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13. 7. 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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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 2. 24. 17:18

 <1945년 김병화 농장의 김남견과 레 베라 드미트로브나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는 소인예술단(취주악단)>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 막달레나>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아 제법 부지런히 돌아다닌 몇 년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벨라루스 등 쉽게 갈 수 없는 나라들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들은 없다!’는 것이 오랜 방랑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빛바랜 사진 몇 장과 실실 부서지는 몇 권의 책자들에서나 그들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 온 고려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주 앉아 보아도 모습만 같을 뿐, ‘소통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엄혹했던 구소련 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절망에 갇힌 민족의 탈출구를 공산주의에서 찾고자 그 이념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조명희. 그를 추앙하여 문학에 빠져들었다가 22년 간 북극 유형 및 강제노동의 쓰라림과 후유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강태수. 그들은 원동으로부터 가축이나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의 황당한 집단체험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오직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속히 귀여운 아기들의
어머니가 되며
남편의 던지는 웃음에
두터운 정으로 대답하며
또 우리에게만 부족되지 않던
그 무엇으로 보태면서
무한히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죄인”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기를!
이곳은 모두다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줄 알어라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네철 내내 비가 내리겠는가.
사납던 징기스한의 무덤은
오늘도 나지지 않으며
로마에 불지르고도
“오, 나의 사랑하는 로마여!” 하고
웨치던 네로의 혼은
이날도 저주의 무쇠 탈 쓰고
아마 지옥에서 헤매리라
악은 백 년 후에도 발각되며
선은 민중의 부르는 노래에
오래오래 담겨진다.

-강태수 <마음 속에 넣어 두었던 글> 중에서


고려시인 강태수는 북극유형이란 마지막 길을 떠나며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이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뿐, 자신은 죄인이 아님을 절규한다.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사계절 내내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징기스칸 및 네로의 악행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인물은 징기스칸이나 네로가 결코 아니다. 그가 이들을 통해 암시하고 싶었던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이주와 북극 유형을 통해 젊음과 사랑을 잃은 그였다. 그러니 그에게 스탈린보다 더 극악한 군주는 없었을 터. ‘저주의 무쇠탈을 쓰고 지옥에서 헤매리라’는 그 저주의 대상은 네로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야 시인은 자신이 몸담아 온 공간, 그간 생존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이런 저주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조명희나 강태수만 그러했을까.
***
1세대 고려인 한 분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아간 키르기즈스탄. 비쉬켁 국제공항에 도착해 연락하니 그 분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중이었다. 이처럼 어딜 가도 1세대 고려인을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기껏 2~3세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말을 잃으니 우리 역사를 잃게 되고, 우리 역사를 잃으니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피차 민족적 동질감을 공유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도 그저 이민족을 만나듯 서로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3~4세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급속히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 밖에 흩어져 살며 정체성을 상실한 한민족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을 보며 2천년의 지독한 디아스포라를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강고한 모습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겨우 1~2세기의 디아스포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 된 컴퓨터 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는 말과 정신의 씨앗을 움틔우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뒤통수에 와 닿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면서 이들 나라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혹시 우리 모두의 기억을 되살려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한 의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단계에서 당장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수명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의 수명은 영원하다!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 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나라들 사이에 이념의 장벽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개인들은 이해관계의 장벽을 나날이 공고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의 물결은 민족주의를 능가할 정도다. 우리의 과제는 소아(小我)를 넘어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발판으로 바람직한 내일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획은 그런 소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고려인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했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것들 가운데 1차적으로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발간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강호 제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고대한다.

                               2012. 1.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이 글은 최근에 펴낸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있었네!>>의 머리말입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7. 12. 20:34
 

알마티 통신 1 : 알마티의 매연과 천산의 만년설


2009년 7월 11일. 알마티에서의 첫날. 어딜 가나 시내에는 푸른 숲이 가득 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수백 년의 연륜을 족히 드러내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보고 깨끗한 공기를 상상했으나, 시가지에 깔린 공기는 매연에 쩔어 있었다. 들숨 가득 탁한 공기가 폐부를 찔러댔다. 그나마 고개를 들 때마다 압도해오는 천산의 만년설 덕분에 숨 막히는 매연으로부터 겨우 놓여날 수 있었다. 뜨람바이를 타도, 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도, 모든 공간엔 여지없이 매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스팔트에서 튀어오르는 열기와 매연이 어우러져 채워진 욕조를 유영하듯 힘겹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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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도로와 멀리 보이는 천산의 만년설>

