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12.16 01:37

국가부도의 아수라장을 뒤돌아보며

 

 

                                                                                                         조규익

 

 

                         

 

 

 

음울하고 처참했던 1997년의 겨울.

 

날만 새면 굴지의 기업들이 쓰러졌다는 소식과 일가족 자살 같은 끔찍한 뉴스들이 귓전을 때렸다. 이미 재계 14위 한보는 무너졌고, 진로도 재계 4위인 기아도 무너졌으며, 2위인 대우도 막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보다 규모가 작은 무수한 기업들은 물어 무엇하랴! 가장의 실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족들이 한파에 내몰리는 등 나라 전체가 상갓집 분위기였다. 자살률도 OECD 국가들 중 최고로 치솟았다. 곳곳에 곡성이 울렸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자기 한 몸 추스르기에도 버거운 시련의 시절이 계속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층의 리더십은 간 데 없고, 그 많던 사회의 지도 그룹들도 종적을 감추었다. 불쌍한 국민들만 각자도생의 벌판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19981월 미국(UCLA)으로 첫 연구 년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떠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1997년 12월까지 확실한 것은 4인 가족 비행기 표를 사놓은 일 뿐이었다. 가족들에게 차마 말은 못했지만,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혼자서 속을 끓이고 있었다. 고맙게도 19972LG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98년 출국을 위해 착착 준비를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연암재단 지원금 25,000불은 큰돈이었다. 4인 왕복 비행기 표와 건강보험료까지 계산하면 3만 불이 훌쩍 넘는 거금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0월 중 연암재단으로부터 선금 12,500불에 해당하는 원화가 입금되어야 했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매일 아침 뉴스에서는 환율 고시가 나왔다. 연초 800원대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서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재단의 오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음성 역시 가라 앉아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환율을 보고 있는데, 환율이 조금이라도 안정되면 송금해주겠노라고 했다. 거기에 대고 독촉할 배짱은 없었다. 평소 LG는 무너질 수 없는 회사라고 믿어왔지만, 대우가 흔들리는 마당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11월이 되면서 1,600~1,700원을 오르내리던 환율은 12월이 되자 1,800원대를 찍기 시작했다. , 나라가 드디어 망하는구나! 123일 깡드쉬 IMF 총재와 임창렬 총리 사이에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되면서, 대한민국은 IMF 치하로 들어갔고, 환율도 1,830~1,850원대를 오르내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재단에서 1,830원대에 12,500불에 해당하는 원화를 송금해주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인천공항에 나갔으나, 개미들처럼 커다란 이민 팩 서너 개를 밀고 일가족이 나타난 건 우리뿐이었다. LAX에 픽업 나온 배광복 선생 부부는 우리가 미국행을 포기한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시 미국의 대학으로 오는 가족단위 한국인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기 때문이었다만약 LG 연암재단의 배려가 없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미국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체류 13개월 동안 늘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인터넷으로 전해지는 고국의 소식들은 언제나 끔찍했다.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모르고 방만하게 지내온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반성도 있었지만, 순진한 장삼이사들이야 무슨 수로 세상의 변화를 알아 미리 대처하겠는가.

 

IMF 통치를 받기 시작한 1998년으로부터 만 20년이 지나고 있다.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치욕적인 IMF의 기억을 지금의 상황에 대입하면 상당 부분 들어맞는다. 우리는 지금 그 때와 큰 차이 없는 상황으로 내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엊그제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기본은 튼튼하다고 장담했다. 그 말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fundamental)은 튼튼하다고 호언하던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말과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가. 소상공인들이 퍽퍽 나가떨어지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못 잡으며, 대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지금의 상황이 어째서 걱정 없는 상태란 말인가. 과연 지금의 대통령은 무슨 신통한 방책이라도 갖고 있는가. 사악한 정치인들의 인기놀음에 멍드는 건 서민들뿐이니, 과연 저들의 말을 믿어도 될 것인가.

 

***

 

오늘 국가부도의 날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것은 내 가슴의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어서였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왜 내 작은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다.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나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젠 좀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유사한 상황이 닥친다면, 당당하고 똑똑하게 사태의 진실을 인식하며 용감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속의 김혜수처럼...

