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9. 1. 16:42

 

삼례 책 마을을 다녀와서

 

 

 

책이 없어 곤궁하던 어린 시절부터 책이 넘쳐나는 지금까지 책과 뗄 수 없는 것이 내 삶이다. 남의 책들을 사 읽고 모으며, 가끔은 책을 펴내는 게 내 일 중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막 학계로 진출하던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엔 책이 넘쳐나게 되었다. 지식인들의 수와 지식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지식정보의 유통과 저장을 위해 책의 효용가치는 절대적이었다. 책 하나 펴내지 못하면 행세를 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마구 변하여 모든 지식정보는 디지털의 공간으로 이동함으로써 이제 크고 무거운 책이 거추장스런 시대가 된 것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하루 24시간을 구부정하게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시절이다. 종이 위의 깨알 활자들이 어찌 이들에게 매력적일 수가 있겠는가.

 

누구의 한탄대로, 한국의 대학가에서 서점이 사라졌다. 책이 빠져나간 공간을 옷 가게, 음식점, 술집, 커피 집 등이 파고들었다. 가끔씩 커피 집 창문으로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 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대다수는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대학에서 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성의 샘도 말라버린 것이다.

 

대학의 권력도 대부분 힘 있는 이공계가 잡고 있다. 총장도 보직교수들도(그 가운데 도서관장도) 책이 무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린 학생들 탓만 할 수는 없다. 도서관의 장서를 전자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도서관에서 값나가는 인문서적들이 차떼기로 퇴출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이렇게 반학문적, 반지성적 만행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현장이 대학이다. 그래서 종이책만이 책임을 믿으며 대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면구스럽다. 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멸종을 눈앞에 둔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완주군 삼례읍은 특이하고 고결한 고장이다. 아주 오래된 비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고 각박한 삶에 지성의 문채(文采)를 입힌, 이 고장 사람들의 지혜가 참으로 소중하다. 2016829일은 이 땅에 타오를지도 모를 대한민국 판 르네상스가 바로 이 고장에서 점화된, 역사적인 날이다. 책을 잃어버려 마음도 희망도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갈 길을 제시한 등대로 우뚝 선 날이다.

 

이 날 몇몇 지인들과 책 마을 개관식에 참석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삼례는 책이다!”라는 현수막이 수줍은 듯 조그맣게 매달려 있었다. 삼례성당 좌측 창고에는 책 박물관, 박물관 건너편에는 목공학교가 가동 중이었다. 이 부분이 책 마을의 중심이었다. 박물관은 아동도서와 교과서, 만화 등 2~3개 주제의 상설전시와 매년 1~2회의 기획전이 열리게 되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건너편의 김상림 목공소도 책 마을의 전통성을 보태주는 좋은 공간이었다. 전통 목공의 도구들을 살펴볼 수 있고, 목수들의 작업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 그곳 역시 멋진 공간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삼례역 방향으로 걸어가니 북하우스, 한국학 아카이브, 북갤러리 등 세 동의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북하우스는 고서점과 헌책방, 북카페로 구성되었고, 한국학 아카이브에는 각종 연구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북갤러리에는 전시실과 강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북하우스로 들어가니 고서점 호산방이란 이름 아래 한국학 관련 고서, 신문, 잡지, 사진, 음반자료, 중국일본서양 관련 고서 등이 비치되어 있고, ‘책마을 헌책방1층에는 아동도서와 향토문화 관련 도서 등이, 2층에는 인문도서들이 비치되어, 10만권의 빛나는 책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책방의 1층 한쪽에 카페가 마련되어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그것은 대물림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책에 관한 에디슨의 명언이다. 이제 위대한 천재들이 만든 책들이 이곳으로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물림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겠지. ‘망아지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만간 책도 사람도 삼례로 보내라는 새로운 속담이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삼례는 책의 메카로 변신할 것이며, 대한민국 정신사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들 손을 잡고 삼례 책 마을에 가서 잠시라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볼 일이다. 책의 의미와 책의 일생을 보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 01:15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림멜 교수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림멜(Lesley A. Rimmel) 교수

   

 

