민족의 DNA 때문일까. 1억 5천만 원씩 5년간 특정 학회에 퍼붓는다고 ‘세계적인 학회’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과연 누구로부터 나왔을까. 따져 보자. 아무리 큰 학회라 할지라도 1년에 네 번 정도의 학술지를 간행할 것이다. 1회 간행비를 5백만 원으로 잡는다면 학술지 간행에 2천만 원이면 넉넉하고도 남는다. 학술회의를 두 번 한다고 쳐도[매번 국제학술회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매년 한 번씩만 국제학술회의를 한다면] 2천만 원이면 넘칠 정도다. 그렇다면 남는 돈은 회원들의 연구비로 지급할 것인가? 아니면 학회 통장에 적립할 것인가?

10개나 15개의 학회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학문분야만 따져도 수십에 이를 것인데, 그 정도로 전 분야를 커버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나가는 분야가 독점하거나, 상당수의 분야는 한두 개를 배정받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예컨대 필자가 속해 있는 국어국문학[혹은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 수백의 학회가 있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몇 개의 학회들에 걸쳐 있는데,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한 두 개의 학회를 선정할 것인가. 여기서도 특정 부류의 소수 인사들에 의해 학문 외적인 ‘힘’이 구사될 것은 뻔한 일이다. 온정주의나 연고주의가 정치권 못지않게 판을 치는 곳이 학계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고, 기존 정책들의 실패 또한 근원적으로 여기서 연유되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다시 그런 부조리와 말썽을 반복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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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온당한 일일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어떤 제도이든 부작용 없이 안착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 학문의 본질이나 학자들의 자존심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등재’ 제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출범하여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원래의 취지를 살려가는 쪽으로 보완해가는 것이 나라 전체를 위해 최선이다. 13년을 끌고 가다가 ‘이게 아닌가봐!’ 하고 내팽개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보완해 써야 한다. 맘에 안 든다고 내팽개치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 한국의 모든 대학들이 등재 제도에 기대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해오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제도 자체를 버린다면 대학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또 미래의 결과가 불투명한 시험에 돌입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대학사회는 영원히 모르모트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고, 똑 같은 착오의 고리 또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2014년까지 등재심사를 유예하겠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제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면 된다. 현 제도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논문의 질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도 학회지 별로 개별 논문의 심사를 시행함으로써 질의 평가는 어느 정도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논문의 인용지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니, 그 점을 추가하면 된다. 유예기간 4년 동안 학술지의 인용도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보는 것이다. 인용도에 따른 순위나 점수를 학술지들에 적용하여 등재[후보] 학술지들을 다시 스크린할 경우 우열이 판명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술지 전체를 ‘일반학술지-등재후보학술지-등재학술지-선도학술지[가칭]’의 4단계 시스템으로 재편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선도학술지에 선정된 학회들에는 상당액의 지원금[1억 5천만 원까지 줄 필요는 없다!]을 지원함으로써 국제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해야 한다. 다만 각 단계마다 ‘진짜로 엄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쉽게 승급할 수 없도록 관리한다면 학회의 질서는 저절로 잡혀 갈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지금의 제도를 부수지 않고도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용도를 새로운 잣대로 채용한다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그 인용도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젊은 학인들이 논문의 우열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도교수나 선후배들의 논문만 인용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속한 학회의 학회지만을 인용하게 되는 폐단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폐단은 우리 지식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면 저절로 사라질 문제일 것이니,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메이저 대학 교수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만큼 지식사회 또한 휘청대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바뀔 수 있으나, 정책이나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육제도나 학문정책이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며, 바뀌더라도 구성원들이 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연구실에서 밤을 밝혀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대학에 채용되기 위해 논문 집필에 매진하는 ‘교수 지망생들’이 있다. ‘진정한 학자라면 학술 평가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질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든 그렇지 않은 학자든 모두 ‘제도 속의 구성원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제도에 의해 유불리(有不利)가 결정되는 생활인들이자 세속적 존재들이란 말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참에 제도를 한 번 확 바꿔버릴까?’라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떠올려야 할 덕목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이나 제도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지식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항심(恒心)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2012. 1. 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