 

어쨌든 이 영화, 참 좋다.

 

<2018. 12. 15.>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1.02 11:48

지나온 40, 또 다른 40

-새문사 40주년을 축하함

 

 

조규익(숭실대 교수)

 

 

사범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고, 모 대학 교육대학원에 잠시 적을 두었었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1978년의 일이다. 교육대학원 재학 중 그 대학 도서관에서 쉘리(P. B. Shelley)󰡔시의 옹호(A Defence of Poetry)󰡕를 우연히 만났다. 시론 강의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내게 이 책이 주는 충격은 컸다.

 

우선 제목이 흥미로웠다. ‘시의 옹호?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시를 변호하겠다는 뜻일 텐데, 그 말이 내 호기심을 도발했다. ‘를 경()으로까지 숭배해 온 동양에서야 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 내가 알고 있는 시 혹은 시인에 대한 비판은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이 유일했고, 그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원한 서양 시론의 발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이 눈에 뜨였던 것일까.

 

다 읽고 나자, 새삼 번역자와 출판사가 눈에 들어왔다.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였던 윤종혁 선생은 당시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사였으나, 신생 새문사의 출판사명은 아주 생소했다. ‘새롭다는 뜻일 것이고, 출판사인 이상 이란 을 뜻할 텐데, ‘신문(新文)’이라 하든지 차라리 새 글이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새 문(new gate)’의 뜻일까. 의아함과 호기심으로 새문사란 명칭이 마음에 콕 박힌 것은 그 때부터였다.

 

직장과 교육대학원을 접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모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지적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내 대학원 시절은 영인본 출판의 전성기였고, 의미 있는 연구서들이 대량 출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때 맞춰 새문사에서도 내 전공분야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병욱, 김열규, 신동욱 등 당대를 풍미하던 선학들이 국문학의 키를 잡고 새문사를 한국 지식사회의 광장으로 몰고 나왔다.

 

새문사의 책이 나올 때마다 두려움과 부러움이 엄습했다. 이 분들을 능가하는 이론과 논리로 내 시대를 열어 볼 수 있을 것인가. 새문사에서 이 정도의 책들을 낼 기회가 내게도 주어질 것인가. 전자는 두려움, 후자는 부러움이었다. 새문사의 책이 나올 때마다 내 호주머니는 가벼워졌고, 두려움과 부러움의 무게는 커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몇몇 출판사들에서 내 책들을 내기도 했지만, 새문사에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부러움이 오기로 변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흘려보낸, 긴 세월이었다. 좋은 글의 생산자도, 읽어줄 소비자도 많아 한국문학이 잘 나가던 당시였다. 시장의 활황으로 좋은 출판사들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무지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한 복판에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책에 갈급(渴急)하며 살아왔다. 교과서 외에 읽을 거라곤 비료 부대에 인쇄된 글들뿐이었다. 책에 관한 내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더 이상 책을 놓아둘 공간이 없는 최근까지 지출의 1순위는 책이다. 그래서 좋은 책과 저자, 출판사는 내가 선망하는 불변의 대상들이다. 3, 40년 세월의 갈피 속에서 저자와 출판사가 함께 이룩한 학문적 결실의 양적인 증대나 의미 있는 발전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우리 지식사회가 이제 학문의 르네상스를 넘어 완숙기에 접어 든 것이다.

 

당시 40대 초반이셨을 이규 사장님을 몇 해 전에 뵈었다. ‘처음으로 부탁을 받아새로운 세대의 󰡔한국문학개론󰡕을 여러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고, 내친 김에 󰡔조선조 악장 연구󰡕도 낼 수 있었다. 학생에서 학자로 변신해온 지난 세월은 책에 대한 내 트라우마의 치유 기간이었고, 바야흐로 장년에 접어든 새문사의 성장기였으며,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완숙기였다. 이제 누군가 또 다른 트라우마 보유자를 발굴하여 그와 함께 또 다시 40년을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불혹(不惑)’에 접어든 새문사가 계획하고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가 아닐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12.02 06:06

 

 

 

