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3. 9. 00:41


 성가족 성당의 감동으로 마음을 적신 다음 찾은 곳은 구엘 공원(Parc Güell)이었다. 산타 테레사 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에 공원은 위치해 있었다. 구엘공원의 컨셉은 전체적으로 동화 나라의 그것이었다. 100년 전 당시 에우세비 구엘(Eusebi Güell)은 영국풍의 조용한 전원도시를 만들려고 했단다. 친구인 가우디에게 15ha 넓이의 부지에 대한 설계를 의뢰했고, 가우디는 자신의 철학에 따라 중앙광장, 도로, 경비실, 관리사무실 등을 설계했다. 도시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도시는 원래 기존의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60세대가 살 만한 공동주택을 지으려던 계획 아래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산되면서 가우디는 겨우 두 채의 집만 지을 수 있었다.

 다양한 색상의 부서진 타일들을 활용하여 만든 벤치들이 중앙광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벤치에 앉으니 석양 너머로 바르셀로나의 시가지와 지중해가 보였다. 그 뿐 아니었다. 도마뱀 분수대, 당시 시장으로 쓰려고 했던 건물의 천정 등 환상적인 시설과 공간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가우디가 1906~1926년 사이 20년 동안 살았다는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었으며, 그곳에 놓인 가구나 침대 등은 모두 그가 디자인한 것들이었다.

 성가족성당과 구엘공원을 돌아보면서 나는 ‘원래 직선이란 없다’던 가우디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직선의 벽에 갇혀 답답하고 무미건조하게 살아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직선들이 만들어내는 기성관념의 틀 속에서 ‘점점 질식해가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직선이 만들어내는 이성은 곡선이 만들어내는 감성의 부드러움에 비해 얼마나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는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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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9. 00:34


 호텔로부터 달려온 버스가 어느 곳엔가에 서고, 길바닥에 내린 우리는 참으로 기묘한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길 건너에 아직도 건축 중인 기묘한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버섯 같기도 하고 옥수수자루 같기도 한 첨탑들의 우뚝우뚝한 모습이 경이로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glia), 즉 성가족 성당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명은 ‘속죄의 성가족 대성당(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glia)’이란다. 400년을 목표로 건축 중에 있으며 현재는 100년 남짓 지났을 뿐이니, 완공까지는 앞으로 300년을 더 필요로 할 것이다.

 1883년부터 시작하여 192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기까지 가우디는 40여 년 동안 성가족성당의 건축에 몰두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구리 세공사였다. 자연히 예술에 관한 감각은 타고난 셈이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그는 아르누보(Art-Nouvea)의 회원으로서 고딕양식을 자기 식으로 독특하게 해석하여 표현했다. 건축 활동을 통해 얼마간 부를 축적했으나, 아끼던 조카와 친구 구엘의 죽음 등으로 한동안 방황하다가 현세적 욕망의 허망함을 깨닫고 스스로 결단을 내린 그였다. 현실적 이해에 초연하게 된 그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만으로 성가족성당의 건축이라는 대역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생동안 그는 거지같은 차림으로 흡사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았다.

 스페인 내란을 겪으면서 스페인 국민들에게 견딜 수 없는 현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의 파괴였다. 성가족 성당의 원래 이름 ‘속죄의 성가족 대성당’은 바로 이러한 당대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였다. 성가족 성당에는 예수의 일생 가운데 ‘탄생-수난-영광’을 형상하는 세 개의 파사드(Facade)가 있는데, 가우디는 이 가운데 탄생 부분만 완성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수난이 완성되었고, 영광은 지금 준비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유럽 대부분 지역의 성당들이 마리아를 앳된 처녀의 모습으로 형상한 것과 달리 이곳 ‘성가족’의 성모는 ‘나이 든 여인’으로 그려져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목수 요셉의 자리에 목공일을 하는 청년예수가 앉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성당의 내부에 가우디가 고안한 숫자의 행렬(行列)이나 스케치는 남아 있으나, 제대로 된 설계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신에 대한 염원이나 깊은 신앙심이 설계도 자체라도 되는 것처럼 가우디는 혼신의 힘을 다 해 성당 건축의 역사(役事)를 밀고 나갔던 것이다.

 ***

 ‘성당이 미약한 인간의 존재에게 위압적인 건축물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럽의 성당들을 돌아보고 난 다음에 내린 내 결론이었다. 대부분의 성당들은 인간의 왜소함이나 불완전성을 전제로 신의 무한한 힘과 영광을 강조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성가족 성당은 달랐다. 자유 속의 절제나 인간과 함께 하는 신의 영광을 경쾌함과 즐거움으로 조화시키고자 한 데 이 건축물의 특징이 있었다. 더구나 이 건물의 건축비는 익명의 기부자와 방문객들의 헌금, 관광객들의 입장료 등으로 충당되고 있다 하니 그 얼마나 감동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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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6. 01:10

