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1. 00:30

 

   위 <천리포의 일몰-2011. 7. 20.>
   아래 <동해의 일출-양양 솔비치 앞바다, 2010. 1. 18.>

                                         
 몇 시간만 지나면 또 한 해를 맞는다. 누군들 예외일 수 있겠는가만, 신묘년이 한 뼘 가량 남은 지금 심사가 적잖이 복잡하다. 대충 계산해 보아도 지난 한 해 개운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들을 저울에 달 경우 약간 뒤쪽으로 기운다면 일단 후회가 많은 한 해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 옛날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감회를 노래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에게 ‘벼슬에 앉아 있던 시간대와 벼슬에서 벗어나 고향에 돌아온 시간대’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벼슬살이가 잘못된 일이었고, 벼슬을 던지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깨달음을 그 시에서 강조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난 시간대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뉘우친다. 어리석음과 잘못을 1년 단위로 뉘우쳐서 지난해의 그것들이 무(無)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스타트 라인에 다시 올라서서 가벼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포맷이 불가능한 컴퓨터’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모두 안고 가야하며 그에 따르는 부담을 함께 져야 하는 운명적 존재다. 잘한 일이 많으면 밝은 인생을 살 수 있고, 잘못한 일이 많으면 어두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어제의 잘못을 깨끗이 반성하고 ‘새 출발’을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 기억과 상흔이 컴퓨터 포맷하듯 어찌 말끔하게 지워질 수 있으랴. 그래서 사람들은 번뇌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가슴을 치기도 하고 발등을 찍기도 하며, 스스로를 호명하며 저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회가 나 같은 필부(匹夫)들만의 일은 아니다. 임기 말의 레임덕에 사로잡힌 대통령도 지금쯤 아마 그런 심정일 것이다. 취임 초부터 지금까지 능력 있고 청렴한 사람을 쓰지 못한 채 한사코 주변의 사람들, 인연을 맺은 사람들만 쓰는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에 널린 필부들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 준 사례가 바로 대통령의 인사였다. 인사청문회에 서는 후보들마다 어쩌면 그리도 오점들로 가득하단 말인가? 모래알처럼 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찌 하여 그런 인사들만을 골랐을까?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람만을 골랐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내 집 안방의 구들장을 놓을 때도 능력 있는 기술자를 골라야 하거늘, 황차 국가대사를 맡기는 장관을 고르는 일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리오? ‘까짓것 어떠랴? 일만 잘 하면 그만이지!’라고 밀어붙였으리라. 그런 일들이 누적되다 보니 임기 말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아마 대통령도 지금쯤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사사건건 사람을 천거하며 압력을 넣던 ‘형님’이나 측근 몇몇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못한 것도 후회일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르치고 나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최상급의 지도자는 처음부터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그 다음 등급은 한 번 실수 이후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며, 최하급은 같은 실수를 연달아 저지르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통령을 최하급이라 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사실 그렇다.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사람을 잘 못 보는 일’이다. 사람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는 일만큼 뼈아픈 일도 없다. 국가나 공동체의 공직에 부적합한 사람을 선택하여 후회하는 일은 지금 눈 아프게 목도(目睹)하고 있으므로 논외로 하자. 개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를 잘못 판단한 남녀 간의 사랑은 씁쓸한 비극의 단초다.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요즘 청춘남녀들의 애정 사고는 공부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포함하여 각종 인간관계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속아 가까이 한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사례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속을 끓이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부지기수일 것이다. 사람들을 잘 못 보고 믿다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것은 올 한 해의 쓰라린 후회들 가운데 하나다.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 좋겠으나, 간단히 포맷할 수 없으니 어쩌랴! 그 영향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니 그 또한 근심이다.

***

 이제 밝아 올 임진년엔 형형(炯炯)한 용의 눈과 과감한 용의 심성을 닮고자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수직으로 치솟는 용의 기상을 배우고자 한다. 급격히 흐릿해져 가는 육안(肉眼) 대신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심안(心眼)을 갖추는 일에 매진하고자 한다. 일에 직면하여 이리저리 재며 소리(小利)를 탐하기보다 대의(大義)를 향하여 맹진(猛進)할 것이다. 더불어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전하신 사물잠(四勿箴)[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을 ‘똑 소리 나게’ 한 번 지켜보고자 한다. 나이 먹을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지혜가 고갈되어 주변 소인배들의 교언영색에 스스로 무너지는 나 자신이 가련하니,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발등 찍는 일’은 반복하지 않을 일이다. 입에 칼을 물고라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을 사전에서 도려낼 일이다.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시점에
                                       
                                        백규, 재계(齋戒)하고 다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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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2. 3. 16:15

