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3. 16. 09:21

지혜롭지 못한 교육부



                                                                                                                                                                   백규

학교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남의 일만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그간 정권들 마다 ‘사회정화’나 ‘폭력배 근절’을 내세우며 소란을 피워왔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가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학교폭력’이란 근원을 애써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동안 학교는 사회폭력의 온상 역할을 충실히 해온 것이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학생이 자라 선생이 되며, 바늘도둑이 자라 소도둑 되는 법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비로소 폭력을 배우고 조직폭력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 학교야말로 모든 폭력의 종묘장(種苗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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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에 의하면, 최근 교육부는 학교폭력의 실태를 파악했다고 한다. 폭력조직인 ‘일진’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 학교가 전국적으로 643개교이고, 그 중 한 학교는 학생 전원이 자신들의 학교에서 일진이 활약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다. 작은 시골학교들만 빼놓고 전국 대부분의 학교들에 폭력배가 있으며, 그 숫자도 20만~40만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교육부는 힘들여 조사한 결과를 왜 발표하지 않는 걸까.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부작용이 우려되어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작용이란 무엇일까. ‘학교폭력이 심한 학교를 공개할 경우 그 학교에 사회적 비난이 집중되고, 가해·피해 학생들이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는데, 아마 교육부가 말한 부작용이란 이 점을 말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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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한 여름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서 갓 쓰고 타령하는 교육부의 모습’이 진정 가관이다. 얼핏 대단한 교육적 소신이나 철학인 듯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사경을 헤매는 암환자가 있다 하자. 환자를 살리려면 수술을 해야 한다. 암 덩어리를 도려내자면 아픔과 괴로움이 필수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환자나 의사는 그걸 감수해야 한다. 당장의 아픔이 무섭고 싫어서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대로 그냥 죽겠다’는 말 아닌가. 물론 교육부에서는 항변할 것이다. 드러내지 않고 자신들의 신중한 방법으로 개선해 보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껏 폭력배들이 학교교육을 망쳐 온 긴긴 세월, 실태파악조차 못한 교육부의 ‘직무유기’를 감안할 때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려니와, 교육을 두고 그간 반복해온 헛발질이 이번 일이라고 달라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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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된 말로 학교 폭력을 일소하는 데 ‘용빼는 재주’ 없다. 잠시는 아프고 괴로워도 공론의 장에 터놓고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국민들은 폭력배가 많은 학교에 당분간 자녀들을 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폭력학교로 낙인찍힌 학교들은 당분간 텅 비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에 속속들이 폭력의 뿌리를 뽑고 다시 태어난다면 오히려 학교는 더 좋아질 것이고, 국민들도 암 수술 후 완치된 환자를 대하듯 그런 학교에 더 큰 애정을 부어줄 것이다. 혹시 폭력배들이 많다고 조사된 학교의 학교장들이 교육부에 공개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더라도 교육부와 장관은 소신을 갖고 이번 기회에 학교폭력을 소탕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그동안 추락을 거듭해온 교육부의 위상 회복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부의 차후 행보를 예의주시하고자 한다.<201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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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5. 7. 13:08
 

교수들은 담론 생산의 주체로 거듭 나야 한다


                                                                                             조규익

제1회 숭실 인문학 포럼의 성공을 보면서 대학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고 그 핵심에 교수들이 있다.


해당 분야의 체계적인 지식과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교수들은 1차적으로 전공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전공의 협소한 분야에 갇혀 좀 더 넓은 세계나 현실을 보지 못할 때, 그 지식이나 창조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아탑 속의 존재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전공분야에 대한 탐구와 함께 세상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수들이 고도의 윤리의식과 해박한 전문가적 식견을 통해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현재의 교수집단은 다원화 된 현실 속에서 왜소한 지식인 군상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초라한 지식상(知識商)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눈초리는 차갑다. 그들로부터 아무런 비전도, 철학도, 노력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교수집단에 들어가고 나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나 보여주기 일쑤인 점은 더욱 한심한 노릇이다.


그러나 교수집단도 기회와 동기만 주어진다면, 사회의 정론(正論)을 생산하고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포럼은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최근 기독교에 대한 김용옥씨의 비판적 주장에 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반론이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우리 지식사회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기라성 같은 기독교 대학들이 포진하고 있음에도 어느 대학 하나 나서서 그의 문제적 논리에 반박을 가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공포’를 경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숭실 인문학 포럼을 통해 김용옥 논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줌으로써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올바른 판단의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은 당사자 김회권 교수를 포함 숭실의 인문학자들이 향후 적극적인 담론 생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제부터라도 대학교수들은 전공책의 행간에 현미경이나 들이대는 ‘골방의 샌님’ 신세를 청산하고 사회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전공을 살리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며 대학을 살리는 길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7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5월. 달력을 본다. ‘5월 15일’, 붉은 색이 선명하다. 아, 살았다! 선홍색 카네이션 한 송이 받아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스승의 은혜>를 들어야 하는 고문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건만, 놀랍게도 스승의 날만큼은 챙겨야 한다는 믿음(?)들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나마 스승의 날이라도 있어서 ‘선생 할 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대접 받아도 좋을 만큼 제대로 교육을 시킨다고 자부하는 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육의 현장에 있으면서 ‘스승 노릇’ 하기 쉽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없는’ 기자들은 고등학교에서 내신이 강화된다는 신문기사를 쓰면서, 극성스런 ‘치맛바람’이 걱정된다고, 없어도 그만일 사족을 꼭 끼워 넣는다. 치맛바람이란 무엇인가. 그 속엔 ‘제 자식에 대한 불합리한 편애의 강요’와 촌지문화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학기가 시작될 즈음이나 스승의 날 전후, 촌지의 지저분한 소식들이 언론매체들을 장식하기 시작하면 내 일이 아니면서도 곤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촌지 교사의 집을 급습하여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싸여있는 각종 명품들을 TV 화면에 비춰댈 땐 같은 선생으로서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첫 발령을 받은 시골 고등학교에서의 일이다. 말썽꾸러기 영수(가명)의 어머니가 찾아온 날이었다. 까맣게 탄 얼굴로 시종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나 또한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작별 인사차 밖으로 나간 내게 그 어머니는 계단 밑에 숨겨둔 콜라 두 병을 건네곤 도망치듯 내빼는 것이었다. 그 콜라는 유독 달고 맛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촌지’였다.
 
그러나 대학에는 학부모가 찾아 올 일도, 학부모를 부를 일도 없다. 그래서 촌지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대학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곤혹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교수들을 세워놓고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런데 부르는 학생들도 듣는 교수들도 참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물론 노래를 통해 당위나 이상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노래에 표현된 ‘스승’과 나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은 것은 왜일까?
 
오늘날의 대학이 ‘완성된 인간’을 기르는 수양의 공간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기능적 일꾼들’을 길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 시대의 대학교수들이 스승을 자처하기란 좀 계면쩍은 일일 수밖에 없다. ‘의식(衣食)이 족한 뒤에야 예절을 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더욱이 물질이 정신을 확실하게 지배한다고 믿는 요즈음, 정신적 양식만으로 현실적인 허기를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학이란 직업 양성소가 아니라고 제 아무리 ‘고담준론’을 펴 보아도, 현실을 외면할 도리는 없다. 스승의 날을 목전에 둔 지금, 4년간 기른 제자들이 학교 울타리 밖에서 할 일 없이 서성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대부분의 교수들은 ‘좌불안석’이다. 죄인이 따로 없다. 그러니 무슨 기분으로 <스승의 은혜>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요일인 5월 15일’이 고맙고도 고마울 뿐이다. <2005. 5. 9.>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