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9. 28. 03:29

일본의 질서, 우리의 질서

 

 

 

지난여름

며칠 간 교토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처에 널린 유물과 유적이 아니었다.

크든 작든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대로에서든 후미진 골목에서든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엄수한다는 사실,

길바닥에 꽁초 하나, 휴지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자전거들.

자전거를 통해 익히는 질서의식이 놀라웠다.

 

어둘 녘이면 주택가를 걸으며

고즈넉하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맛보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길을 걷다가 주택가에서 대로로 나오는 3~4m 폭의 자동차 통로를 만났고,

그곳에도 어김없이 건널목 표시와 신호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가는 자동차는 없었고, 마침 중학생 정도의 남자 아이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그는 망설임 없이 서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관찰해보니

회사원으로 보이는 중년 신사도, 할아버지도, 아주머니도

모두 신호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까짓것 두어 걸음이면 뛰어 건널만한 넓이에, 오가는 차도 없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 신호를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교토에 머무는 동안

이동 수단은 주로 택시였다.

모든 운전기사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정확한 매뉴얼대로 승객 응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택시 안은 철퍼덕 앉기가 미안할 정도로 청결했고,

신호나 법규를 위반하는 택시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사는 뒷좌석을 권했지만, 나는 주로 앞자리에 앉아 도로 위의 차들을 살폈다.

슬쩍 유리를 내리고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리는 운전자를,

아무데서나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를,

툭하면 욕설을 퍼붓는 운전자를,

잽싸게 앞차를 추월하는 운전자를,

횡단보도에서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는 운전자를,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튀어나가는 운전자를,

속도위반하는 운전자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젊은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마트에서 나왔다.

마트 밖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참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큰 아이는 다섯 살 정도, 작은 아이는 세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주차장으로 나온 세 사람 모두 노란색 헬멧을 쓰고 있었다.

엄마의 자전거 앞 바구니엔 세 살짜리 아이가 담기고,

작은 자전거를 탄 큰 아이는 엄마 자전거를 뒤따라

건널목을 건너는 것이었다.

신호 시간이 충분하기도 했지만,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 내빼는 자동차들은 아예 없었다.

모두들 다섯 살 어린애가 굴리는 페달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참여한 어린이 교육의 현장이었다.

 

얼마 전 어느 날 어스름 녘

차를 몰고 경주에 들어섰다.

어쩌면 교토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놀라웠다.

보문단지로 가는 길엔 차도 많지 않았다.

여름철 막바지의 석양이 비낀 고도(古都)가 아름다웠다.

, 우리도 이제 선진국으로 들어선 것일까?

그러나 착각도 잠시.

갑자기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하며 중앙선을 넘으며

내 차를 추월했다.

차도 없는데, 고지식하게 제한속력을 지키는 내 차가 너무 답답했으리라.

교차하는 차들이 없는 신호등 앞에서

불이 바뀌기만 기다리다가 깜빡 1~2초 출발이 늦었는데,

택시인지 자가용인지 !’하고 어김없이 경적을 울렸다.

도로에는 여기저기 꽁초와 휴지들도 굴렀다.

운전자들이 유리를 내리고 버린 것들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앞쪽 차량의 문이 열리더니

담배를 꼬나 문 손이 나오고, 꽁초와 담뱃재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혹시나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적지 않은 교육과 세뇌를 받았을

경주가 그럴진대,

나머지 지역들이야 불문가지 아닌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선진의 모습이 부럽고,

사실 늘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그들을 추월하는 것은

그들의 장점을 모두 배운 다음에야 가능할 것인데,

그렇게 되기까지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무겁고 슬프다.

 

 


교토 타워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교토 시내의 횡단보도

 

 

 


교토의 주택가 이면도로

 

 

 


교토의 큰 거리

 

 

 


경주 관광안내 지도

 

 

 


경주 신호등

 

 

Posted by kicho
자료 - 사진자료2007. 10. 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