미국에 있는 동안 꽤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만났다. 주로 교수나 강사, 박물관의 큐레이터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등인데, 그 가운데는 오가는 도중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들이 타인들 특히 외국인들을 낯설어 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를 통해 전공에서 만난 문제들을 풀기도 한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 브레이크 룸에서 커피를 데우고 있는데, 평소 눈인사 정도를 나누던 여 교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 PBS에서 방영된 비밀의 국가 북한[Secret State of North Korea]’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방영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긴 했으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동족의 끔찍한 참상들이 미국인들의 눈앞에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 모양이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그 방송을 확인했고, 며칠 후에는 다운로드해서 직접 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내용이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가까울 정도의 병영국가 체제, 대한민국과 미국을 주된 표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협박, 몽땅 쇼 윈도우의 컨셉으로 꾸며진 평양, 비참하고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들, 살아남을 힘마저 상실한 아이들과 일반국민들의 참상 등. 내게 북한의 현실을 일깨워 준 림멜 교수에게 달리 할 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만나 South Korean들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드디어 림멜 교수의 연구실에서 장시간 만나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녀의 관심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들 가운데 한 부분을 이곳에 올리기로 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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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림멜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남을 이해하게 된대표적 미국 지식인이다. 명문 예일 대학 역사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이듬 해 국제 교육 교류 위원회[Council on 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의 수혜자로 선발되어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레닌그라드 주립대학[Leningrad State University]에서 러시아어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키로프(Kirov) 살해와 소비에트 사회: 1934-35년 레닌그라드에서의 선전과 여론[The Kirov Murder and Soviet Society: Propaganda and Popular Opinion in Leningrad, 1934-3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1995-9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1998년 가을학기부터 이곳 OSU에 자리를 잡고 주로 러시아중앙아시아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과목들을 강의해 왔으며, 20여 종에 가까운 수상 및 그랜트(Grant) 수혜 경력을 갖고 있는 탁월한 교수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풀브라이트(1991-92), 앨리스 폴 어워드(Alice Paul Award/1991), 국제 교류 연구 기금(International Research and Exchanges Board Grant/1991-92) 등을 비롯,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혜를 받은 학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탈린 시대 소련 역사에서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었고, 전쟁을 비롯한 집단 폭력이나 지하경제와 같은 국제적 기층민중의 현실 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북한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현실에 관심을 갖는 걸까. 북한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김정은을 입에 올리며 스탈린보다 훨씬 잔인한 그의 성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야기 도중 책장 위에 올려놓았던 스탈린의 배불뚝이 동상을 꺼내더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체형(體形)이 스탈린과 똑같지 않으냐고 내게 물었다. 국민들을 배고프고 괴롭게 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린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스탈린에게서 찾을 수 있고, 한반도의 김씨 3대는 바로 그 아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를 긴 세월 연구해 온 그녀로서 국민 착취 및 학대의 전형적인 독재자로 스탈린을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체형과 인간성의 유사성까지 들면서 김씨 3대를 스탈린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나마 스탈린은 자기 당대에 끝이 났지만, 김씨 왕조는 대물림을 하고 있으므로 훨씬 지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탈린이나 김씨 3대 등 배불뚝이 독재자들주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마적 지도자의 시각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그녀의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독재가 결국 소련 해체의 단서로 작용한 것처럼 그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한반도 북쪽에 군림하고 있는 김씨 3대 특히 김정은의 폭력성이 조만간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었다.

 

 


연구실에서 필자와 대담 중인 림멜 교수

 

 


연구실에서 필자에게 설명 중인 림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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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입양된 한국의 고아들을 언급함으로써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내 한국인 친구들이나 한국과의 친분을 강조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친밀감을 갖게 한 그녀.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삼성현대기아엘지•대한항공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장점까지 거론했으며,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뿐인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독재자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정착기의 대통령으로, 그 사이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을 과도기로 각각 규정하는 등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과 공적을 꿰고 있었으며, 반기문 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세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명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움으로써 한국인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산업화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도 정계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 말을 수긍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물어왔다. 세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들이나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과 함께 여성의 리더십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선례를 한국이 만들 것이라는 고무적 관측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이 매우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한국의 다양한 활약이나 선전(善戰)에 불쾌감을 느끼는 데 큰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분석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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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서 자신이 전공한 학문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체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걸출했던 역사철학자 E. H.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가 역사라고 했다. 그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온당한 해석 행위이고, 그런 해석을 통해 역사의 객관성은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역사적 사건들의 해석을 통해 단순히 그 시대의 규명에나 그치고 만다면, 그것을 진정한 역사가의 안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학자를 만나자마자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씨 3대 혹은 북한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통찰을 림멜 교수는 내게 보여준 것이리라. 여지없이 엄정한 시각을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해석에서 얻어내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을 만나는 일이 내겐 큰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을 림멜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컴퓨터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는 림멜 교수

 

 


림멜 교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삼성 폰

 

 


2013. 12. 14. PBS에서 방영한 '비밀의 국가 북한' 타이틀 화면[방송화면 캡쳐]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의 어린이[방송화면 캡쳐]

 

 


군 진지를 순시하는 김정은에게 달려가며 충성을 과시하고 있는 인민군들[방송화면 캡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0. 1. 16:21

안철수가 걸린 또 하나의 덫

                                                                                                        백규

나는 평소 안철수 선생에 대하여 호감을 가져 왔고, 그 마음을 작은 글로 이곳에 올린 적도 있다.[백규서옥 블로그 http://kicho.tistory.com 참조] 따라서 이 글 역시 그런 호감과 걱정의 연장선에서 쓰게 되었을 뿐, 특정 진영이나 인물에 대한 '호(好)/불호(不好)'의 차원에서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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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 예비후보 안철수 선생에게 닥친 악재(惡材)는 서너 가지다. 그 가운데 부동산 ‘다운 계약서’는 목하 거론 중이고, 연구업적 문제는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나머지 문제들도 곧 입줄에 오르내릴 전망이다.

오늘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한겨레신문[http://hani.co.kr]의 1면 톱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연구업적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세대학 강모 교수의 뛰어난 작문실력에 놀랐고, 아무리 뛰어난 작문실력으로도 그의 치부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장문의 글을 소상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학위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다고 표절이라니…어이쿠!”라는 매우 선정적인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제목은 강 교수의 의도가 너무 빤하게 읽혀져서 오히려 애처로웠다.

