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4. 05:43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Richard Cacini)  

 

 

 

지난 달 우리는 66번 도로와 그 주변 도시들을 탐사하던 중 유콘 시티(Yukon City)에 들르게 되었고, 거기서 우연히 유콘 퇴역군인 박물관[Yukon Veterans Museum]’을 만났다. 당시 개관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은 뮤지엄이었는데, 큐레이터가 바로 리차드 카치니(Richard Cacini)였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카치니(James Cacini)625 참전용사로서, 전쟁과 관련된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사령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고 있는 제임스 카치니(가운데)


미국 육군 3대(오른쪽부터 할아버지 제임스 카치니 대위, 리차드 카치니 소령, 로버트 카치니 일병)


현재의 리처드 카치니

 

그가 사망한 뒤 아들인 리처드 카치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들을 이 뮤지엄에 기증했고, 그 유물들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섹션이 성립된 것이었다. 그 가운데 귀한 사진들을 발견한 우리는 이미 이곳에 발표한 미국통신 26: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를 통해 소개했고, 뮤지엄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느낌을 적은 바 있다 

 

그런데 오늘, 연구실에 들어와 보니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해 있는데, 봉투를 뜯어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린 지역신문 한 부분이 들어 있었다.

 


리처드 카치니가 보내준 편지봉투 

 
Yukon Review(2013. 11. 27)

 

 

이 기사를 대강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베테란스 뮤지엄, 특별한 손님 맞아

-한국으로부터 온 조 박사 부부가 한국전쟁의 유물을 관람하다-

 

한국의 조 박사 부부가 113일 오우크 가() 601번지[601 Oak.]에 있는 유콘 베테란스 뮤지엄의 한국전 관련 유물들을 살펴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조 박사와 그의 부인은 바로 몇 달 전에 개관한 뮤지엄에 전시된 많은 유물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조 박사는 잠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는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그는 오클라호마 시의 소식지를 통해 유콘의 베테란스 뮤지엄에 관하여 듣게 되어, 이곳을 방문하고자 한 것이다. 조 박사가 이곳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전쟁 기간과 그 후에 자신의 나라를 도와 준 데 대하여 이 지역 주민들과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미국인들이 우리를 구해주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뮤지엄의 모든 섹션들을 둘러보던 중 한국전 섹션에서 발길을 멈추었고, 오랫동안 그 자료들을 살폈다. 조 박사는 거기서 한국전 참전용사 고() 제임스 카치니(James Cacini) 대위가 기증한 사진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그가 차에 싣고 다니는 컴퓨터와 몇몇 기계장치를 통해 복제했다. “그는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하여 아주 고마워했고, 우리가 하고 있고 해 온 모든 일들에 대하여 거듭거듭 눈물겹도록 고마워했어요.” 라고 유콘 베테란스 박물관의 큐레이터 릭 카치니(Rick Cacini) 씨는 말했다. 주빈이자 큐레이터로서 카치니 예비역 중령은 뮤지엄과 그 안의 모든 부분들에 관하여 설명했다. 유콘 베테란스 뮤지엄 방문 계획을 갖고 있을 경우, 카치니 씨에게 전화[350-7231]하면 된다.

 

  ***

 

당시 우리는 여러 명의 베테란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인 리처드 카치니는 특별한 존재였다. 625 발발의 원인이나 결말, 그로부터 시작된 우리 현대사의 질곡들은 학계에서도 아직 연구 중이다. 물론 학술적 차원을 떠나 625에 대하여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고, 625와 관련된 미국의 책임을 들어 반미의 근거로 삼는 이들도 많다.

 


유콘 퇴역군인 박물관[Yukon Veterans Museum]의 한국 섹션

 

세계사의 진행과정에서 모든 사건들의 원인은 대부분 다원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느 일방에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비록 일각의 실수와 판단착오로 전쟁이 일어났다 해도, 그 전쟁에 이기기 위해 UN의 깃발을 든 16개국이 자식들을 전장(戰場)에 보내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가운데 36,516명 전사, 92,134명 부상, 8,176명 실종, 7,245명 포로 등 미군 희생자 수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을 포함한 140여 명에 달하는 장군의 아들들도 최전선에 참전하여 35명이나 희생되었으니, 625 참전의 근본 의도가 어디에 있었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일치단결한 힘으로 한국을 살려낸 것은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역사적 쾌거임에 틀림없다.