체로키어 ‘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1128일 아침 스틸워터를 출발, 털사를 거쳐 오후 3시쯤 체로키 네이션(Cherokee Nation)의 수도 탈레콰(Tahlequah)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자 전체적으로 약간 이색적인 기풍이 느껴지는 점만 제외하면 미국의 여느 지역 도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면 미국 판 만족(蠻族) 이라고나 할까. 간판의 영문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체로키 글자들이 병기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 교통체계, 건물 양식,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여타 지역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미국 땅이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깃발


체로키 네이션의 문장(紋章)


stop 사인 위쪽의 글자는 같은 뜻의 체로키 글자

 

미국 백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거나 말거나 이곳에서는 체로키인들 나름의 생활을 볼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내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호텔과 월마트, 주유소 및 맥도날드 몇 군데만 열려 있을 뿐 모든 곳이 꽁꽁 닫혀 있었다. 일단은 실망이었다.


 


체로키 네이션 안에서 유일하다는 체로키 고유 음식점. 명절날 점심에 잠깐 열었다가
닫은 모양이다.

 

***

 

인디언으로 보이는 호텔 프런트 아가씨들의 설명을 듣고 체로키 네이션 본부와 헤리티지 센터 및 뮤지엄을 찾아갔으나, 사람 없는 곳에 청설모들과 사슴들만 분주하게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베테란 센터


체로키 네이션의 정부 청사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입구


헤리티지 입구에서 만난 사슴(노루?)들

 

하릴없이 돌아오면서 월마트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엔 사람들이 미어질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품 매대(賣臺)마다 금줄이 둘러져 사람들의 손을 막고 있었고, 그 앞과 옆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원들은 그들의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 이제 6시만 되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들이 점찍어둔 물건들을 카트에 실을 태세들이었다. 이른바 몇 시간 앞당겨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였다.

 


이 날 월마트(Walmart)는 블랙프라이데이 때문에 붐볐다.

 

미국 전역에서 Thanksgiving Day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점들은 엄청난 할인 가격으로 재고물량을 소진시키는 행사들을 갖곤 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가전제품 등 고가의 물품들이 그 주된 대상일 텐데, 비디오 코너나 어린이 용품 코너에도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든 품목이 다 해당되는 듯 했다. 인디언 문화를 보고자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왔으나, 정작 인디언들은 보지 못한 채 멀미나게 목격해온 미국의 물질문화, 소비문화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릴없이 하룻밤을 호텔 방에서 묵고 다음 날 찾은 뮤지엄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체로키 사람들이었고, 명절 연휴라서인지 관람객은 한 두 가족에 불과했다. 뮤지엄에서는 체로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찍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으로 불리는 강제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기록으로, 모형으로 세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자그마한 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정복당한 민족의 운명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컬렉션을 설명해주던 큐레이터에게 한국과 체로키 문화의 동질성에 관한 내 의견을 말하며, 일례로 그들의 인사말인 ‘Osiyo[welcome의 뜻]’가 우리말의 오세요/어서 오세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물론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나의 희망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말보다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이 박물관의 핵심 테마인 눈물의 여정에 기막히게 오버랩 되어 있었고, 정작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사진 전시회의 포스터


'눈물의 여정' 설명판 


국립 체로키 뮤지엄


Andrew Hartley Payne의 달리는 모습. 그는 1928년 열린 '미 대륙횡단 도보 경연대회'
[1928년 3월 4일 LA를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26일 뉴욕에 골인]의 우승자로서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다.


체로키 레스토랑의 출입문에 쓰여진 'Osiyo'


체로키 네이션에서는 어딜 가나 'Osiyo'가 보인다.

 

건물 밖에도 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착 당시의 일반 가정들과 학교, 교회, 상점, 대장간, 마굿간, 닭장까지, ‘눈물의 여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기증으로 그곳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체로키의 관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체로키 남성 가이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젊은 가이드는 체로키 의식(儀式)’에서 불리던 노래와 춤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체로키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그는 작은 돌들을 집어넣은 소형 거북이 껍질들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그들만의 타악기를 보여 주었다. 발에 전대처럼 차고 처륵처륵소리를 내며 많은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많은 거북이들이 땅 위로 출몰한다고 했다.

