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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2 새해 인사
  2. 2012.06.07 아, 한 율리아!
글 - 칼럼/단상2013. 1. 2. 14:08

  2013. 1.1. 새벽/숭실대 국문과 06학번 박형준 촬영 전송  2013. 1.1. 새벽/숭실대 국문과 06학번 박형준 촬영 전송  2013. 1. 1. 새벽/ 숭실대 국문과 06학번 박형준 촬영 전송  2013. 1. 1. 새벽/숭실대 국문과 06학번 박형준 촬영 전송  2013. 1. 1. 새벽/숭실대 국문과 06학번 박형준 촬영 전송  2013. 1. 1. 새벽/숭실대 국문과 06학번 박형준 촬영 전송                                        

 2009년 겨울/백규 촬영(양양 솔비치 해변)

 

 

 

새해인사

   

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동안 저와 인연을 맺어 온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가정이 평안하시길 빕니다. ‘뱀이 무성한 풀밭을 쑥 빠져 나가듯’ 바라시는 모든 일들을 순조롭게 이루시길 빕니다.

 

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지난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긴 뭣합니다만, 어렴풋하나마 앞으로의 삶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고, 참하고 ‘이쁜’ 며느리를 얻었으니, 나름대로 선전(善戰)한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안정적이라 평가 받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점도 국가를 위해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지난 해 연말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분야의 책을 낼 생각으로 노력해왔습니다만, 막판에 약간 주춤거리면서 금쪽같은 시간들을 허비하다가 그 계획은 무산되었고, 결국 올해로 이월하게 된 점은 무엇보다 후회스럽습니다. 쌓아놓은 벽돌이 빠지면서 담벼락이 무너지듯, 연구 스케줄의 한 부분이 무산되거나 연기될 경우 다른 부분들이 줄줄이 밀리게 되니, 복구에 많은 정력이 소비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요.

 

요즈음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표정에서 읽어내는 ‘좌절과 자신 없음’이 가장 아픈 부분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모인 강의실에서라면 ‘중구난방(衆口難防)’도 용인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니,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제 철학입니다. 전공 지식이 모자란다 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모범답안으로부터 좀 어긋난다 해서, 무슨 문제가 되나요? 그런데, 왜 그들은 입을 닫고 있는 걸까요? 흡사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일을 그르칠까봐 전전긍긍하듯이 말입니다. 교수의 눈을 피해 속닥속닥 ‘문자질’은 잘들도 하면서 교수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다른 대학의 교수들도 비슷한 말들을 하는 걸 보면, 그게 아마 지금 젊은 세대의 일반적인 모습 같기도 하군요. 젊은이들의 기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새해엔 우리네 삶이 더욱 팍팍해질 거라는 전망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캠퍼스 그득 들어찬 젊은 제자들의 가슴에 더 이상 좌절을 안겨주지 말아야 하는데, 큰 걱정입니다. 세계정세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외교 등의 분야를 보면, 세계가 편안해져야 우리도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새 대통령이 현 정부나 집권자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똑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 보기로 합니다.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난 지금까지의 경험들은 일단 잊기로 했습니다. 쓴 경험들이 이번에도 반복된다면, ‘역사의 전환’을 개인에게 기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금 확인하고 좌절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단호히 믿어 보겠습니다.

 

세밑에 홀연 우리 곁을 떠난 ‘신바람 전도사’ 황수관 선생의 부음을 접하면서, ‘삶의 덧없음’과 ‘살아 있음의 고마움’을 함께 느낍니다. 아마 그 분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건강의 이상을 겪고 계셨으리라 추측해봅니다. 그래서 평소 건강관리가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욕심을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습니다.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계사년 정초

 

백규 조규익 드림

 

 

*사진은 숭실대학의 멋진 제자 박형준 군(국문과 06학번)이 새해 첫날 새벽 설악산에 올라 찍어 보내준 ‘새해 첫 선물’입니다. 박형준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저 혼자 간직하기 미안하여 이곳에 올립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6. 7. 16:33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제공:김병학>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 백규 연구실에서>