 

미국에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부조(父祖)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625 참전용사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그런 부조를 둔 자녀들은 대부분 친한(親韓) 인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의 뇌리 속엔 아직도 한국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궁핍한 나라로 각인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외국 땅 어디에선가 우리에게 응원을 보내는 존재들이 바로 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동적인가.

 

정치적이념적 입장이 무엇이건 간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파견하여 죽음으로 우리를 지켜 준 점에 대하여 고마워해야 한다. 미국 땅에서 베테란들, 특히 한국전 참전용사나 그 후손들을 만날 때마다 누구든 스스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최대한의 예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가 나서서 참전용사들을 우대하고, 묻혀 있는 공로자들을 발굴선양하는 일이야말로 상무정신(尙武精神)을 드높여 궁극적으로 국방을 든든히 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곳곳에 베테란스 센터나 뮤지엄들을 지어 이들의 공적을 선양하고 교육의 자료로 활용하는 미국을 보며, 완벽한 국방이란 무기의 좋고 나쁨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유콘 퇴역군인 박물관[Yukon Veterans Museum]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

 

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11. 12:52

 

66번 도로[Route 66]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Yukon City)

 

 

 

 


66번 도로 가의 Arcadia Round Bahn에 전시 중인 66번 도로 표지판

 

 

우리가 유콘을 찾은 것은 112()이었다. 사실은 66번 루트에서 비교적 유명한 오클라호마시티 남쪽 엘크(Elk) 시의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National Route 66 & Museum)’, ‘옛 마을 박물관 단지(Old Town Museum Complex)’, ‘농업 및 목축업 박물관(Farm and Ranch Museum)’ 등 세 박물관들을 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선 길이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 들어오니 시곗바늘은 이미 11시 반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지는 스틸워터로부터 달려 온 만큼의 시간을 그로부터 더 달려야 하는, 100마일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도착하면 오후 2시쯤 될 것이고, 점심을 먹고 나면 3시쯤 될 것 아닌가. 난처했다. 박물관 하나를 겨우 보고나서 다시 되돌아 와야 하고, 되돌아오는 길 또한 300마일쯤이나 될 것이니, 오밤중이나 넘어서야 집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끔찍하게 드넓은 미국 땅. 그 중에서도 끝없이 펼쳐진 벌판의 왕국 오클라호마를 얕본 우리의 실책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출발했어도 쉽지 않을 거리였는데, 느직이 일어나 아침을 다 챙겨먹고 나선 길이니 여유롭게 돌아보고 오기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하이웨이의 출구를 빠져나와 주유소와 푸드마트, 구멍가게 등을 겸한 휴게소에 들렀는데, 마침 66번 도로가 그 휴게소 옆을 지나고 있었다. ‘작전 상 후퇴아닌 시간 상 노정 변경이었다. 마트에 들른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으니, 하나같이 유콘시티를 추천했다. 그래, 오늘은 유콘을 탐사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66번 길가에 묻혀 있던 유콘을 찾아낸 것이다.

 

***

 

시내에 들어서자 저 멀리 도시 입구 쪽의 메인 스트릿 양 옆에 원통형의 거대한 건물들이 서 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듯 그 건물들의 위압적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다가가 보니 두 건물 모두 제분공장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 사이를 지나는 철길도 녹이 슬어 있어 이 제분공장에서 밀가루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알만한 단서는 아무데도 없었다. 퇴락한 옛날의 영화들이 건물 벽의 각종 글씨들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제분공장들이라면 아마 이 근동 사람들이나 먹여 살리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차에 실려와 조달된 밀을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그 기차로 다른 지역에 실어다 팔기도 했을 것이다.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리의 1차 관심처인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을 찾기로 했다.