 


정착 초기에 살던 집


집 앞에 서 있던 음식 저장고


새 희망 교회[New Hope Church]


가정집에서 부인이 사용하던 직물 기계. 우리의 베틀과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다.


농가


농가의 내부


집 바깥에 걸어둔 등


학교 건물


교실. 영어 알파벳과 체로키 문자가 함께 적힌 칠판이 보인다.


야외 마굿간에서 만난 '명상에 잠긴 말'

 


가이드 나탄의 노래를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세요.

 


마른 거북에 돌들을 넣어 만든 악기를 들고 의식의 실제를 보여주는
젊은 가이드 나탄(Mr. Nathan Wolfe)


젊은 가이드의 또 다른 포즈

 

다른 두 명의 중년 가이드들은 각각 전통 사냥법과 활 전문가였다. 한 사람은 대나무에 침(針)을 넣고 입으로 불어 토끼 등 작은 동물들을 잡는 시범을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고, 강하고 큰 활에 그 화살을 메겨 적에게 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해 총으로 무장한 백인 침입자들의 출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당시 체로키 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역사의 아이러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대롱에 넣은 침을 입으로 불어 작은 동물을 잡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돌 화살촉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헤리티지 뮤지엄을 떠난 우리는 탈레콰 다운타운으로 진출했다. 조용하고 널찍한 도로 양 옆으로 건물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1자형 간선도로가 끝나는 곳, 도시의 핵심이자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위치 양지바른 곳에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0명 규모의 작은 대학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교 중앙에 세쿠오야(Sequoyah)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대학은 이곳 체로키 네이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듯 했다.

 


탈레콰 다운타운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멋진 캠퍼스

 

체로키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쿠오야는 문화의 기록과 전승을 가능케 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원래 그는 은 세공장이었는데, 1821년 독자적인 체로키어 음절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지적 활동에 큰 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글자 없던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쓰기 체계를 만들어 준 일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이 음절표를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은 체로키 네이션에서 급속히 번지게 되었고, 1825년에는 네이션에서 공식 채택됨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주변의 백인 정착자들을 뛰어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로키인들에게 세쿠오야는 우리민족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이곳 체로키 네이션 어딜 가나 세쿠오야의 사진이나 동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세쿠오야의 동상

 

NSU에서 나온 우리는 체로키 국립 대법원 박물관[The Cherokee National Supreme Court Museum]’체로키 국립 감옥 박물관[Cherokee National Prison Museum]’ 등에 들렀다. 탈레콰 타운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대법원 박물관은 1844년 피어스(James S. Pierce)가 세웠으며, 체로키 네이션의 대법원 청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또한 체로키 네이션의 공식 간행물이자 오클라호마 주 최초의 신문인 체로키 애드버킷’[Cherokee Advocate, 1844년부터 1906년까지 간행]의 첫 인쇄 행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건물이다.

 


상공회의소 겸 관광안내소


탈레콰 시청


국립 체로키 대법원 뮤지엄 표지판


국립 체로키 감옥 박물관


1880년대 사용되던 수갑을 본떠 다시 만든 것


죄명에 따른 당시의 판결. 살인범은 교수형에 처했다. 계획살인에 단 3~5년형을 부과해놓고도
'중형'이라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의 법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법 정신이다.


당시 감옥의 주방


당시 감옥의 모습

 

체로키 애드버킷은 문화민족 체로키 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간행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1844926일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권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란 그들의 모토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수시로 외치는 구호가 아닌가? 당시 이 신문은 체로키 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인들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체로키어와 영어로 매주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내의 유일한 민족 신문이었으며, 이 신문의 발간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850년엔 촉토 인텔리젠서(Choctaw Intelligencer)’, 1854년엔 치카사 인텔리젠서(Chickasaw Intelligencer)’가 각각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하여 잘못 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도 누구 못지않은 지능과 식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의 박물관들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Cherokee Advocate> Vol. 30, No. 3.[1906년 3월 3일자]

 

***

 

