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 13. 12:11

 

가짜 영웅 전성시대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있다.

()에 포위된 조()나라 왕이 합종을 위해 초()나라 왕에게 평원군을 파견했을 때였다.

평원군은 모사와 책사들로 20명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마지막 한 명이 모자랐다. 그 때 식객 중 모수란 자가 스스로 나섰고, 결국 그가 일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이다. 처음 모수의 정체와 능력을 의심한 평원군과 모수 사이에 오간 대화가 바로 낭중지추(囊中之錐)’. 대저 어진 사람이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는 법인데, 식객으로 있던 3년 간 모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평원군의 물음이었고, 그동안은 주머니 밖에 있었으니 이제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응수한 것이 모수의 답변이었다. 그래서 결국 모수는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어려울 때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한다는좋은 뜻으로 쓰여온 것이 '모수자천'이란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스스로 나서려 한다는 부정적인 말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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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도 민의를 받들어 나라를 경영해보겠노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모수자천식으로 등장한 인물들의 병아리 셈법이 참말 가관이다. 땅 덩어리 크기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는 미국 텍사스 주의 7분의 1, 캘리포니아 주의 4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에 서너 명의 고만고만한 인물들(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니 새삼 나까지 손목 아프게 이들의 실명을 이곳에 기록할 필요는 없으리라)이 등장하여 돌아다니는 모습을 날마다 보고 있노라면, 기가 찰뿐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건 원대한 포부나 숭고한 뜻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당장 국민의 눈을 호려보자는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전부인 듯하다. 누구의 말대로 현대판 천명(天命)’이라 할 수 있는 민의(民意)를 왜곡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참칭(僭稱)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시대를 읽는 눈이나 천하 질서의 재편을 노리는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하다못해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의 아픔을 읽는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배들의 아첨과 계략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골목대장에 지나지 못하는 존재들이 바로 이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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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諸葛亮)은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자신의 주군인 유비로 하여금 그 한 나라를 차지하게 했다. 이른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그것이다.[각주:1] 그도 궁극적으로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노렸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터. 천시(天時)를 타고 난 조조, 지리(地利)를 차지한 손권과 달리 유비는 인화(人和)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 제갈량의 생각이었다. 영웅이 되려면 천하를 호령할만한 권능을 지녀야 하고, 책사가 되려면 모름지기 주군의 장점을 꿰뚫어 보는 제갈량의 안목과 배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착안과 전략은 대국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실천은 작은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백성들은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세계는 국익에 따라 혼란스럽게 요동치는데, 눈앞의 식어가는 잿밥에만 눈이 먼 술사(術士)들이 자신들의 암매한 주군을 모시고 조막만한 권력을 차지하겠노라 동분서주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이번에야말로 천명이 자신들의 주군에 내려졌다고 믿는 것일까. 세속적 욕심 그득한 평원의 필부들을 영웅으로 둔갑시켜 내세운 채 만인의 눈을 속이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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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에 누가 영웅이란 말인가. 바야흐로 가짜 영웅들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이 소극(笑劇)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제갈량

 

 

 


유비

 

  1. 혹자는 필자가 이곳에 언급한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안철수의 신당 창당과 결부시키려 할지도 모르나, 단언컨대 그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새 글에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3. 21:18
아, 교수들의 꼬락서니여!
-새 정부에 참여한 문제교수들을 보며-