지금 안철수의 연구업적에 대하여 벌이는 논란의 핵심은 ‘학위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한 것이 표절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지금 세상에 학위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거나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표절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강 교수는 흡사 세상 사람들이 ‘안철수가 자신의 석사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표절했다고 비난한다’라는 엉뚱한 논지의 제목을 붙이고 말았다. 따라서 ‘표절’이란 잣대를 끌어대어 ‘안철수 논문 논란’이 어불성설임을 강변함으로써 그에 대한 도덕성을 따지려는 세상의 비난을 잠재우거나 물타기하려는 강 교수의 논의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궤변일 수밖에 없다.

안철수 논란의 골자는 이렇다. ‘세 사람이 공저로 되어 있는 영문 논문 한 편이 서울대학 발간의 모 학술지에 실렸는데, 안철수도 저자의 한 사람[제2저자]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원래 제1저자의 석사학위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한 논문이라는 것. 그런데 안철수가  그 논문에 대하여 기여한 내용이 모호하다는 것[그 논문을 지도했거나, 그 논문의 어느 부분을 작성했거나, 실험을 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이름을 붙일만한) 기여를 했다면, 그의 이름이 저자의 한 사람으로 끼어 들어간 것이 이공계의 관행으로  미루어 얼마간 양해가 될 수는 있을 텐데, 그것을 도통 알 수 없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더욱 해괴한 것은 그 논문에 대한 기여도를 안철수 스스로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에 알려진 바로는 지금까지 그의 연구업적은 석⋅박사논문 두 편과 세 편의 학술지 논문을 합쳐 총 다섯 편이란다. 그 세 편 가운데 바로 이 논문이 핵심연구업적으로 서울대학 당국에 제시된 모양이다. 자신의 핵심 연구업적으로 제출된 논문이 어떤 경로로 타인의 석사논문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자신이 그에 대하여 무슨 기여를 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면, 누가 그 연구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겠는가. 만에 하나 그 논문의 발행일자가 그야말로 수십 년 전이라면 혹시 기억을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들은 대개 5년 이내의 업적물 만을 임용심사 자료로 요구하고, 그 가운데 임용 신청자가 지적한 핵심 업적에 대해서만 실제 심사에 붙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5년 이내[아니 좀 더 여유를 두어 10년이라 해도 좋다!]의 연구물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면, 우리는 학자로서 안철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의 논문을 집필하기 위해 1년, 2년 혹은 수년의 실험과 검증을 거친다고 볼 때,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논문이 완성되었는지 모른다면, 애당초 연구자의 자격이 없었거나, 남의 논문에 이름만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약간 과장할 경우 최근 자신이 써낸 논문의 토씨 하나까지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학자들의 기본 생리이자 의무임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참으로 면구스런 가설이지만, 연구업적이 모자라는 안철수를 동정하여 누군가가[석사논문 작성자 자신 혹은 그의 지도교수?]‘앞으로 별 문제될 일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어떤 논문의 공동저자로 안철수를 끼어 넣어주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그는 ‘힘 하나 안 들이고’ 흡사 ‘이미 차려진 밥상 위에 수저를 올리듯’ 남의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손  쉽게 연구업적을 부풀린 것 아닌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안철수 스스로가 부탁하여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것들이 바로 항간의 식자층에서 갖고 있는 의혹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에 올라온 해당 글의 필자 강 교수는 흡사 세상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안철수가 표절을 행했다!’고 공격하는 것처럼 호도하여 세상사람들이 몰상식하고 무지몽매하다는 투로 ‘적반하장(賊反荷杖) 식’의 언설을 농(弄)한 것이다. 이른바 ‘교묘한 물 타기’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안철수 교수가 스스로 각종 콘서트나 예능프로그램, 저서 등에서 밝힌 바 있듯이, ‘연구진실성’의 문제는 한 인간인 연구자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잣대로 활용될 수 있고, 또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과연 그는 이 논문의 한 부분이라도 실제로 쓴 것일까. 원래의 석사논문과 영문번역 후의 학술지 논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에 대하여 안철수는 몇 %나 기여했는가 등은 시급히 밝혀져야 할 문제다. 사실 '논문 진실성‘의 문제는 지금 거론되고 있는 ‘다운 계약서’문제보다 오히려 크고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 쪽 캠프 인사들의 인식대로 ‘다운 계약서’는 과거에 흔하게 자행되던 관행의 문제로 칠 수 있다 해도, 활자로 찍혀 후세에 두고두고 학문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논문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고 파급력이 큰 양심과 양식의 소산(所産)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궁한 논리로 그를 변호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모두 서울대학이나 연세대학이라는 국내 굴지의 대학에서 밥을 먹고 있는 교수들이라는 사실이다. 흡사 ‘서울대학이나 연세대학 같이 훌륭한 대학의 교수들이 별 일 없다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왜 왈가왈부하느냐?’ 라고 질타하는 듯한 논조다. 실제로 강 교수의 논리 가운데는 ‘학문에 무지한 세상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불순하기까지 하다’는 투의 ‘진짜로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제1저자와 제3저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의 연구진실성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거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비교의 대상으로 끌어와 안철수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는 강 교수가 참으로 가엾기까지 하다.

