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08.30 12:01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학자란 누구인가. 넓은 의미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좁은 의미로 대학교나 연구소 등 연구기관에서 전문적으로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다. 학문을 연구하거나 다룬 결과는 논문이나 책으로 나오기 마련이니, 교수나 학자는 논문 쓰는 사람, 혹은 논문으로 말하는사람이다. 그래서 학자가 제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생각이 기발해도 그것이 논문으로 엮여져 나오지 않으면 그냥 달변가 혹은 재주꾼일 뿐이다.

 

공부도 잘하고 말까지 잘하는 재주꾼을 최고로 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동양 사회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경원(敬遠)해 온 역사는 길다. 특히 학자들의 말이 뻔지르르하면 일단 의심을 하고 보는 것이 전통사회의 통념이었다. 오죽하면 공자는 말에 있어서 더듬거리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고자 하는 것이 군자(欲訥於言而敏於行/󰡔논어(論語)󰡕 「이인(里仁))’라고 했을까.

 

옛날의 군자는 완성된 도덕을 갖춘 인격자로서 남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 그래서 전통사회의 학자를 겸한 인간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말을 더듬어야 했을까. 자신의 내뱉는 말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지, 누가 보아도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을지 아무도 자신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누군들 자신의 말을 100%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군자란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수십 수백 번을 되씹어 보고 숙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막상 말을 내뱉는 순간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내 말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거침없이 나가야 하는 말 줄기를 이 두 가지 물음이 막아서면 더듬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심사숙고하라는 것이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학자의 자세다.

 

그러나 지금은 말() 잘하는 학자들이 너무나 많다. 매스 미디어가 지배하는 이 시대엔 말 잘하는 것이 모든 조건들을 압도한다. 방송에 나와 사자후를 토하는 학자들치고 제대로 된 논문이나 저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들 한다. 언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다져 논문이나 저서로 만들어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내뱉는 말들이라면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쳤을 리 없을 터. 당장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그들의 찬탄을 이끌어내기에 급급할 것이니, 언제 책상머리에 앉아 자신의 가설을 논증하고 강호 현인들의 생각을 참고할 겨를이 있단 말인가. 대중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변가들 가운데 의외로 좋은 학자가 드물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학자 노릇을 하기란 어렵다. 선현들이 남긴 생각을 토대로 자신의 뜻을 세우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저 앞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그런대로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전술(傳述)할 뿐 짓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정말로 그가 술이부작으로만 일관했을까. 사실은 앎에 대한 겸양의 태도를 강조한 말이었을 것이다. 학자는 도덕가를 겸해야 한다는 차원 높은 인식의 노출로 보는 것이 옳다. 공자가 극구 사양한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는 창조자의 타이틀. 외람하다 보았기 때문이리라. 외람하지만 않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공자가 얼마나 창조적인 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술이부작속에는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인간을 다잡는 의미가 들어 있을 뿐, ‘새로운 것을 고안하거나 만들어내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

 

한여름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쓸데없이 서론이 길어졌다.

내 본업은 교수다. 교수는 당연히 학자이고, 학자가 대부분 교수인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그래서 교수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겸하는 존재다. 대학원 시절, 존경하던 은사들은 늘 좋은 논문 많이 쓰라고 말씀하셨고, 당신들께서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 상당 기간 대가들의 곁을 배회하며 논문 쓰는 일의 중요함을 마음에 새겨온 나다. 언제나 되어야 저 분들처럼 멋진 논문들을 맘껏 써서 후학들을 위해 지남(指南)할 것인가. 뜻은 높되 손과 아이디어가 따라주지 않아, 일종의 비원이 마음속에 똬리처럼 들어앉게 된 내 '학자로서의 한평생'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스물일곱 여덟에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못했다. 초년 시절 내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진짜로 쓰지 않고 못 배기는 테마나 문제의식 혹은 가설 하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나날이 꽤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공부가 설어서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깨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처방을 얻지 못한 채 이날까지 삽질을 하며학자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밤늦도록 연구실에서 고민하며 책장을 넘기고, 휴일을 잊은 적도 적지 않았지만, 내 곳간은 늘 적막하다. 지금도 물색 모르는 고향 친구들은 교수는 그저 놀고먹으며 땡하는 직업 아니야?’ 라고들 놀리기 일쑤다. 수시로 전해오는 친구들의 번개 자리에 불참하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적막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끙끙대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눈총을 줄 때마다 빙그레 웃음으로나 화답할 뿐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한가로워진다.