대통령의 말

 

최근 대통령이 만찬 회동에서 집권당 대표에게 “당신, 이제 거물 됐던데”라고 한 말은 곱씹을수록 우리나라의 국격(國格)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찜찜하고 불쾌하다. 신문의 보도대로라면, 당시 대통령이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니 비아냥대는 말투였을 것이고, 속마음 역시 편치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대통령은 누구인가. 나이로 쳐도 이순(耳順)을 훨씬 넘겨 곧 고희(古稀)에 이를 분이고, 항간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집권당 대표는 이 나라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인사일 뿐 아니라 나이 또한 이순을 넘긴지 오래다. 그러니 두 사람 모두 이 나라 정계의 거물들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대표에게 ‘당신, 이제 거물 됐던데’라고 했다면, 그동안 대통령은 대표를 우습게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얼마 전 대통령이 추천한 감사원장 후보에게 자진사퇴를 권유한 것이 한나라당이고, 그 일의 주동이 안 대표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번 해프닝이 그로부터 연유되었다는 것 또한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집권 여당으로서도 감사원장 후보에게 많은 문제가 있었기에 대통령의 뜻과 다른 말을 하게 된 것이고, 그 때문에 당이 겪었을 곤혹스러움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과 대표 단 둘이 만난 사석에서라면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안가(安家) 회동’이라고는 하지만, 다수의 인사들이 참여한 자리였던 만큼 공적인 성격을 배제할 수 없는 모임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내뱉듯이 던졌다면, 대통령의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조가 망한 뒤 식민 상황과 분단 상황을 거치면서 심화된 이념적 갈등은 우리의 집단정서를 험한 방향으로 몰아 왔으며, 그 위에 더해진 산업화와 비인간화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표출시켰다. 집단 정서의 조악성(粗惡性)은 개인들의 언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그런 부정적 성향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최근 문제되는 ‘악플[악성 댓글]’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활약해 오던 조직폭력배 문화[조폭문화]의 1차적 징표는 거친 언어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입에 올렸다던 ‘당신, 이제 거물 됐던데’ 식 어법은 얼마 전까지 조폭세계에서나 통용되던 것인데, 이번 일로 그 어법이 이제 이 사회의 하이클래스에도 수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표면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대중사회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한 인간이 속한 이면적인 계층을 점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교양의 정도나 인격을 나타내는 1차적인 잣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고 감정이 없을 수 없겠으나, 시시각각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노출되어 전 국민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아무 말이나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무거워야 하고, 전략적이어야 하며, 충분히 모범적이어야 한다.

말을 절제하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나라를 맡겨도 괜찮을지 불안함을 느끼는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대통령의 리더쉽은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011. 2. 3.)
 
                                                                                                               조규익(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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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1. 24. 15:36

 *모처럼 가면을 벗고 육두문자 비스름한 푸념 한 마디만 풀어놓아볼까?
                          


‘어려움을 당해봐야 사람의 그릇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들 치고 갑작스레 닥친 난관 앞에서 허둥대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家長),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首長),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얼굴들을 갖고 산다. 그 수가 하도 많아 어느 것이 내 얼굴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래서 그 얼굴들은 대부분의 경우(아니 모든 경우) 진면(眞面) 아닌 가면(假面)들이다.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는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말이 되었지만, 원래는 심리학에서 사용되어온 학술적 용어다. 이 말은 에트루리아의 어릿광대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하거나 타인 혹은 주변세계와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칼 융은 말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나도 많은 가면을 갖고 있다. 자상한(혹은 엄하고 곧은) 아버지나 남편의 얼굴로 집에서 쉬다가, 출근을 위해 차에 시동을 걸면 그럴 듯한 가면으로 잽싸게 바꾸어 쓴다. 강의실 문 앞에 서면 자못 근엄한(?) 교수의 가면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술자리에서는 악동의 가면을 쓴다. 그러니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가면을 진면으로 착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실수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아놓고 후회들을 한다. 그의 가면을 보고 뽑았는데, 나중에 언뜻언뜻 보이는 진면들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국민들은 대통령이 선택한 각료들만큼은 진면을 보려고 애들을 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가면 뒤에 숨은 진면을 노출시키게 되고, 그 때문에 상당수는 낙마(落馬)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가면만 보고 사람을 뽑아 나라의 살림을 맡겨놓으니, 그 살림은 “잘 되어야 본전”일 따름이다.