과연 우리는 자기편에 대해서는 한 없이 너그럽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한 없이 엄정한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자가당착적 잣대나 비윤리적이기까지 한 현실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강 교수가 결론이랍시고 자못 ‘사자후라도 토하듯’ 자신의 글 말미에 달아놓은 언설을 참고자료1로, 황우석의 연구비리를 밝혀냈고 현재 안철수의 연구진실성 문제에 대하여 뜨거운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트 BRIC(http://bric.postech.ac.kr)
의 토론글 한 편을 참고자료2로 아래에 적어 두노니, 강호의 제현들은 몸소 읽고 판단해 보시라. 존경하는 안철수 선생은 더 이상 함량 미달의 지식인들 을 보호막으로 삼지 말고, 대중 앞에 직접 나서서 자신의 연구진실성, 아니 윤리와 도덕의 바탕인 양심의 문제를 속 시원히 해명하기 바란다. 만약 답변이 궁하다면, ‘미안하다. 다음부턴 안 그러겠으니 이번만은 너그럽게 봐주라’는 식으로라도 사과하기 바란다. 그런 다음 국민들에게 표를 요구하기 바란다.<2012. 9. 29.>
  

   참고자료 1

“또 하나의 논쟁거리는 발표된 학술지 논문에 누구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안철수 후보의 경우 이 문제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 즉 이번 논문의 제1 저자인 석사학위 논문 제출자, 그리고 지도교수로 추정되는 제3 저자 이외에 안철수 후보가 이 논문의 작성에 기여를 했는지 여부이다. 그랬다면 제2의 공저자로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안 후보가 한 일도 없이 ‘숟가락 하나 얻은 격’으로 학자들 사이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제1, 제3 저자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논문 분석 결과도 안 후보의 기여가 있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이러한 저자권(authorship)의 문제는 제3자가 평가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고,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학자들 사이의 논란 거리지 학자의 정치력을 평가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에서 유재석의 오스틴파워 풍 댄스나 노홍철의 저질 댄스가 싸이의 미국 진출에 기여한 여부를 정치부 기자가 예단해서 말할 능력이 있는가와 비슷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문의 저자에 누가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학계의 주장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현대 과학이 진행되는 일반적인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여가 필요하다. 연구 아이디어를 내고 제안하는 단계, 실제 연구와 실험을 수행하는 단계,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고 토의하는 단계, 그리고 최종적으로 논문을 작성하고 투고하여 심사를 받는 단계 등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국제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여 중 3가지 이상에 참여하면 저자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고, 따라서 제자의 학위 논문이라도 그 학위 논문이 작성되는 과정에 위와 같은 기여가 있었다면 지도교수나 관련된 다른 사람이 학술지 논문에 공동으로 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한국의 관례가 아니라 국제 학계의 윤리이다.

정치인의 개인적인 도덕성과 윤리성에 대해 꼬치꼬치 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또 이로 인해 우리 공직자의 윤리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관계나 정확한 판단에 근거하지 않은 정쟁적 비난은 정치를 혼란하게 만들 뿐이다. 또 더 나아가 학자들의 연구 활동이 위축되거나 우수한 인재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모두 도로교통법 위반이긴 하지만 음주운전을 해서 인사 사고를 낸 운전자와 새벽 4시에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슬금슬금 지나간 운전자 모두를 다 똑같은 놈이라 비난하고 같은 정도로 처벌하는 것도 공정치 못하다.

제발, 주요 일간지 정치부 기자들은 어줍잖은 술자리 얘기들로 아까운 지면을 소비하지 말고, 대선 후보자들의 정책에 대한 정확한 분석, 비판, 실현성 여부 그리고 대안 제시로 내용을 채워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정치인도 바뀌겠다고 난리인데, 이젠 언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이상의 자료문은 <http://hani.co.kr>에서 퍼옴>

 

 

참고자료 2

안철수 팀 논문(1993년)의 표절에 관하여
빈쿨룸
(2012-10-0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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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팀 논문(1993년)의 표절에 관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안철수 팀의 논문 표절에 관한 글을 올린다. 표절 대상으로 의심되는 논문은 1992년, 안철수 팀의 논문은 1993년에 발표되었다. 전자는 국문이고 후자는 영문이다. 그러나 학계(인문, 사회, 이공, 의학 모두)에서는 국문 논문이라도 영문이나 기타 외국어 초록(요약문)을 싣게 되어 있다. 필자는 인문계통 전공자인 관계로 두 논문의 본문은 비교 분석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두 논문의 영문 초록을 비교해보았다.

1. 제목

1992년 논문 - 토끼 단일 심실근 세포에서 Cyclic GMP의 Ca2+ 전류 조절기전에 관한 연구/ Modulation of Calcium Current by Cyclic GMP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s of the Rabbit.

1993년 논문 - Effect of Cyclic GMP on the Calcium Current in the Ventricular Myocytes of the Rabbit.

안철수팀의 영문 논문을 국역하자면 <토끼 심실근 세포에서 Ca2+ 전류에 대한 Cyclic GMP의 영향(효과)> 정도가 되겠다. 논문 제목만으로도 두 논문의 주제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록에서 드러나지만 안철수팀의 논문에서도 “단일” 심실근 세포를 분석한다. 두 논문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Cyclic GMP에 의한 변화과정이다. 1992년 논문은 그 변화과정을 “조절기전”(Modulation)으로 표현하고 1993년 논문은 “영향/효과”(effect)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논문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1993년의 논문이 동일한 분석대상을 통해 1992년 논문과 다른 분석결과를 제시한다면, 안철수팀의 논문은 독창적인 연구가 될 것이고 표절에 관한 모든 논란은 무지한 자들의 헛짓거리가 된다. 이 부분은 의학계 전문가들이 밝혀낼 필요성이 있다.