김병학 시인의 안내로 햇살에 달구어진 시내를 책 읽듯 훑어나갔다. 카자흐스탄 첫 방문, 알마티 첫 방문. 모든 것들이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다. 구소련의 문화적 동질성에 갇혀 있었건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게 신기했다. 걷는 동안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찾아 이곳 사람들의 경건한 신심을 확인했고, 시장을 찾아 삶의 박동도 느꼈다. 시내 한복판에 ‘푸른시장(질료녜 바자르)’이란 이름의 재래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81세의 고려인 서올랴 할머니를 만났다. 아직도 고운 자태를 잃지 않은 고려인 할망은 올망졸망 찬거리들과 각종 양념들을 늘어놓고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었다. ‘장사가 안 된다’고 혀를 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에 적이 안도가 되었다. 심심하던 차였는가 은근히 잡으려는 할망을 뒤로 하고 2․8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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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시 러시아 정교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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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제대 뒤의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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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질료녜 바자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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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료녜 바자르의 서올랴 할머니>

그곳엔 거대한 조형물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군인들이었다. 그 밑의 글자들이 걸작이었다. “위대한 러시아! 모스크바를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의 문구였다. 모스크바를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속뜻일 것이다. 그야말로 구소련의 살기 어린 구호였다. 그 옆쪽에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조형물들이 붙여져 있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용기 있게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영원한 영광 있으라!”는 구호가 보는 이의 내면을 압도해왔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선동의 구호와 문구들을 알마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전쟁기념관을 그득 채우고 있던 선동의 모티프가 이곳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토요일이기 때문일까.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았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들은 이곳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에 헌화하는 것이 관례란다. 하얀색 예복을 입은 신부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들이 들고 있는 백합 다발은 순결한 영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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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2-8 공원의 조형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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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전통악기 돈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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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악기 박물관의 악사 까를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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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앞뜰의 아름다운 신부>
 
러시아 정교회 안에도 결혼식을 마친 커플, 결혼식을 올릴 커플,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로 만원이었다. 밀려드는 인파를 피해 찾은 곳은 공원 한 켠의 악기 박물관. 그곳에서 카자흐스탄 민족의 음악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비파 비스름한 카자흐스탄 전통악기 돔브라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악기들을 본 다음 문을 나서려는데 우리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참하게 생긴 카자흐스탄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겠단다. 카자흐스탄 돈 200원을 투자하여 한동안 애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었다. 노래를 끝낸 그녀는 ‘까를라가쉬’라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제비’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피곤하지만, 카자흐스탄과의  의미있는 첫 만남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6. 25. 05:32


2009년 6월 25일. 타고난 반공주의자(?) 백규의 출현을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모스크바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6·25의 원흉 구소련은 러시아로 이름을 바꾼 채 목하(目下) 자본주의의 실험을 펼치고 있는 중인데, 백규 일행은 그 심장부 모스크바에서 과거를 발판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탐지하고자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

오전엔 전쟁기념관을 찾아 러시아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의 질곡들과 만났고, 오후에는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찾아 러시아 미술의 진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저녁에 ‘최후의 고려인’ 정상진 선생과 열망하던 만남을 갖게 되었다. 6·25날에 그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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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택에서 정상진 선생과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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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살고 있는 따님과 정선생, 그리고 사위>

모스크바 외곽의 울리쨔에 있는 그 분의 아파트로 찾아간 시각이 오후 5시쯤. 함께 살고 있는 사위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반색을 하며 맞아주시는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족, 이념, 문학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들이 그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고려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거울삼아 한민족 공동체가 꾸려나가야 할 미래였다.

***

북한의 문화선전성 차관을 지냈고, 6·25에 참전했던 그 분이 김일성으로부터 숙청을 당하여 소련으로 귀환한 뒤, 카자흐스탄 인으로 살아온 세월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몸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사실 그는 2세 고려인으로서 고려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1인으로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20여 년 간 수십 차례 한국을 왕래하며 한국의 지식인들과 교유해오고 있는 선생임에도 당신의 거처로 찾아온 한국의 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은 듯 했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본 사람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그 분의 말씀은 역으로 공산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이른바 ‘관념적·이상적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대들을 만난 오늘이 내 명절이야!’를 반복하시는 90 노구의 지식인으로부터 비로소 ‘탈이념의 민족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정수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고려 말을 하는 고려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고려 정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바로 지금부터 고민해야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꿈을 키우기 위해 북으로 왔다가 시련을 당한 많은 문인, 예술인들의 삶을 통해 그 체제가 갖고 있던 허위와 기만,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고발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무한한 자유와 민주의 즐거움을 부러워하며, 그것만큼은 소중하게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

선생은 2005년에 펴낸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를 통해 해방공간과 6·25, 대규모 숙청사건에 이르는 북한사회의 이면사를 보여준 바 있다. 선생은 조만간 그 책의 수정·보완판을 내고자 한다 했다. 매우 절제된 구술을 통해 이미 보여준 그 시절의 이면사에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많은 것일까. 아마 ‘덧붙임’ 자체도 극도의 절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정확하지 않은 말’은 모두 잘라버리는 선생의 결벽증으로 미루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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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소(老少) 간에 왕래하는 정담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슴을 훑어 내리는 보드카의 주향(酒香)만이 지성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백야(白夜)의 한밤이었다.

2009. 6. 25.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