                                                                           조규익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직에 취임하려면 국회의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언론과 인터넷 매체의 ‘무자비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얼핏 국회의 청문회가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 후보자들에게 더 무서운 것은 후자다. 검푸른 물 넘실대는 바다에 무슨 괴물이 숨어 있는지 모르듯, 넓고 깊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바다엔 어떤 ‘저승차사들’^^이 칼을 갈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공직에 임명받은 사람들이 도덕성으로나 지적 수준으로나 도토리 키 재기로 뻔한 국회의원들을 청문회장에서 대면한다 해도 그리 겁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일 테니 잘 닦인 언변으로 둘러대면 별 문제없으리라 믿고 있을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재야 지식인들이나 익명의 투사들은 참으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과연 자신들의 생업은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의문일 정도로 표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시시콜콜 뿌리까지 캐내고야 말지 않는가. ‘설마 누가 기억하랴!’ 싶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주례사나 연설문, 작은 칼럼까지 챙기는 그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중년 무렵에 그럴 듯한 자리 하나쯤 꿰차고 싶으면 입이나 손끝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자식 놈들 좀 나은 학교에 보내고자 슬쩍 옆 동네 친구 집에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등 ‘얄미운 짓’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동사무소, 세무서, 등기소, 출입국 관리소, 이발소, 수퍼마켓 등 ‘얄미운 대상’의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이 인터넷 바다의 투사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적당히 둘러대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할 수가 없게 된 세상이다.
이번의 경우 누가 교수출신 장관들의 표절문제를 들춰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의 바다에서 그들의 범죄행위가 속속 업데이트 되거나 베일을 벗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을 갖는다. 하나같이 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른바 ‘잘 나가는’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탄식이 그 하나요, 비록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은 아니나 비리에 대한 사회적 응징을 목격하면서 갖게 되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과 안도감이 그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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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임명된 E여대의 김 아무개 교수, 청와대 수석으로 임명된 S여대의 박 아무개 교수 등은 그들 가운데 압권이다. 제한적으로나마 공개된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보니 두 사람 모두 해당 전공분야에서는 대단한 명망을 지닌 학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우러름의 대상이었을 것이요, 동학이나 선·후배들로부터는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은 그들을 얼마나  우대했을 것인가.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즉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을 이르는 말)’격으로 그의 덕망은 더 이상 숨겨둘 수 없어 새 대통령에게까지 발탁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뛰어난 분들이 학계를 욕 먹이고, 한국 지식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보도에 따르면 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십여 편이 넘는 저널들에 중복 투고했고, 박 교수는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 한다. 중복 투고는 이미 노무현 정권의 김 아무개 장관 때 문제가 불거져 그를 사임으로 몰고 간 사건이기도 한데, 이번 사건은 그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다. 특히 중복투고를 통해 ‘연구비’를 꼬박꼬박 받았거나 그 논문들이 승진·재임용에 이용되었다면, 그것은 표절 이상의 비리일 수밖에 없다.
박 교수의 행위는 더 참담하다. 표절의 경우 대개 같은 반열에 있는 학자들의 글을 대상으로 하기 마련인데, 제자의 글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경우야말로 가히 해외토픽 감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2002년과 2006년 두 건이나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니, 다시 무슨 변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앞으로 더 튀어나올 것들은 없을까 우려하는 것이 과연 나만의 걱정일까.   박 교수는 “‘의혹을 받은 논문은 2006년 4월 제자보다 먼저 학회에 투고했고 게재가 8월에야 되었으며, 내 논문이 제자보다 먼저 나왔고, 이후에 제자에게 데이터를 쓰도록 허가해줬다”는 요지의 해명을 했다 한다. 데이터를 공유하면 분석의 문장까지 같아지는지 수십 년 간 논문을 써온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변명 치고는 참으로 궁색하다.
논문의 선·후란 저널의 발행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논문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논문 작성 과정의 일들은 알아야 할 이유도 알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두 논문의 문장들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발행일자가 다르다면 뒤의 것이 앞의 것을 표절했다고 판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기본 상식을 모르지 않을 박 교수가 어째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제자와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내용이 동일하게 되었다면 그런 사실을 각주로 밝혀 놓든가, 기자들의 추정대로 공동논문이라면 공저자로 제자의 이름을 넣든가,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진짜로 박 교수의 해명이 맞다면 그 제자가 박 교수의 논문을 표절한 것이 분명하니, 제자를 추궁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정신이 돌지 않은 이상, 어찌 감히 제자가 학위논문 지도교수의 논문을 표절할 수 있겠는가. 제자가 지도교수의 논문을 ‘슬쩍 했다’기보다는 논문의 마감 시한에 쫓긴 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대충 ‘짜깁기’했다고 보는 게 정황 상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분은 제자들에게 아마도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교수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석사논문 쯤이야 대부분 학자들이 무시하는 현실이니, 들킬 염려도 없을 테고. 어차피 학계에 존재가 알려질 논문도 아니라면, 지도교수인 내가 좀 실례 하는 것도 그대에게 그다지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 라는 일방적 선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써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

이제 한국의 지식사회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한 편의 논문을 써서 이 저널, 저 저널에 싣는 행태는 그래도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건 아니니 좀 덜하다고 치자. 학자금과 생활비의 조달에 잠 잘 시간도 없는 요즈음의 학인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과 씨름하고 지문이 닳도록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요즈음의 학인들. 그런 그들이 고심참담 속에 써 놓은 글을 누군가가 빼앗아가는 현실 앞에서, 같은 지식사회의 구성원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과연 무슨 말을 보탤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부의 핵심 구성원으로 발탁되고 있는 이 잘못 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연 누가 나서서 이런 모순과 역리(逆理)를 바로잡을 것인가.
                                                                       2008. 2. 23.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