2. 첫 문장

1992년 논문 -

In order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intracellular cyclic GMP on the calcium channel, whole cell patch clamp technique with internal perfusion method was used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 of the rabbit.

1993년 논문 -

In order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intracellular cyclic GMP on calcium current, the whole-cell patch clamp technique with internal perfusion method was used in isolated ventricular myocyte of the rabbit.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싱크로율 98% 이상의 동일한 문장이다. 정확히 3군데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

1) on the calcium channel - on calcium current

안철수팀의 초록에서는 the를 빼고 channel 대신에 current를 넣었다. 두 단어는 다른 뜻인가? 거의 동일한 뜻이다. 사실 두 논문이 공통으로 다루는 주제가 어떤 “관”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channel도 current도 모두 “경로”, “전류”, “통로”, “관” 등으로 유사어라 할 수 있다. 혹시 표절을 피하기 위해 the를 의도적으로 뺐다면 꽤 꼼꼼한 처사라 하겠다.

2) whole cell - the whole-cell

이 부분은 별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역시 the와 - 으로 차이를 둔 것뿐이다.

3)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 - in isolated ventricular myocyte

외국어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부분은 참으로 간교한 작업으로 보인다. isolated는 무슨 뜻인가? 격리되거나 분리된 것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따로 떼어놓고 그것 하나만 본다는, 즉 “single”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오히려 the를 뺌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1992년 논문의 영문 제목 끝부분이 “in the single ventricular myocyte of the rabbit”이었음을 상기하자.

3. 두 번째 문장

1992년 논문 -

Cyclic GMP, cGMP analogues, cAMP, isopernaline and forskolin were perfused into cells and their effects on the calcium current were analysed by applying depolarizing step pulese of 10mV in amplitude for 200msec from holding potential of -40mV. (원본)

1993년 논문 -

Cyclic GMP, 8-bromo-cyclic GMP, cyclic AMP, were perfused into cells and their effects on the calcium current were analysed by applying depolarizing step pulse of 10mV in amplitude for 300msec from holding potential of -40mV.

역시 98% 싱크로율인데, 좀더 교활해보인다. 또 세 군데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

1). Cyclic GMP, cGMP analogues, cAMP, isopernaline and forskolin - Cyclic GMP, 8-bromo-cyclic GMP, cyclic AMP

1992년 논문은 더 추상적인 동시에 더 구체적인 주체를 제시한다. 더 추상적이라 함은 “cGMP analogues”, 즉 “cGMP과 유사한 것들” 혹은 “cGMP 류의 것들”로 표현하기 때문이면, 더 구체적이라 함은 “isopernaline and forskolin”을 첨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팀에서는 1993년의 추상적 표현 대신에, “cGMP”는 “Cyclic GMP”로 풀어서 표현하고 구체적으로 “8-bromo-cyclic GMP”를 덧붙였다. 그리고 1992년 논문의 “cAMP”는 “cyclic AMP”로 풀어서 표현했다.

달리 말하면, 표현들이 조금씩 다를 뿐 분석 내용은 같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2) pulese - pulse

1992년 논문의 철자 오류 pulese를 안철수팀이 pulse로 바로잡았다.

3) 200msec - 300msec

실험 수치가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수치는 동일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부디 실험 결과가 온전하게 나왔기를 바란다. 전문가들이 해결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cf. 중간에 두 논문 모두 수치를 통한 분석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이 두 논문 초록에서 차이가 나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나 "In the presence of..." 문장이 두 초록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꽤 다른 듯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마지막 문장

1992년 논문 -

From the above results it could be concluded that cGMP increases the calcium current not through cAMP dependent protein kinase nor cAMP dependent phosphodiesterase pathway, but through independent phosphorylation pathway, possibly cGMP dependent protein kinase pathway.

1993년 논문 -

From the above results it could be concluded that intracellular perfusion with cyclic GMP increases the basal calcium current via a mechanism involving a cyclic GMP dependent protein kinase.

언뜻 보면 두 문장이 꽤 달라 보이지만, 사실 거의 흡사하다. 역시 3부분으로 나눠서 고찰해보자.

1) cGMP - intracellular perfusion with cyclic GMP

1993년 논문은 cGMP를 cyclic GMP로 표현하고 “intracellular perfusion”를 첨가함으로써 주어가 바뀐 듯한 문장을 만들었으나, 사실 연구 내용상 “intracellular perfusion”은 덧붙여도 삭제해도 마찬가지 의미의 문장이 될 것이다.

2) the calcium current - the basal calcium current

1993년 논문은 “basal”(기본적인)을 첨가했는데, 당연히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3) not through .... but through - via a mechanism

이런 부분을 보면 필자 또한 학자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외국어에 다소 무지한 이들을 완전히 무시하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1992년 논문에서는 친절하게 “... 이러한 점을 통해서 ..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저러한 점을 통해서 증가한다”라고 설명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1993년 논문은 증가의 이유가 아닌 부분은 필요 없어 보였는지, “via a mechanism”, 즉 “~ 저러한 과정(기제)을 통해”서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물론 두 논문은 증가의 이유가 동일하다고 결론 내린다. 단지 1992년 논문이 “cGMP dependent protein kinase pathway”라고 표현한 것을 1993년 논문은 “a cyclic GMP dependent protein kinase”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섬세하게 a를 첨가했고, 역시 “cGMP”는 “cyclic GMP”로 풀어서 표기했으며,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pathway”(통로)는 단호하게 삭제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했다.