 

율리아와의 만남

                                                                                                    백규

몇 년 간 중앙아시아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고려인 극작가 한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승을 뜬 지 올해로 19년째. 말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국립고려극장 문예부장을 지낸 그였다. 10여 편의 희곡작품, 19편의 단편소설,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등을 오롯이 모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김병학 시인이 정리했고, 내가 꾸려나가는 연구소에서 문예총서의 하나로 펴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인가. 책을 펴낸 지 얼마 후 국제한인문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연구’라는 테마의 국제학술회의에서 기조발제<관련 글 보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려극장에서 활약한 극작가를 중심으로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이미 한진의 작품들을 확보해 놓은 터에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병학 선생이 또 하나의 낭보를 보내왔다. 한양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에게 연락해 두었다는 것. 발표회장에서 그녀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자체가 멋진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텍스트를 읽었다. 작품을 읽는데, 모르는 사이에 간간 눈물이 흘렀다. 작품들의 행간에서 그의 외로움과 슬픔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갈등과 방황, 현실과의 밀고 당김을 통해 결국 민족을 발견하게 된 그의 집념이 감동적이었다.

한진은 누구인가. 북한의 극작가 한태천과 모친 박성수 사이에서 1931년 태어난 그는 천재였다. 역사와 전통의 광성중학을 2년만에 마치고 평양제일고급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8년 김일성 종합대학 노문학부에 입학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그의 지도교수이며 훗날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 정상진이었다. 정상진은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장(1948~1950)과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1952~1955)을 지낸, 당대 굴지의 재사였다. 정상진으로부터 문학원론과 세계문학을 배운 한진과 그의 친구 이진[이경진]은 당시 최고의 수재로 인정을 받던 북한의 꿈나무들이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면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전쟁에 참여했고, 1952년 여름 대학으로 돌아와 외국유학시험을 치르고 유학생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인 10월 모스크바 영화대학 시나리오 학과에 입학했다. 모스크바에 유학한 조선 최고의 수재들은 그들의 조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그곳의 분위기에 취하면서 비로소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때마침 흐루시쵸프가 등장하여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전쟁 후 김일성은 자신의 개인지배를 강화해 나갈 요량으로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을 속속 숙청하고 있었다. 마침 당시 연안파로 몰려 파직 당한 모스크바의 북한대사 이상조의 망명 소식은 소련의 심장부에서 자유의 맛을 본 지성인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고, 한진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몇 고비의 우여곡절을 거쳐  1958년 8월에 망명을 결행했고, 시베리아 바르나울시 TV 방송국 책임편집위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를 만나 결혼했다. 그 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옮긴 그는 영화사진연구소, 레닌기치 등을 거쳐 고려극장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설과 희곡창작을 지속한 것은 물론이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말년인 1993년 7월 13일 「서울손님」이란 희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는 잠들었다. [*이상 한진의 전기적인 사실은 김병학의 '한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한진전집>>(인터북스, 2011) 참조.]

소련 고려인 문단의 최고 비평가 정상진도 인정한 바 있지만, 그는 고려인 문단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작품 형상화의 수준에서 여타 작가들은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이처럼 소련의 고려인 문단을 통틀어 미학적 차원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만한 작가로 그가 유일하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진과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브노브나 사이에 안드레이와 드미트리가 태어났고, 율리아는 안드레이와 러시아 여인 마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한진의 손녀 율리아가 러시안의 외모를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북한 지식층의 자녀로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전쟁에서 우리를 적으로 삼아 총부리를 들었던 한진. 그러나 넓은 세상에 나와 이념의 허망함과 남녘 동포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을 체제 경쟁에서 남쪽의 승리를 입증하는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언제나 현실이 이상을 압도한다는 인간세상의 자명한 진리를 보여 준 생생한 사례로 보아야 하는가?

어쨌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이 걸어야 할 미래의 길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그의 손녀 율리아를 바라보며 흐뭇하고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의 행복한 ‘오버센스’인가? <2012. 6. 7.>

*사진 위는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 아래는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백규 연구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