 


유콘 제분소[Yukon Mill]-"유콘의 최고 밀가루"란 문구가 눈에 띈다


맞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제분소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그러나 작은 도시의 메인 스트릿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박물관을 찾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책자에 소개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규정상 미리 예약을 해야 볼 수 있으나, 오늘은 그냥 보여주겠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가니 80대로 보이는 깨끗한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캐롤(Carol Knuppel). 이른바 자원봉사 큐레이터였다. 건강은 좀 안 좋아 보였으나 맑고 지성적이며 자신들의 향토 역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유콘 역사박물관의 큐레이터 캐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캐롤과 백규 

 


생활사 관련 소장품을 설명하고 있는 캐롤


캐롤과 전직 소방관인 남편, 그리고 백규

 

폐교된 초등학교를 1 달라에 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개관한 박물관이었다.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온 밀가루 공장 유콘 밀(Yukon Mill)을 중심 컨셉으로 박물관의 콜렉션은 이루어져 있었다. 캐나디언 카운티(Canadian County)에 속한 유콘은 1891년 스펜서(A. N. Spencer)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클라호마시 인접 도시로 존속되어 왔다. 캐나다 카운티의 유콘 구역에서 있었던 골드러쉬(gold rush)를 바탕으로 명명된 유콘 시티가 지금은 오클라호마시티 직장인들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 지역 농업의 중심지로서 대규모 제분작업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그런 역사적 바탕 위에서 비로소 우리는 Yukon Mill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콘의 시민들은 Yukon Mill에 대단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다는 말로 큐레이터 캐롤의 설명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체코인들의 자본으로 세워진 것이 이 제분소들이었다. 1891년 이 도시가 세워지고 철도까지 부설되자 이 도시는 급속히 번성하게 되었다. 1898년에 이르자 이 도시는 체코 이민자들의 보금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유콘은 '오클라호마의 체코 수도'로 알려질 정도였다.

 


박물관에 통째로 기증된 이발소


박물관 행사를 후원한 지역의 기업들


박물관 소장 사무용품


통째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치과의원


유콘시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 놓은 자료들


통째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잡화상 콜렉션

  

1893년에는 소규모 제분공장인 유콘 제분 곡물 회사[Yukon Milling and Grain Company]가 사업을 시작하여 급속히 성장했고, 1915년에는 해외로 곡물을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그 첫 제분소는 없어진지 오래지만, 대형 곡물창고는 지금도 66번 도로와 철로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지금도 건물 북쪽의 외벽에는 유콘 제분소[Ykon Mills]”, “유콘 최고의 밀가루[Yukon’s Best Flour]” 등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동쪽에는 유콘 최고의 밀가루[Yukon’s Best Flour]/미국 최고급 근대 제분소[No finer or more modern mills in America]/유콘 제분 곡물 회사-유콘 오케이/유콘은 오클라호마의 체코 수도[Yukon Czech Capital of Oklahoma]” 등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정부는 이 회사로부터 많은 밀가루를 사다가 굶주린 동맹국들을 도왔다는데, 그 덕에 이 회사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콘밀 관련 자료들과 설립자들


유콘밀 관련 자료들

 

유콘 제분소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산업과 경제 관련 생활사 콜렉션들을 설명한 다음, 캐롤은 우리를 1층으로 인도하여 이 학교를 거쳐 간 졸업생들과 교사들의 사진이 가득한 방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물론 각종 교과서, 학용품, 학교 비품, 생활기록부 등 학교와 학생들에 관한 생생한 자료들이 방 안에 그득하였다. 일종의 살아있는 아카이브(archive)였다.