4. 결론

두 논문의 영문 초록만을 보았을 때 1993년 논문이 1992년 논문을 표절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혹시나 1993년 논문이 다른 분석 결과를 내놓기 위해 동일한 분석 대상을 연구했다면 모르겠으나, 초록의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고려해볼 때 그 가능성은 없다. 본문의 표절 여부는 의학계의 전문가들이 판단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 BRIC(http://bric.postech.ac.kr)>

참고자료 3

표절과 무임승차, 그리고 학자로서의 양식의 문제.
[일반인] 금빛노을
(2012-10-06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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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후보의 박사학위논문의 표절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다. 이 사안이 MBC에서 보도된 뒤, 서울대의 조국교수는 “(학계 규칙을) 모르고 안철수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고, 알고도 했다면 악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안철수후보 역시 2008년 8월 한 인터넷 매체 인터뷰에서 “표절에 대한 관대한 문화 역시 걸림돌이다. 학생들조차 표절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화 속에서 지식 산업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고 발언한 바 있다. 따라서 안철수후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조국교수처럼 표절시비에 대해 ‘무식’하고 ‘악의적’이라는 식으로 세치혀의 칼날을 휘두르기보다는 냉정하게 표절논란의 옳고그름을 가리는 것이 필요하다.

총선을 전후해서 문대성의원의 논문표절이 문제되었을 때, 조국교수는 <'참고문헌 빼고 72쪽 논문 중 9쪽(전체의 12%)을 따옴표 없이 출처도 명기하지 않은 ‘오타’까지 베꼈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MBC에서 지적한 것도 <따옴표 없이 출처도 명기하지 않고’ ‘오타’까지 베꼈다>는 것 아닌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문대성의원을 대상으로 지적하면 정의롭고 안철수후보를 대상으로 지적하면 무식하고 악의적이 되는가? 필요에 따라 임의로 잣대를 들이대거나 들이댄 잣대를 빼앗는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석사학위논문을 수정하고 다듬어서 관련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분명 학계의 관행이다. 하지만 관행도 관행나름이다. 석사학위논문을 다듬어서 관련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대개 연구쪽으로 진로를 정한 사람이 박사과정 진학을 전후해서 하는 것이지, 문제가 된 논문의 제1저자인 김규현처럼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이 그것도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한 지 5년이 지나서 영역한 것 외에는 거의 수정없이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김규현과 안철수후보는 1988년에 서울의대 생리학교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안철수후보는 석사를 받은 직후 박사과정에 진학해서 단국대 의대교수로 채용이 되었으니 당연히 석사학위논문을 다듬어서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이 조국교수가 말한 ‘학계의 관행’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자신의 석사논문을 학술지에 싣지 않아도 무방했을 김규현은 석사학위 취득 후 5년이 지난 1993년에 학술지에 학위논문을 재수록하였고, 서울의대에서 조교도 지내고 단국대 의대 교수로서 학과장까지 했으니 마땅히 ‘학계의 규칙’을 따랐어야 할 안철수후보는 자신의 석사학위논문을 학술지에 싣는 대신 석사동기의 재수록논문에 제2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안철수후보가 석사동기의 논문에 제2저자로 슬쩍 이름을 올린 이 논문을 학회지에 게재된 지 18년이나 지난 2011년에, 그것도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임용서류에 주요연구업적으로 실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를 공채할 때에는 응당 제출된 논문의 전공일치 여부를 심사한다. 그리고 연구업적은 대개의 경우, 석박사학위와 최근 5년간의 논문실적을 서류에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안철수후보는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임용서류에 5편의 주요연구업적을 기재했는데, 석박사논문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이 모두 1993년에 작성된 논문이었고 문제가 된 김규현의 논문은 이 3편의 논문 가운데 한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안철수후보가 제3저자로 된 논문인데, 이 논문은 부산의 모 의대교수가 자신이 1993년 2월에 쓴 석사학위논문을 가필하고 안철수후보를 포함한 총 7명을 공저자로 하여 대한생리학회에 실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편이 역시 1993년에 대한의학협회지에 <의료인의 컴퓨터 활용범위>라는 제목으로 쓴 안철수 자신의 논문이다. 이들 논문은 모두 안철수후보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임용되기 위해 제출한 서류에 주요연구업적으로 기재되었고,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임용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들 논문에 대한 검증은 대한민국 대통령후보로서의 안철수에 대한 후보검증 이전에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대학교의 교수공채시스템에 대한 공정성과 절차적 적법성을 가리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다.

안철수후보는 2011년에 서울대학교에 제출하는 서류에 왜 하필이면 1993년에 작성된 논문들을 주요연구업적으로 기재했던 것일까? 그리고 안철수후보는 왜 1993년에 동기와 후배의 논문에 제2저자, 제3저자로 이름을 올린 것일까? 1993년 이후에 전문학술지에 실은 논문이 없어서라면 ‘석좌교수’나 ‘대학원장’으로 불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993년에 작성된 3편의 논문이 해당 학과나 해당 대학원과 무관한 논문이라면 굳이 이를 서류에 올릴 필요도 없는 것이고, 서류에 이를 올리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논문에 대한 논란은 안철수후보 자신이 자초한 것이므로, 이들 논문에 대해 논란을 ‘무식’이니 ‘악의적’이니 하고 비난하는 조국교수의 발언이 오히려 무식하고 악의적인 것이다.