체로키 네이션을 방문한 것은 아직도 광활한 미국 땅에 온존하고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와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다수자들의 통치논리에 순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을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자체계를 만들었고, 신문까지 발행했으며,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까지 운영했던 그들의 지능과 문화를 과연 지배자로서의 백인들은 제대로 인식해온 것일까.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복수를 위한 근거자료 만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완전히 잊어버릴 경우, 삶의 바탕인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주 아름답고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들에 그 증거물들은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살아 있었다.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빌리지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백규


빌리지 가옥 앞에서 Melani


북동부 주립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오세이지족 인디언 소년 Joshua군과 함께.
부자간으로 보이지요?^^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09.09 08:32

 

 

 

 

자동차를 구입하고

 

 

15년 전 미국에서 자동차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생이 재미 동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한 요인으로 내 마음에 고착되어 있음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미국 도착 3일 만에 어떤 동포로부터 겁 없이 자동차를 구입했고, 그 자동차를 처분할 때까지 찜찜하게 1년을 보내야 했다. 시동이 안 걸린다거나 가다가 서는 등 심각한 문제는 결코 없었으되, 100% 말끔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내 성격 탓에 당시 그 자동차는 모든 불쾌함과 스트레스의 근원이었다. 제반 조건들을 찬찬히 살피고 치밀하게 고려한 뒤 판단을 내려야 후회 없이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자동차의 천국 미국에서 그 때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대도시 몇을 빼곤 대중교통이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은 미국 땅에서 자동차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옛날 우리네 부모님들이 하루를 꼬박 걸려 면 소재지 장터를 걸어서 다니셨듯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날씨에 걸어서 월마트니 베스트바이니 스테이플스니 세탁소니 학교 연구실 등을 돌아다닐 순 없는 일 아닌가. 특히 다른 도시나 지방을 가게 되는 경우엔 마땅한 방법이 없다. 이처럼 모든 것들에 앞서 해결해야 할 것이 자동차 구입인데, 워낙 돈 단위가 크고 신경 쓸 부분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미국 정착 과정의 맨 나중에 자동차 문제를 해결하기 마련이다.

  

6개월 동안 탈 것이므로 새 차를 살 필요는 없고, 여러 조건들을 꼼꼼히 살핀 뒤에 같은 값이면 최상의 중고차를 구입하라면서 틈틈이 각종 사이트의 정보를 알려주시는 OSU 기계공학과 장영배 교수님의 조언을 토대로 자동차의 탐색에 나섰다.[사실 이 분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성미 급한 우리는 약간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며칠 만에 덜컥 사버렸을 것이다!] 자동차의 대국답게 자동차를 거래하는 공적, 사적 사이트들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는 미국이다. ‘연식, 제조사, 마일리지, 가격, 지역, 판매자 연락처등을 달고 있는 신차 및 중고차들이 각 사이트마다 무수히 나열되어 있다. 간단히 연식과 제조사, 마일리지 및 자동차의 내외관 등을 입력하면 상하로 구분된 적정 구입가격까지 산정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그런 정보들을 입력하면 사고자 하는 자동차종에 어떤 문제들이 보고되었으며, 혹시 그 차종이 사지 말아야 할 자동차리스트에 속해 있는지 여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뿐 아니다. 약간의 돈을 내고 VIN[한국에서의 차대 번호?]을 조회하면 사고내용이나 수리 이력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니 적당히 눈속임으로 자동차를 팔아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상식을 갖춘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가혹한 환경에서 근래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들이 선전(善戰)하는 이면에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고 자동차 한 대를 사기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면서 우리는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한 부분이 투명성에 있다는 점 또한 깨닫게 되었다.

 

미국 도착 거의 한 주 만에 드디어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하게 되었다. 작은 도시 스틸워터에 있는 딜러샵들을 대충 다 둘러보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팔기 위해 사이트에 내 놓은 차들을 여러 대 보고 나서도 만족스런 차를 발견하지 못한 우리였다. 이제 자동차 없이는 더 지탱할 수 없다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을 즈음. 인근 에드몬드 시의 한인 교회 이종태 목자님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사연을 올리자마자 좋은 차가 나타났다는 그 분의 답 글이 있었고, 우리는 장 교수님의 차로 한 시간 거리의 그곳에 가서 드디어 그 차를 사게 되었다. 장 교수님과 이 목자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딜러를 설득하여 조건이 좋은 중고차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넓은 미국 땅에서 드디어 날개를 달게 된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스틸워터의 도로망을 대충 섭렵하게 되었고, 땀 흘리지 않고 연구실에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차 없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날아가면서 덩달아 시차에서 오는 피로 또한 눈 녹듯 사라지는 어제 오늘이다.

