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2. 5. 15:54
 

스페인 기행 4-3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의 감동


 메스키타로부터 100m쯤 떨어진 남쪽 거리의 유대인 거리를 걸었다. 서유럽의 어딜 가나 마찬가지이지만, 이 거리도 전체가 깔끔하고 단정했다. 비좁긴 하나 ‘꽃의 거리’는 겨울임에도 아름다웠다. 흰 벽의 양쪽 창틀에 놓인 화분들도 다가올 꽃의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똘레도에 있는 두 곳을 포함, 스페인 전역에 세 곳밖에 없다는 시나고그( Synagogue)가 이곳 꼬르도바에도 있었다. 그 시나고그와 ‘유대인 잔혹사 박물관’만 쓰디쓴 그 민족의 과거를 말해줄 뿐, 더 이상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부터 좀 더 걸어 강가로 나가니 꼬르도바의 수호자 라파엘 성인의 탑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강물에 반사되는 석양이 겨울의 쌀쌀한 정적을 깨고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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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유대인 꽃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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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의 수호자 라파엘 성인의 탑>

종교 간의 불화는 종족 간의 불화, 정치적 불화를 내포한 역사진행의 노폐물이다. 물론 ‘모씨드럴’이라는 특이한 문화적 산물로 남을 수는 있었지만, 그 부조화는 언젠가 조화의 이상적 경지로 상승되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Malaga)로 달려간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5. 15:42

 

스페인 기행 4-2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행의 감동


 정갈하고 유서 깊은 유대인 거리를 지나자 메스키타(Mezquita)[메스키타는 모스크를 지칭하는 스페인 말이다] 혹은 Cathedral-Mosque, 즉 ‘모스크 겸 성당’과 거대한 종탑이 나타났다. 술탄의 정원에 들어서니 무성하게 자란 대추야자 나무들이 우릴 반겼다. 대추야자는 그 옛날 모하멧이 살았던 곳에 흔히 자라던 나무였는데, 모스크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그런 대추야자 나무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 사원에서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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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입구>

 원래 무어인들의 모스크였던 건물을 기독교 왕조가 접수함에 따라 안쪽 중앙에 성당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요소요소 이슬람 왕조 시절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었던지, 대부분 모스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원래 이 건물은 780년 서고트 왕국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압둘 라흐만 1세가 세운 것이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 끝에 현재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메카 방향의 미흐라브(Mihrab)를 향해 좌우 대칭으로 지었어야 하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건물은 균형을 잃게 되었다. 대추야자 나무와 우물[모슬렘들이 기도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하던 연못의 흔적]이 있는 오렌지 정원과 모스크가 합쳐진 건축물이 바로 메스키타였다. 바로 이 건물의 중앙에 성당이 있었다. 기독교군이 이 건물을 접수한 다음 성직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시의 왕 카를 5세가 지은 것이다. 그러니 이 건물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우리는 잠깐 동안 난감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모씨드럴(Mothedral)’이란 조어(造語)를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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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정원의 대추야자나무와 오렌지 나무들>

 모씨드럴은 찬란했던 꼬르도바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이 성전은 24,000㎡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메디나(Medina)의 아사하라(Azahara)궁과 함께 이슬람 예술로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바탕 위에 기독교의 모습이 덧씌워져 묘한 조화와 부조화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원래 한 뿌리였던 이슬람과 기독교.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 뿐 아니라 발생의 바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민족적․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면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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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추야자나무의 모양을 본떠 만든 메스키타 내부의 열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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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내부 성당의 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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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키타 내부 성당에 진열된 성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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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키타 정원의 종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5. 15:27
 

스페인 기행 4-1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행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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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오렌지 나무들>

25일 오후. 알함브라궁의 아름다움을 찬탄해 마지않은 우리는 역사 진행의 우여곡절이 빚어낸 빛과 그림자를 가슴에 담고 그라나다를 떠났다. 대략 두 시간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 유서 깊은 문화와 역사 도시 꼬르도바. 그라나다는 지중해와 인접한 도시였으나, 꼬르도바는 대서양으로부터도 지중해로부터도 비슷하게 떨어져 있었다. 알트슈타트(Alt Stadt)의 성문 앞에는 네로 황제의 은사이자 스토아 학파에 속한 철학자 세네카(L. A. Seneca)의 동상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 꼬르도바가 범상치 않은 정신적 도시임을 보여주는 증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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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네카의 동상>

 도시를 관통하여 과달키비르(Guadalquivir)강이 흐르는 이곳은 안달루시아의 관문이었다. 도시 전체가 무어족, 유대족, 기독교파 등 세 문화권으로 나뉘어 공존하거나 각축을 벌이다가 1236년 페르디난드 3세의 기독교군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이슬람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교문화에 기독교 문화가 덧씌워지는 양상으로 이 도시의 문화적 색채는 고정되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2. 02:46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당시 술탄과 귀족들의 호화롭던 사생활을 훔쳐볼 수 있는 공간, 헤네랄리페였다. 14세기 초에 정비된 술탄의 여름 별궁이었다. 이 공간에서 가장 이채로운 곳은 아세키아(Acequia) 수로. 전체 길이 50m의 중앙 정원에 을 흐르게 하고 좌우에 많은 수의 분수를 설치한 곳이었다. 수로를 에워싸고 많은 꽃나무들과 정원수들이 무성하게 자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천국 아니냐고 했다는 당시 술탄과 귀족들의 말을 곱씹어 보며 정원을 산책하는 내 마음이 복잡했다. 이슬람과 가톨릭이 번갈아가며 지배하던 곳. 세월은 흘러도 그들이 누렸던 향락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역사의 저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곳. 오늘 나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안달루시아의 핵심인 알함브라에서 반복되는 인간사의 영욕을 체험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또 다른 역사를 찾으러 꼬르도바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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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