안철수후보가 자신의 이름을 동료와 후배의 논문에 제2저자, 제3저자로 끼워넣은 1993년 당시는 '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의 표현에 따르면 ‘커다란 공백기’였고 ‘의학연구를 할 수 없는’ ‘엄청난 고문’같은 시절인 군의관 복무시절이었다. 안철수후보는 39개월의 군복무기간을 ‘공백기’라고 하였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993년부터 2년동안은 서울의 연구소에 배치되어 집에서 출퇴근했다고 한다. 그의 말과 달리, 어느 정도는 공부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었을 법하다. 그런데 안철수후보는 의학공부 대신 컴퓨터바이러스백신 개발에 몰두해 있었다. 그 연구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컴퓨터바이러스백신 개발에 몰두했던 그가 그래도 제2저자, 제3저자로 의학학술논문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생리학관련 연구소에 근무했었을 듯하다. 그래서 팀원의 일원으로 이름이 올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역 이후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연구실적이 필요해서 동료와 후배의 논문에 슬쩍 이름을 끼워넣었을 수도 있을 듯하다.

어쨌든 이들 논문에 대한 심사를 거쳐 바로 1년전인 2011년에 안철수후보가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란 직함이 그가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데 있어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학위논문을 포함하여 5편의 논문에 대해 표절이든 무임승차든 논란이 생긴 부분에 대해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동안 교수출신의 유명인들이 장관등의 고위직 후보로 내정되어 인사청문회를 할 때마다 ‘자기표절’이니 ‘이중게재’니 하고 온갖 독설을 퍼붓던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가 엇갈린다고 해서 안철수후보의 석박사 학위논문과 여타 학술논문에 대한 표절시비와 무임승차논란이 확산된다고 해서 이를 ‘정치적 의도’라는 말로 차단막을 치고 ‘무식’이니 ‘악의적’이니 하는 막말로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정치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모든 칭찬과 비판은 당연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인 논란을 학문적으로 밝히는 것이 바로 이곳 브릭에서 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1. 8. 11:17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강의·연구로 학문분야 두축 이끌어… 이젠 국가·사회가 처우개선 나서야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신자유주의가 삶의 원리로 자리 잡을수록 사회의 소외지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능의 열쇠'라도 되는 듯 경쟁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쟁에서 도태되는 다수 구성원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비정함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경쟁의 필수 전제조건이라 할 '공정함'의 결여에 대하여 애써 눈 감고 있는 의식의 원시성은 언필칭 '선진국 진입'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 건'일 수밖에 없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기 시작한 대학 시간강사 문제는 소외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약점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매주 정해진 시간만 강의하고 일정액수의 시간당 강의료를 받는, 전임 교수 아닌 지식인들이 바로 시간강사다.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들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들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새벽의 노동시장에서 선택되지 않으면 그날 하루 일당을 벌 수 없듯이, 강사들은 학기 초에 대학 혹은 학과로부터 선택되지 않으면 그 학기의 수입은 없다. 하루와 한 학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일용직 근로자와 강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삶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듯이 학기 단위로 살림을 꾸려나갈 강사들의 삶 또한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형식 논리로 친다면야 그런 말도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자체가 정책의 오류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적절한 방안만 강구하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라면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대학이나 지식사회 혹은 학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은 국가의 학문정책에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정부가 그런 학문정책을 세우기 위해 선진국 대학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해 왔다면 그런 나라들이 강사들에 대하여 어떤 처우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를 포함한 국가의 인재들을 세밀히 관리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문진작'이란 명분으로 쏟아부은 천문학적 재원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가, 그런 정책들은 과연 그렇게 다급했으며 합목적적이었는지 등을 돌이켜 본다면, 그런 일들이 '강사들의 현안해결'보다 우선적인 것이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학문정책의 중요도나 시급성에서 선후관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처가 곪아 터져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지금에서야 겨우 대책을 내놓는 관련부서의 무심함이 답답할 뿐이다. 현실로 닥친 생활고와 암담한 미래 때문에 목숨을 끊는 강사들이 속출하고, 3년이 넘도록 천막 속에서 농성하는 강사를 보고 나서야 이 땅의 교육 당국은 겨우 움직이는 시늉 정도를 보여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책 또한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니, 더욱 답답하다.

 

강사는 누구인가. 대학, 대학원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마해온 해당 분야의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들이면서, 지금까지 그들은 전문성이나 실력보다는 '시간강사'라는 '품위 없는 용어'로 통칭되기 일쑤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전임교수들이 강사를 거친 사람들이며, 현재의 강사들은 전임교수로 대학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쉽게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선배들이 그래 왔듯이 조금만 고생하면 전임의 대열에 합류할 것 아닌가'라는 속 편한 계산으로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요구를 철저히 뒷전으로 미루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40%에 육박하는 대학 강의를 이들이 맡고 있으며, 모든 학회들에 집행부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여 학회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이들이 맡고 있다. 강의와 연구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두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기약도 없는 '교수사회에 진입할 날'을 무작정 기다리며 참고 있으라는 말만 건넬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늦기 전에 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9. 10:29
지식인의 한탕주의, 그리고 금단의 열매

                                                                                                               조규익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자산, 그 가운데 핵심은 지식이다. 인터넷 만능시대인 요즈음은 흔히 지식 대신 정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러나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이 둘을 혼동하는, 무늬만의 지식인들이 대명천지를 활보하는 현실은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해체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앎’의 윤리성에 대한 몰각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다.