 

여섯 평 연구실에서의 삼십여 성상(星霜)! 엊그제 존경하는 소재영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게 늘 사표(師表)가 되어주신 학자의 표본. 문득 생각해보니 그 분이 지금의 내 나이셨을 때 나는 40을 바라보는 애송이였다. 당시 그 분은 참으로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였다. ‘나도 저 연세,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멍청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나이만큼은 어느덧 그 고개에 올라서고 말았다. 논문 쓰는 일도, 강의도, 세상사도 모두 달관의 경지에서 유유자적 해결하시던 내 나이 때의 선생님이셨는데. 지금의 나는 어찌 그 경지를 상상도 못한단 말인가. 늘 뇌리를 훑고 지나는 아이디어나 가설을 잡아 매어놓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손에 잡히는 결론은 늘 텅 빈 괄호( )’ 뿐이다!

 

누가 있어 무엇이 중헌디?’라고 물으면, 정말로 할 말이 없다.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논문들을 써 보았지만, 결론이 하나같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면, 그간 줄창 헛공부만 해왔다는 말이다. ‘교수니까 논문을 쓴다는 구조화된 아비투스(habitus) 속에서 가치 있게 살아야 했던 삶을 내 스스로 몰각(沒却)해온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교단생활을 쓸쓸하게 마무리하지 않으려는습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논문의 화두(話頭)를 꼭 틀어쥐고 의자를 당겨 앉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인문학이 밥을 해결해주지 않는 시대에 (고맙게도) 우리를 찾아준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펴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가련하고 처량한가.

한 주에 단 하루, 육체의 괴로움을 통해 내 실존을 아프게 자각하는 에코팜의 은혜로운 시간이라도 없었다면, 허물어져가는 내 자존심의 성벽을 무슨 용기로 대면할 수 있을까.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와 함께 귀를 찢는 노() 선승(禪僧)의 할()이 텅 빈 내 마음을 울린 뒤 메아리가 되어 여섯 평 연구실을 휘감다가 사라지곤 한다. 깨달음은 내게 미래의 시간을 부여할 것인가. 갈가리 찢긴 논문들을 주섬주섬 이어 붙이면 천사의 날개옷으로 부활할 것인가. 그 옷 걸치고 구만리장천을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졸우(拙愚)-우공 이일권 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02.20 04:11

갑오년 그믐날 밤의 단상: 이완구 총리를 보며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한 게 인생사다.

많은 관계들이 얽혀 여러 의미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 한 두 가지 개념의 공약수로 수렴되는 것이 세상사다욕망과 허무는 내 경험으로 파악한 인간사의 두 공약수다. 위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서지지 않는 성채(城砦)가 어디 있으랴! 잘 되었든 못 되었든 욕망으로부터 기획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만사이며, 성서의 말씀대로 창대해지지 못한 채그 끝은 허무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 세상사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 큰 바위 얼굴이 있다. 어머니로부터 앞 산의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이 생긴 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을 전해 듣고 이 이야기를 철썩 같이 믿으며 그를 기다려 온 어니스트(Ernest). 부자장군정치가시인 등이 거쳐 갔지만, 그 중에 큰 바위 얼굴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지독히 평범한 촌부 어니스트는 자애와 진실사랑을 설파하는 설교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큰 바위 얼굴을 발견하지만, 어니스트는 여전히 위대한 인물을 기다린다는 것이 작품의 요지다.

 

이 늦은 밤, 사람들의 이목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바닥에 내팽개친 이완구란 인물을 생각해 본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를 난국 구제의 해결사쯤으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누구도 수완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금의 문제적 상황을 그만은 어느 정도 해소해 내리라 보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며 흠결이 나타나다 못해 급기야 '조무래기 기자들' 몇을 앉혀놓고 힘자랑하다가 들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누구의 표현대로, 인간 최후의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허겁지겁 재상의 자리에 기어오른그였다. 정작 그가 아니면서도 그의 부끄러움을 내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참모습을 일찌감치 깨닫게 해준 그가 고마운지도 모른다. 그 점 때문에 그를 함부로 미워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헛발질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으로 남아 한동안 우리를 더 농락했을지도 모른다. 국회에서 고만고만한 인물들과 어울리면서 기고만장하던 그의 모습에 잠시 우리는 판단력을 잃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 역시 욕망의 덩어리였고, 그 욕망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스런 일인가. 이렇게 잠시나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 이완구는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다시 허무에 직면하는 것이다.