***

지금 가면 이야기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가 못하다. 막 가자는 북한의 망나니들이 또 불장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저들은 불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존심과 함께 소중한 생명, 재산을 잃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천안함 사건을 당하고도 대비를 못했는가, 이번에도 우리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사실 ‘천안함 피격’만큼 우리 사회의 바보스러운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도 없다. ‘노루 친 몽둥이 삼 년 우려 먹는다’든가? 입만 열면 ‘대양해군’, 입만 열면 ‘연평해전’을 떠들어대며 폼을 잡던 해군의 ‘똥별들’은 다 어느 쥐구멍에 숨어들었는가. 방위산업을 육성하여 선진국들과 경쟁을 하는 수준에 올랐다고 거들먹거리던 위정자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비까번쩍하는 이지스함을 띄우면 뭘 하는가?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고철 덩어리 비스름한 잠수정 하나에 맥을 못 춘다면 천문학적 돈을 퍼부어 그런 함선을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실사구시’를 하지 못하고 폼이나 잡고 있다면, 동네 건달패나 다를 바가 무엇일까. 그나마 그 정도로 창피를 당했으면 즉시 깨닫고 정신을 차려야 옳았을 텐데, 똑 같은 깡패들한테 또 당하고 말았다.

TV에 비치는 이른바 이 나라의 지도자란 자들의 낯짝을 보셨는지? 자못 근심스럽고 근엄한 가면을 쓰고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표정을. 천암함 처리과정을 보면서 동네북으로 전락한 우리의 꼬락서니를 그 깡패들은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 놓고 한 대 더 때려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 놓고 스트레이트 펀치를 우리의 턱에 명중시킨 것이다. 백주대낮에 내 땅에 대포를 쏘아대는 모습을 두 눈 멀뚱 멀뚱 뜨고 바라보면서 ‘확전시키지 말라!’는 명령이나 내리는 비겁한 필부의 가면을 드디어 보고야 말았다. 그 깡패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깡패들은 모든 국민들이 ‘하늘같이 믿고 따르는’ 대통령의 얼굴에 ‘겁장이의 가면’을 덮어씌우고 싶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조준되는 미사일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리? 반격할 용기가 없는데. ‘다음번에 또 때리면 가만 안 둬?’라고 중얼거리며 ‘밤탱이가 된 눈’이나 껌벅거리는 겁한(怯漢)에게 어느 깡패가 겁을 먹으리?

***

모조리 갈아 치워야 한다. 군대 근처에도 못 가본 필부들이 나라를 운영한답시고 자못 근엄한 가면을 쓴 채 거들먹거리는 꼴은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 깡패들과 한 통속이 되어 사사건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애태우는 이 땅의 이른바 좌파들도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자존심도 실리도 모두 챙기지 못하는 필부의 궁량으로 육천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공염불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차라리 대통령의, 국회의원의, 장관의, 장군의 가면들을 벗어라. 차라리 ‘나도 여러분처럼 한 개 필부요!’라고 커밍아웃이라도 시원하게 해보아라.

 

이제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린 채, 밀물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내 나라를 어찌 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10. 5. 11:42

버려진 아가들, 거두어진 아가들

 

조규익

 

언제부턴가 문숙희 교수 부부의 권유로 한 사회복지재단에서 ‘신생아 안아주기’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입으로 ‘봉사를 합네’라고 말하기 면구스러울 정도로 미미한 일이지만, 이미 내 일상 가운데 최고의 스케쥴로 자리잡았다. ‘버려졌으나 가까스로 거두어진’ 신생아들을 만나는 매달 첫 토요일 오후. 설레는 마음으로 이 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아가들의 눈빛에서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둘씩이나 낳아 키우며 그들을 안아 준 기억조차 아스라한 내가 남들이 낳아놓은 아이들을 제대로 안아 줄 수 있을까?’ 더구나 ‘철없는 미혼모들이 버린, 그 아가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을까?’ 처음에 한동안 망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끌려가듯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조막만한 아가천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갓 태어난 아가에서 두 달쯤 된 아가들까지 하얀 강보에 싸인 채 각각의 침상에 군대 내무반에서 ‘취침점검’ 받는 자세들로 누워 있었다. 대부분 잠에 취해 있는 가운데, 어떤 녀석들은 지독하게도 울어대곤 했다. 젖 먹을 시간이 된 경우, 쉬를 싼 경우, 몸이 불편한 경우 등 그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도 대충 세 가지로 분류된다. 개중에 먹성이 좋은 녀석들은 식사 시간도 되기 전에 칭얼대지만, 단체생활을 하고 있는 몸이니 엄마와 같은 보살핌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안타까운 모습들도 없지 않았다.