 


학교 졸업생 관련 자료들


학교 졸업생 관련 자료들


1959년 교사들 사진

 

***

 

박물관은 작았지만, 그곳의 콜렉션들은 1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이 도시의 삶을 보여주는 스토리의 원천이었다. 설명을 들으며 폐교를 비싼 값에 매각, 처분하는 우리나라가 문득 생각났고, 무사려한 처사가 나를 많이 안타깝게 했다. 이곳에서는 폐교를 단 1달라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넘기고, 그 공간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쓰도록 도와주고 있다 한다. 이미 썩어버렸거나 엿장수들의 손에 엿 값으로 넘어가 지금은 모조리 사라진 우리 고향의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보관, 전시할 지역 박물관을 폐교에 만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비까번쩍한건물로 우리의 외면을 치장한들 무엇 하랴. 역사와 스토리가 빠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의 육체나 마찬가지! 그런데 이들은 폐교를 활용하여 자신들이 스스로 모은 생활사 자료들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이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원봉사 큐레이터 역할을 함으로써 선대로부터 이어온 삶의 모습과 문화를 계승, 보존하며 후대로 이어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철저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66번 도로의 역사성과 유콘 시티에 대한 부러움을 함께 느끼며, 우리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입구 쪽 코너에 세워놓은 박물관 간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5. 11:47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오클라호마를 관통하는 옛 길 하나가 있다. 이른바 66번 도로[Route 66]. 이 길의 역사성이나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거론하기로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 길에 주목해왔다. 토요일인 어제도 우리는 차를 몰고 이 길의 탐사에 나섰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외견상 약간 퇴색되긴 했지만 아름다운 도시 유콘시티(Yukon City)를 만났다.[유콘 시티에 관한 글은 다음 기회에 싣는다] 이 도시의 유콘 퇴역군인 박물관[Yukon Veterans Museum]’에서 우리는 코끝이 찡해오는 슬픔과 가슴 멍한 감동을 만나게 되었다.

 


유콘시 역사박물관[이 박물관의 3층에 퇴역 군인 박물관이 있음]

 

***

 

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을 찾지 못해 안내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는 여성이 찾아오는 길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Yukon Historical Museum에 대한 글은 미국통신 27로 싣는다] 이 박물관의 맑고 품위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 캐롤[Carol Knuppel]의 안내로 소중한 생활사 컬렉션을 두루 살펴 본 다음, 같은 건물 3층에 마련된 퇴역군인 박물관을 우연히 찾게 되었고, 거기서 일을 보고 있던 톰[Mr. Tom Thomas]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박물관 안을 둘러보다가 우리는 색깔은 바랬으나, 낯설지 않은 몇 장의 사진을 목격하게 되었다.

 


유물을 들어 보이고 있는 톰 씨


한국전 코너 표지판

 

, 그것은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우리네 누이와 아주머니의 힘겨운 모습이었다. 칭얼대는 동생을 광목 포대기로 감아 업고 배고픔을 달래던 우리 누이, 전쟁 통에 죽었거나 끌려가 부재중인 남편 대신 산에서 땔감을 산더미처럼 지고 오던 이웃 아주머니, 비누도 제대로 없던 시절 냇가에서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던 동네 아주머니들, 덜컹대던 버스, 동산만큼 무거운 짐을 실은 리어카를 활기차게 끌고 가는 어떤 장년 남자, 자신의 사진을 찍는 사람의 동작을 흉내내는 듯한 코흘리개 남자아이, 서울 수복의 감격이 짙게 배어 있는 서울시청, 그 때까지만 해도 웅장한 자태로 서 있던 동대문 등등. 그런데 이 사진들을 과연 누가 찍었을까. 사연을 알아보니 유콘에 살던 퇴역군인의 아들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이란다. 원판 화질이 안 좋았으나 우리로서는 그 사진들을 우리의 카메라로 다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누구 혹시 이 아줌마를 아시나요?


누구 혹시 이 아줌마를 아시나요?


서울시내 어딘가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남자


1954년 당시 서울시청


누구 혹시 이 아이를 아시나요?