 

욕망과 허무! 정치인종교인학자사회운동가 등 우리 시대 리더의 직함을 달고 있는 인물들이 바야흐로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욕망의 운명적인 더러움에 빠져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허무를 인식할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대다수 민초들은 부끄러움과 허무감에 몸부림친다.

 

새해 을미년도 그런 허무와 부끄러움의 연속일 것이다. 욕망과 허무의 삐에로가 되어 무대에 오른 이완구 총리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04.28 18:26
학회 유감

바야흐로 학회의 계절이다. 주말은 말할 것 없고, 주중에도 심심치 않게 학회들이 열린다. 그러나 여기에 동창회나 결혼식 같은 여타의 행사들이 겹치기라도 하면 학회는 뒷전으로 밀린다. 더구나 꽃놀이하기 좋은 계절 아닌가. 이런 때 컴컴한 방에 모여 ‘재미없는’ 논문 발표나 들으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고문이다.
 
그래서 어느 학회에 가 보아도 ‘자발적인 손님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징발된’ 학생들이거나, 안면 상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을 뿐이다. 학회 임원들, 발표자, 토론자 등이 참석자의 거의 전부인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어떤 학회는 발표자 1명당 토론자를 대여섯 명씩 배당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나마 토론자로라도 지정되면 참석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그 역시 이미 ‘약발 떨어진’ 방법으로 전락해 버렸다. 팸플릿에 토론자로 올려졌다 하여 모두 참석할 만큼 순진하지 않은 게 요즘 사람들이다.
 
국내학회만 이런 것은 아니다. 그럴 듯한 명칭의 ‘국제학회’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시간이 다가오면 학회의 임원들은 뜨거운 양철판 위의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한다. 회의장을 들락날락하며 ‘파리 날리는 구멍가게’의 주인처럼 무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하릴없이 쳐다볼 뿐이다. 저명한 해외의 학자들이라도 불러온 경우의 민망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나, 시대의 변화를 그 주범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학회가 학문 공동체인 만큼, 개인의 파편화나 인터넷의 발달 등 공동체의 문화를 파괴하는 현실의 직격탄을 피해갈 수 없다. 학회의 생명은 토론이고, 토론은 ‘다방향 통행’의 현장이다. 구성원들은 토론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개인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각자의 생각에 매몰되어있다. 남들의 생각에 좀처럼 마음을 열려 하지 않는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겉으로는 제법 대화가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인터넷 속의 대화는 ‘일방적’이다. 더구나 익명의 ‘말 던짐’은 독선과 아집, 아니면 지저분한 ‘배설’일 뿐이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배척한다. 왜 다른지, 혹시 내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따라주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적이다. ‘○사모’류의 집단들이 인터넷 안에 뭉쳐있지만, 그들 역시 불순한 동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패거리일 뿐 건전한 공동체는 아니다. 그들은 증오를 주 무기로 하는, 배타적 개체에 불과하다. 개인 간, 집단 간에 존재하는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정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내심이 없으니 폭력이 앞선다. 이런 공간에서 폭력의 1차적인 수단은 말이다. 독선과 폭력은 ‘반민주’의 표징이다. 학자도 인간인 이상 시대의 변화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남의 논문을 읽지도, 남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골방에 숨어, 제가 쓴 논문들을 저 혼자 읽으면서 만족해하고 잘난 체 한다. 남들이 이미 다 해놓은 말들인데, 자기에게 ‘지적 재산권’이라도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간혹 추궁을 당할 경우에는 ‘읽어보지 않았다’는 방패를 들고 나선다. 이런 상황에서 학회가 잘 될 리 없다. 학회가 죽고 학문도 죽었으니, 지금이 바로 암흑시대일 수밖에 없다.
                                                              조규익(국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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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04.19 10:29
지식인의 한탕주의, 그리고 금단의 열매

                                                                                                               조규익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자산, 그 가운데 핵심은 지식이다. 인터넷 만능시대인 요즈음은 흔히 지식 대신 정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러나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이 둘을 혼동하는, 무늬만의 지식인들이 대명천지를 활보하는 현실은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해체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앎’의 윤리성에 대한 몰각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다.