대부분 녀석들은 안아주면 좋아한다. 어떤 녀석은 눈을 맞추며 배시시 웃기도 한다. 한참 안아 준 다음 울고 있는 다른 녀석을 안아주려고 침상에 내려놓기만 하면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그만큼 가슴으로 살갗으로 눈으로 전해지는 사랑에 굶주린 때문이리라. 녀석들의 얼굴과 눈망울을 쳐다보노라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엄마 아빠는 누구였을까. 이곳에 오기까지 나 어린 그 엄마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은 어땠을까. 그들이 나눈 사랑의 순간은 달콤했겠지만, 임신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이에 일어났을 갈등과 고통은 얼마나 씁쓸했을까. 오죽하면 이 천사 같은 아가들을 버려 이곳까지 오게 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의 표정은 모두들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가. 이 아이들이 커서 홀로 서기까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다양한 인물로 커갈 것이다. 그 옛날 우리네 영웅들은 하나같이 ‘버려짐’의 쓰라린 기억을 안고 자라난 인물들이었다. 많은 전설과 신화에 보이는 ‘기아(棄兒) 모티프’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영웅으로 자라나 부족이나 민족을 이끈 지도자가 된 것이다. 최근 나는 이 아가들의 얼굴에서 숨어있는 대통령, 대기업 회장님, 판․검사, 멋진 배우, 훌륭한 선생님, 뛰어난 운동선수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만 그들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가 문제이리라. 내가 낳은 자식들에게만 사랑을 쏟아 붓는 우리네 사고방식으론 가능한 일이 아니겠지만, 골고루 햇볕을 쪼여주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새로운 의무가 아닐까. 가뜩이나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요즈음.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이 사랑을 나눈 결실로 태어난 아가들이다. 비록 비정상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자발적인 노력으로(?) 가능성을 지닌 다수의 인재들을 국가에 안겨준 셈이니 그 젊은 부모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들 아닌가. 그 아가들을 재목으로 키워낼 것인지 잡초로 버려둘 것인지는 국가와 국민들이 결정할 일이다. 이 틈 저 틈으로 새어나가는 국부(國富)의 물꼬를 이들의 양육에 돌려야 할 때다. 쓸데없는 싸움질들 그만 하고, 대통령도 국회의원들도 모두 한 달에 한 번씩은 보육원에 와서 아기 안아주기 봉사에 참여할 일이다. 나랏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이들을 최고의 환경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4. 26. 12:38
*이 글은 "2008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기연주회 - 노래와 선율이 함께 하는 여민락"(2008. 4. 17.)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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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 공연 팜플렛>

왜 지금 ‘여민락’을 말해야 하는가


                                                                조규익(숭실대 교수)


아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용비어천가> 읊지 말라’고 핏대를 올리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다. 정도 이상으로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언론의 논조에도 ‘노비어천가’를 부른다거나 ‘명비어천가’를 읊는다고 비난한다. <용비어천가>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그것을 ‘아부성 발언’으로 폄하하는 데 용감하다. 철학과 경륜을 갖추었던 한 시대의 지성들이 왕도정치와 이상국 건설의 꿈을 담아 만든 <용비어천가>가 500여년 후의 무식한 자손들로부터 이렇게 몹쓸 희롱을 당하는 현실이다.


세종대왕의 주도로 만들어진 향악정재 ‘봉래의’에서 전인자와 진구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여민락’이고, 그 음악에 올려 부른 가사가 바로 <용비어천가>(1·2·3·4·125장)다.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 그 음악의 취지이고, 그것을 정재의 앞부분에 배치했으니,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만하다. ‘애민(愛民)’이야말로 치자가 명심해야 할 첫 덕목임을 세종대왕은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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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장가사의 여민락 부분>

조선왕조의 근원이 깊고 멀다는 것, 왕 되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나라를 영원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 등이 <용비어천가>의 내용적 줄기다. 물론 6조(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사적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용비어천가>의 핵심인 ‘물망장(勿忘章)’(110~124장)과 ‘졸장(卒章)’(125장)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적 장치일 뿐이다. 초등학생일지라도 그런 내용을 가지고 ‘<용비어천가>=아부성 발언’이라는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주거를 호화롭게 하지 말라, 좋은 음식을 탐하지 말라, 형벌을 마음대로 하지 말라,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말라, 아부하는 간신들을 멀리 하라, 백성들의 언로를 막지 말라,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어 나라의 근본을 다져라, 바른말 하는 신하를 중시하라, 학자들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왕조 초반에 최고의 지성들을 모아 이런 금언(金言)을 만들고,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무대에 올려 공연하게 함으로써 ‘군-신-민’이 함께 그 뜻을 새기도록 한 일을 동서고금의 어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한 번이라도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읽어 보면 그것이 임금을 위한 수신 교과서나 지배계층을 겨냥한 정치학 교과서일지언정 아부의 언사가 결코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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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을 연주하는 모습>


         ***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공복(公僕)임에도 지금껏 그들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최근 대통령이 공석에서 ‘머슴론’을 통해 땅에 떨어진 이도(吏道)를 질타한 일도 <용비어천가>의 핵심적인 내용과 맥을 함께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국태민안’이다. 국가를 태평하게 유지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상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 풍족한 의식주와 든든한 국방, 반듯한 사회기강 속에서 백성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권력과 부를 얻고자 아부의 수단으로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는 아니다.