 발견의 기념비를 둘러 본 다음 지하도를 통해 건너 간 곳이 제로니무스 수도원. 동 마누엘 1세가 해양을 개척하여 대항해 시대를 연 선구자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502년 이곳에 세운 수도원이었다. 바스코다가마가 인도 항해를 마치고 벨렝 지구의 항구를 통해 들어온 직후였다. 수도원의 건축 양식은 고딕 후반기에 나타난 마누엘 스타일로서 대항해 시대의 풍부한 재화와 이역(異域) 문화의 수용 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표면, 특히 창문이나 난간 등에 자연 및 해양생활 모티프의 화려한 장식을 해 놓았는데, 동양적 양식이 두드러져 보였다. 남쪽 문으로 들어가니 성모 마리아 교회가 나왔다. 그곳에 동 마누엘 1세와 성 제로니모, 동 엔리께 등의 상들이 서 있고, 천장의 아름다운 장식이 볼 만 했다.

 ***

 벨렝 지구를 떠난 우리는 리베르다도 대로를 통하여 리스본의 중심부인 바이샤 지구로 이동했다. 에두아르두 7세 공원, 레스따우라도리스 광장, 로시우, 꼬메르씨우 광장 등을 돌아본 다음, 동부의 알파마 지구로 이동하여 성 조르지 성, 대성당 등을 둘러봄으로써 대항해 시대의 첨병 포르투갈 맛보기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여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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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로부터 제로니무스 수도원 1, 2, 성모마리아 교회의 본당과 제대, 성모마리아 교회 안의 성가족, 성모 마리아교회의 아름다운 천장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6. 06:05
 

스페인과의 첫 상봉, 돈키호테를 만나다


아침 8시 40분 인천공항을 출발, 암스테르담 국제공항에 도달한 것이 유럽시각으로 오후 12시 34분. 12시간의 먼 거리였다. 2시에 암스테르담을 떠나 4시 30분에 드디어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로부터 무려 15시간이나 걸린 장도였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지만 바람은 매섭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눈이 쌓이고 한파가 맵게 몰아쳤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항 주변의 마을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유럽을 돌면서 나를 주눅들게 했던 아름다운 건축들의 추억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드디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나라에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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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워지기 시작한 마드리드 시가지>
 
600만의 대도시 마드리드. 재작년 대비 35%나 감소할 만큼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지만, 그래도 마드리드는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아토차 역을 지나 프라도 미술관, 솔광장 등을 지나 사바티니 정원, 바일렌 거리를 지나 스페인 광장에 도달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산호세 교회 앞까지는 대략 1.3km에 달하는 그란비아(Gran Via), 말 그대로 ‘대로(大路)’가 펼쳐져 있었고, 이곳이 마드리드 구시가의 중심이었다.

 왕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원형지붕을 지닌 엄청난 자태의 산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이 좌정하고 있었다. 바일렌 거리와 만나는 마요르 거리(Calle Mayor)를 따라가니 마드리드 시청사, 시장 관사 등으로 빽빽이 둘러싸인 광장이 나왔다. ‘마요르’란 시장(市長)을 뜻하는 ‘메이요(mayor)'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톨레도 거리와 마요르 거리가 만나는 곳의 남동쪽에는 마요르 광장이 있었다. 마요르 광장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솔광장이 다시 나왔다. 솔광장으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니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가 등장했다. 국회의사당과 이코 미술관 등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 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거쳐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니 다시 그란비아와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시벨레스 광장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을 한 바퀴 돈 셈이었다.

 그러나 어둑발이 들 무렵, 그란비아가 시작되는 곳의 스페인 광장은 처음 만나는 마드리드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공간이었다. 형형한 눈빛의 돈키호테가 장창을 꼬나든 채로 날아오를 듯 기세가 등등했다. 옆엔 나귀를 탄 산초 판사가 그 반대쪽엔 연인 둘시네아가 돈키호테를 옹위한 채로 서 있었고, 돈키호테의 뒤로 세르반테스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앉아 있었다.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는 이 기념비는 스페인 빌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마드리드 타워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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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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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 앞의 플라타너스 길과 노인들>

어릴 적 만난 돈키호테는 촌놈인 내게 스페인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적이 있었다. 소에게 풀을 뜯기러 찾아간 바닷가 백사장의 햇살 따가운 모래밭에 누워서 누군가가 번역한 <<동키호테>>를 읽었다. 책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어도 읽어도 다함없는 재미가 샘솟았다. 오늘 그 스페인에 온 것이다. 3년 반 전 자동차로 유럽을 돌다가 그만 ‘초읽기’에 몰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스페인이다. ‘말꼬리에 붙어 천리 간다는 파리’처럼 나도 수준 높은 일행의 꽁무니에 슬그머니 붙어 만리 장도 스페인을 밟았으니, 열 두어 살 시절 촌놈의 꿈을 지금서야 이루는 셈이다.

 오늘 밤엔 꿈이나 거창하게 꾸어볼 일이다. 스페인이여, 부디 내 품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