1954년도 서울시내 한 곳 


1954년도 서울시내 한 곳의 한옥


1954년 당시 버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이 혹시 사라질세라 카메라를 소중하게 부여안고 다른 노정들의 방문은 생략한 채 2시간 가까운 거리를 달려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여 컴퓨터 화면에 띄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진들 모두의 화질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톰에게 전화를 하자 다음날[일요일, 즉 오늘] 12시에 사진 기증자가 이곳에 오니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Yukon Veteran's Museum을 다시 찾았고, 거기서 이 사진을 찍은 퇴역군인의 신원을 알게 되었으며, 기증자의 아들인 Mr. Richard Cacini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역시 미 육군에서 30여년을 근무한 군인이었고 그의 아들 또한 군인이었으므로, 이탈리아계 이민인 카치니 가문은 3대가 군에서 복무한 모범적 사례였다. 우리는 어제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카메라와 스마트 폰으로 사진들을 다시 찍고, 휴대용 스캐너로 일일이 스캔하여 별도의 파일로 보관하기도 했다. 리차드 씨의 흔쾌한 협조로 열 장이 넘는 사진들을 송두리째 우리의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Mr. Rick Cacini


Mr. Rick Cacimi와 처음 만나서


Mr. Rick Cacini, 백규, 그리고 Mr. B Mac[미 해병 출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낸 감사의 편지


퇴역군인의 날 행사 포스터

 

 

미 육군의 하사관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던 카치니는 각각의 사진들 뒷면에 장소와 연도를 표기했는데, 연도가 모두 1954년인 점으로 미루어 전쟁 직후의 우리 땅[의정부, 서울]에서 찍은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눈시울을 촉촉하게 한 것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따스한 시선으로 어려운 시절의 우리 모습을 잘도 잡아냈다는 점이었다. 의정부에서 찍었다는 나뭇짐 지고 가는 여인사진 뒷면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당신이 혹사당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 여인은 200~400파운드 무게의 짐을 져 나르고 있다. 그녀가 내려놓았을 때 나는 그 지게를 들 수조차 없었다.[Don’t tell me you are overworked! This lady is carrying between 200 and 400 pounds. I could not even lift the ‘A-Frame’ when she put it down.]”

 

그는 산더미 같은 나뭇짐을 지고 가던 가냘픈 여인을 만났고, 삶의 무게가 그의 마음에 감동과 동정의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어쩌면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한국인이 당하고 있던 현실적 고통을 큰 소리로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동생을 업고 있던 작은 소녀의 사진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이 작은 소녀는 겨우 여섯 살인데 몇 달 동안 애보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거의 모든 어린이들은 등에 아기들을 끈으로 묶어 업고 다닌다.[The little girl is six and has been a ”baby sitter“ for many month. Nearly every youngster has another strapped on his back]”

 

여섯 살 난 여자애가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에 사진사의 시선이 꽂히는 순간이다. 한 집에 일곱 여덟씩의 아이들이 북적대던 우리 어린 시절, 젖먹이 아이들을 업어 키우는 일이야 당연히 형이나 누나들의 몫이 아니었던가. 그런 일을 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의 앵글이나 초점과 메모의 내용을 결부시키면, 사진사의 단순한 호기심보다 따스한 동정과 연민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

 

이 소녀와 아줌마는 지금쯤 이 땅을 떠났거나 고령의 여인으로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쩜 지금까지도 어떤 미군이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던 그 시절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인연으로 우리는 이 먼 미국 땅에서 사진으로나마 그들을 만나게 되었을까. 누군들 알았겠는가. 다른 지역에 비해 한국인들이 적은 오클라호마의 잊혀져가고 있는 소도시 박물관에서 사진으로 만나는 우리의 어제가 이토록 내 유년기의 상처를 건드릴 줄을. 1111일 이곳 박물관에서 열리는 퇴역군인의 날[Veteran’s Day]에 우리는 초대를 받았다. 반드시 그들을 만나서 지금의 우리는 기적처럼 일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음을 알려주리라. 그들의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625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심어주리라.

 

***

 

다시 한 번 여쭙건대, 어딘가에 살아 있을 이 소녀와 아줌마를 누구 혹시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