고금의 역사로부터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을 얻은 지성인들. 그들은 <용비어천가>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어떻게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를 되새겨보고자 했다. 힘겹게 창업한 조선왕조가 영속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인 왕들이 나태를 벗어나 백성을 위하는 일에 매진해야 왕조는 망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후대의 왕들을 대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금언들을 들어놓음으로써 모든 공직자들까지 깨우친, 이른바 1석2조의 효과를 얻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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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 가사의 짜임>

‘임금이 하늘인 시대’였음에도 그들은 국태민안의 요체가 ‘경천근민(敬天勤民)’ 즉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일임을 감히 왕에게 강조한 그들이었다. 대통령이든 관료이든 민심이 천심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소리(小利)만 취할 때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국민의 공복임을 잊고 있는 관료집단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용비어천가>를 끊임없이 부르고 들어야 하는 시대다. 국립국악원이 ‘여민락’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자 한 일이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8. 14:08
대선 주자들, 담론(談論)의 격을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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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주자들, 담론의 격을 높여라
- 조규익

대선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한솥밥’을 먹어온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어 말에 칼날을 세우고 있다. 〈당서〉 ‘이임보전(李林甫傳)’에 ‘구유밀복유검(口有蜜腹有劍)’이란 말이 나온다. 말은 꿀과 같이 달고 친절하나 뱃속에는 날 세운 칼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원래 무서운 인물을 묘사한 표현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 표현도 양반이다. 모두가 최소한의 수사(修辭)나 미소도 없이 그대로 ‘도끼처럼’ 상대를 내려찍기에 바쁘다. 비록 적이라도 장점을 칭찬해주는 금도(襟度)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다. 국민들의 수준이야 자신들의 안중에도 없으니 오물 같은 증오의 언사들만 농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시대를 이끄는 ‘담론(談論)’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자기의 신념이나 객관적 가치의 관점에서 시대적 의의를 인정할 만한 언어가 담론이다. 지금 난무하는 담론 아닌 언설들은 기껏 대운하나 위장 전입, 탈세 등이 거의 전부다. 물론 그것들이 중요치 않다는 건 아니고, 그런 잘못을 파헤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이 되려는 자가 국민들의 의식주를 걱정하고, 그 문제 해결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것을 말릴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광복 이후 반세기가 흘렀지만 대통령 후보들의 생각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간 국가 지도자 덕에 우리가 산업화 사회, 정보화 사회, 고도 정보화 사회로 술술 넘어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업이나 국민들의 지혜로움이 그런 변혁의 기조를 만들어왔고, 정치권이나 지도자들은 따라오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이 변화의 기조가 제대로 된 것인지, 우리 사회가 달리고 있는 궤도가 온전한지 점검할 때가 되었다.

우리 경제규모가 세계 11위에 랭크되어 있다지만, 아직도 우리는 선진국 문앞에 서성대고 있다. 국민 모두가 투철한 문화의식을 갖지 못한 때문이다. 사실 문화의식은 전통과 보편주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뛰어넘어 국민적 자존심으로부터 발로되는 것이 문화의식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문화나 의식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인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대선 후보들이 읽어야 할 시대정신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거기서부터 하부 아젠다를 어떻게 설정하고 실행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국가 경영의 이념뿐 아니라 시대정신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보니 기껏 한다는 것이 남들의 흠이나 잡아내어 헐뜯는 일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불안하고 짜증스럽다. 검증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고 있는 네거티브 전략이 우리 사회의 신뢰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는 현실. 검증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검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을 검증하려면 철저한 자기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기검증만 제대로 한다면 굳이 남을 검증할 필요 없고, 그에 따라 ‘네거티브 전략’이란 저급한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네거티브 전략에는 담론이 필요 없거나, 있어도 저급한 수준으로 족하다. 국가 경영을 위한 미래지향적 기치를 만들어 내놓아야 할 후보들이 남의 말꼬리나 잡고 티격태격할 여유가 없다. 이제 대선 후보들은 담론의 격을 높여야 할 때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