 

Posted by kicho
알림2013.08.02 16:05

 


책 표지


1980년대의 한진


                                                        1988년에 펴낸 <<한진 희곡집>>


1965년작 <의부어머니>


1991년 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2011년 8월 백규 연구실에 만난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한양대 박사과정 재학)와 저자들

 

 

조규익 교수(숭실대 국어국문학과)와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김병학 선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 7.]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2로 펴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작가 한진 선생만큼 복잡다단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이는 드물다. 그는 북한에서 인텔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기간에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고 1948년에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에 들어갔다. 공부에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곧바로 학업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전쟁의 와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도 변함없이 최우등의 학업성적을 보였다. 시쳇말로 그는 ‘최고의 스펙’을 쌓은 전도유망한 청년학도였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안정과 명성이 보장된 미래를 던져버리고 돌연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가 격화되면서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예술은 이념의 시녀로 추락하고 있던 조국이 더 이상 기쁘게 돌아가 양심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의 작품들은 그의 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네 단계로 나뉜다. 망명과 정착 과정에서 갖게 된 콤플렉스를 ‘원 모성으로부터의 절리(切離)와 새로운 모성의 발견 및 정착’으로 형상화시켰다고 보는데, 이것을 1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새로운 조국과 이념의 발견]이라 할 수 있고, <의부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등이 이에 속한다. 정착지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지극한 사모(思母)의 정이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조국 북조선의 현실이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2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모정에 대한 그리음과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량반전>, <산부처> 등이 이에 속한다. 2-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천명된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은 소련의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고, 그에 따라 그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풍자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체제의 모순을 비판할 수도 있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으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 3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주제의 다각화와 다양한 미학의 추구]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상황의 변화 덕분이었고, <토끼의 모험>, <나 먹고 너 먹고>, <폭발> 등이 이에 속한다. 4단계에 이르러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진으로서는 이념이나 힘의 우위가 아니라 동질성에 입각한 ‘분열된 민족의 통합’만이 가장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통해 이 시기의 이면적 주제의식[민족통합의 당위성 추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표면상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살아갔지만, 이면적으로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이나 정서를 추구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갔다고 본다. 그 결과 그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극작품들은 독특한 미학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밝혀진 것만 해도 12편의 희곡, 19편의 단편소설 및 소품, 5편의 단행본, 16편의 번역극, 수 미상의 평론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창작 및 번역 희곡들 대부분은 최근까지 고려극장을 통해 상연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영영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는 그가 일평생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었지만, 그는 이 아픔을 자신이 창작한 희곡에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쓴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마라」는 오직 한진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국통일에 대한 독특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전을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과 북의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해답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던 한진이 소련에 유학하던 첫해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며 평생을 붙들고 다듬어온 구상으로,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어릴 적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사진 및 원고사진들을, 후반부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과 연구를 각각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배출한 구소련의 뛰어난 극작가 한진의 전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차례

머리말

 

제1부 사진 및 기록자료

1장. 사진

1. 평양 시절

2. 소련 모스크바 유학 시절

3. 러시아 바르나울 시절

4.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절

5.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전반기)

6.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후반기)

2장. 편지

3장. 육필 원고

4장. 신문 게재 원고

5장. 책․잡지 게재 작품 및 글

6장. 기타 자료

7장. 작품 목록

1. 희곡

2. 단편소설․소품

3. 직접 편찬했거나 편찬을 주도한 단행본

4. 번역 작품

   

 

제2부 한진의 생애와 문학

1장. 한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

2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 세계

3장. 한진 희곡의 고전수용 양상

4장. 한진의 연보

5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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