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진실과 양심만이 앎의 본질임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 공자의 본의였다. 이 선언이야말로 허위의식 속에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뼈아프게 새겨야 할 금언이다. 지식인의 정직성에 중점을 둔 공자의 생각으로부터 오늘날 자행되는 표절의 비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지식의 양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것은 사회를 다원화•세분화시켰다. 그에 따라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그룹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요즈음이다. 인쇄나 방송 등 각종 매체가 범람하고, 그런 매체들을 기반으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대중의 기호나 매체의 활용 여하에 따라 지식인의 시장가치가 결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장가치의 고하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고, 그것이 금전으로 직결되는 현실이다. 상품의 질보다는 광고술이 판매량을 좌우하는 시대에 지식인들 또한 자신을 실물보다 더 낫게 치장하여 시장에 내보이려는 욕구의 포로가 되고 있다.

대중은 지식인의 내면적 가치나 덕성을 찬찬히 살피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좀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인을 찾아 자신의 ‘코드를 맞추고’, 그의 말과 글을 아낌없이 사들인다. 대중의 코드에 영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지식인은 고민한다. ‘안 걸리게 잘 치고 빠짐으로써’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손쉽게 빠져드는 것이 표절의 유혹이다. 이른바 지식인의 ‘한탕주의’가 표절이란 행위로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한 두 번의 표절이 쉽사리 발각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사들이는 지식의 원산지나 생산자를 꼼꼼히 챙겨보지 않는 대중의 문제적 성향 탓이다. 이런 이유로 표절은 반복되고, 반복되다보면 결국 발각될 수밖에 없다. 구멍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훔쳐도 ‘절도죄’라는 살벌한 죄명으로 벌을 받는 현실이다. 단순히 돈으로만 따져도 표절은 일반 절도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 나쁜 절도행위인데, 표절범들이 거리낌 없이 이 사회를 활보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실 우리 모두 표절에 관한한 공범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절범이나 우리가 ‘오십 보 백 보’의 공범들이라면, 새삼 누가 누굴 징치할 수 있겠는가.

작년 언젠가 일본 후지TV가 프로그램 표절 의혹 건으로 국내의 어느 방송사에게 항의한 사실과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우리나라 젊은 과학도의 논문 표절사건을 상기해 보라. 지난 시절 국내 방송사들이 일본 방송 프로그램들을 베껴온 사실은 왕왕 거론되어 왔지만, 대명천지 21세기에 이르도록 그런 ‘못된 관행’을 청산하지 못했다니! 사실이든 아니든 과거 ‘베껴먹기의 원조’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의이고 보면 참으로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80여편의 논문을 실은 젊은 과학도의 표절행위 또한 우리 학계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국제적 범죄다.

자고나면 불거지는 가수들의 표절, 이름 있는 학자들의 표절, 공모전 입상자의 표절 등 우리는 표절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사실 표절 아닌 것을 찾아내는 일이 쉬울 정도로 표절이 일상화 되고, 그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뒤져 남의 글을 듬뿍듬뿍 퍼다가 ‘짜깁기’한 것을 논문이나 리포트로 제출하고 좋은 학점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강의 시간중에 제출하는 리포트의 표절의혹을 가리는 일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고, 이젠 각종 학위논문의 표절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참고문헌들과 논문의 본문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제나 논지의 타당성, 문장의 정확성 등은 이제 더 이상 1차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문장이 눈에 띄게 미끈하면 ‘이거 어디서 베껴온 것이나 아닌가’를 의심해야 하는 실정이다. 서툰 문장, 어설픈 논지가 오히려 반갑게 생각되는 것은 그것들과 참고문헌들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표절의 원본으로 삼고 있는 인터넷 속의 텍스트는 과연 온전한가. 그것들 역시 상당 부분은 표절의 수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니, 어느 텍스트를 원본으로 인정해야할지 난감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우리를 ‘표절 불감증’으로 몰아 넣었을까. 바로 사회에 만연한 ‘결과 지상주의’ 때문이다. 과정의 정당성 여부보다는 결과물의 수량만이 유일한 평가의 척도로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논문의 편수가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의 절대적 조건인 상황에서 문장을 따오든 아이디어를 베끼든 표절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청률만으로 성패를 가름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TV라도 표절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끈한 문장과 번지르르한 장정만을 보고 학점을 주는 상황에서 인터넷 속의 글을 짜깁기하여 리포트로 제출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한 것은 표절행위가 입증된 경우에도 그 뒤처리가 유야무야된다는 점이다. ‘그저 운이 나빠 걸렸을 뿐’이라는 판단은 우리 사회에 표절행위가 만연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생각이다. 모두 표절의 혐의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공범의식의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비록 표절을 당한 사람이라 한들 그 사실을 선뜻 공개할 수 없다. 모두 베껴먹고 사는 사회에서 그런 사실을 공개하는 일이야말로 좀스럽고 치사하지 않으냐는 비아냥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주저앉느냐 한 단계 도약하느냐는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에 달려 있다.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창조적 작업이나 결실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상품을 내놓기가 무섭게 표절된다면, 누가 영혼을 불사르는 창조적 작업에 나설 것인가. 국민들의 창조적 열기가 식어버리면 산업이나 과학의 발전은 그 순간에 멈추어 버린다. 정부가 2만불 시대를 고창하고 있지만, 표절문제에 미온적인 한 1만 불의 현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표절을 중죄로 다스리기 위해 법을 보완하고, 감시 기구의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범국민적인 양심 회복 운동이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다해도 국민 각자가 마음을 바로 먹지 않는 한 표절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한 번 빠져버린 표절의 함정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절은 금단의 열매인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04.1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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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교육부 장관 관련 사건들과 이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둔사(遁辭)’의 덫이란 것. ‘둔사 즉 도피하는 말은 논리가 궁하고 결국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는 맹자의 말씀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관 하마평이 나돌면서 자녀의 외고 편입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교육문제에 관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만큼 그의 답변은 시원치 못했다. 그러다가 제자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사회를 감염시킨 표절사건들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사건의 노출로 학계는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당사자는 ‘전혀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학계와 국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곧바로 ‘BK21 논문 중복 게재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실무자의 착오’라는 전제를 달아둠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표절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자인 신모씨의 논문이 통과된 것보다 자신의 논문 발표가 앞섰으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제자에게 설문조사나 데이터 작성을 시킨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괴한 것은 같은 데이터로 제자는 학위논문을, 자신은 일반논문을 작성했는데, 제목도 논조도 결론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기를 따지면 장관의 논문 발표보다 학위논문 통과가 두어 달 뒤진다. 그러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모씨는 장관의 논문이 발간되고 나서야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박사학위논문에는 최소한 서너 번의 심사과정이 있다. 심사위원인 자신의 논문이 도용당했음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만능시대, 표절의 전성시대,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학위논문 심사의 핵심’이라는 교수들의 한탄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다. 하물며 직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이 제자의 학위논문에 도용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관이 한 마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이게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BK21 논문사건은 표절보다 더 큰 문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고등인력 양성’이란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쓴 잔을 마신 필자를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교수들이 몇 개월간 날밤을 새워가며 BK21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으나 선정된 인원은 소수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노라는 국가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한때 고무되었던 우리다.
 
장관은 논문을 중복 투고했으면서도 연구비는 그대로 챙겼으리라. 그렇게 귀한 국가예산을 ‘눈먼 돈’ 쯤으로 여겼단 말인가. 그런 입장으로  어떻게 ‘표절하지 말라, 연구비 집행을 투명하게 하라, 학위논문의 부실을 막기 위해 철저히 심사하라,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편법을 쓰지 말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는가. 장관직 수행에 행정능력이나 기술이 중시된다지만, ‘교육인적자원부’만은 달라야 한다.

국가의 만년 대계를 책임 진 곳이 바로 교육부다.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인격이나 학자로서의 품위에 시비가 따르지 않을만한 인물을 발탁해야 하고, 스스로 ‘적재(適材)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고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강호에 묻건대, 과연 지금이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관직을 고수할 상황이란 말인가.<2006. 7. 28.>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