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진실과 양심만이 앎의 본질임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 공자의 본의였다. 이 선언이야말로 허위의식 속에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뼈아프게 새겨야 할 금언이다. 지식인의 정직성에 중점을 둔 공자의 생각으로부터 오늘날 자행되는 표절의 비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지식의 양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것은 사회를 다원화•세분화시켰다. 그에 따라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그룹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요즈음이다. 인쇄나 방송 등 각종 매체가 범람하고, 그런 매체들을 기반으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대중의 기호나 매체의 활용 여하에 따라 지식인의 시장가치가 결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장가치의 고하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고, 그것이 금전으로 직결되는 현실이다. 상품의 질보다는 광고술이 판매량을 좌우하는 시대에 지식인들 또한 자신을 실물보다 더 낫게 치장하여 시장에 내보이려는 욕구의 포로가 되고 있다.

대중은 지식인의 내면적 가치나 덕성을 찬찬히 살피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좀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인을 찾아 자신의 ‘코드를 맞추고’, 그의 말과 글을 아낌없이 사들인다. 대중의 코드에 영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지식인은 고민한다. ‘안 걸리게 잘 치고 빠짐으로써’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손쉽게 빠져드는 것이 표절의 유혹이다. 이른바 지식인의 ‘한탕주의’가 표절이란 행위로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한 두 번의 표절이 쉽사리 발각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사들이는 지식의 원산지나 생산자를 꼼꼼히 챙겨보지 않는 대중의 문제적 성향 탓이다. 이런 이유로 표절은 반복되고, 반복되다보면 결국 발각될 수밖에 없다. 구멍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훔쳐도 ‘절도죄’라는 살벌한 죄명으로 벌을 받는 현실이다. 단순히 돈으로만 따져도 표절은 일반 절도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 나쁜 절도행위인데, 표절범들이 거리낌 없이 이 사회를 활보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실 우리 모두 표절에 관한한 공범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절범이나 우리가 ‘오십 보 백 보’의 공범들이라면, 새삼 누가 누굴 징치할 수 있겠는가.

작년 언젠가 일본 후지TV가 프로그램 표절 의혹 건으로 국내의 어느 방송사에게 항의한 사실과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우리나라 젊은 과학도의 논문 표절사건을 상기해 보라. 지난 시절 국내 방송사들이 일본 방송 프로그램들을 베껴온 사실은 왕왕 거론되어 왔지만, 대명천지 21세기에 이르도록 그런 ‘못된 관행’을 청산하지 못했다니! 사실이든 아니든 과거 ‘베껴먹기의 원조’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의이고 보면 참으로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80여편의 논문을 실은 젊은 과학도의 표절행위 또한 우리 학계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국제적 범죄다.

자고나면 불거지는 가수들의 표절, 이름 있는 학자들의 표절, 공모전 입상자의 표절 등 우리는 표절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사실 표절 아닌 것을 찾아내는 일이 쉬울 정도로 표절이 일상화 되고, 그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뒤져 남의 글을 듬뿍듬뿍 퍼다가 ‘짜깁기’한 것을 논문이나 리포트로 제출하고 좋은 학점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강의 시간중에 제출하는 리포트의 표절의혹을 가리는 일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고, 이젠 각종 학위논문의 표절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참고문헌들과 논문의 본문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제나 논지의 타당성, 문장의 정확성 등은 이제 더 이상 1차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문장이 눈에 띄게 미끈하면 ‘이거 어디서 베껴온 것이나 아닌가’를 의심해야 하는 실정이다. 서툰 문장, 어설픈 논지가 오히려 반갑게 생각되는 것은 그것들과 참고문헌들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표절의 원본으로 삼고 있는 인터넷 속의 텍스트는 과연 온전한가. 그것들 역시 상당 부분은 표절의 수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니, 어느 텍스트를 원본으로 인정해야할지 난감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우리를 ‘표절 불감증’으로 몰아 넣었을까. 바로 사회에 만연한 ‘결과 지상주의’ 때문이다. 과정의 정당성 여부보다는 결과물의 수량만이 유일한 평가의 척도로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논문의 편수가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의 절대적 조건인 상황에서 문장을 따오든 아이디어를 베끼든 표절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청률만으로 성패를 가름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TV라도 표절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끈한 문장과 번지르르한 장정만을 보고 학점을 주는 상황에서 인터넷 속의 글을 짜깁기하여 리포트로 제출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한 것은 표절행위가 입증된 경우에도 그 뒤처리가 유야무야된다는 점이다. ‘그저 운이 나빠 걸렸을 뿐’이라는 판단은 우리 사회에 표절행위가 만연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생각이다. 모두 표절의 혐의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공범의식의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비록 표절을 당한 사람이라 한들 그 사실을 선뜻 공개할 수 없다. 모두 베껴먹고 사는 사회에서 그런 사실을 공개하는 일이야말로 좀스럽고 치사하지 않으냐는 비아냥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주저앉느냐 한 단계 도약하느냐는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에 달려 있다.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창조적 작업이나 결실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상품을 내놓기가 무섭게 표절된다면, 누가 영혼을 불사르는 창조적 작업에 나설 것인가. 국민들의 창조적 열기가 식어버리면 산업이나 과학의 발전은 그 순간에 멈추어 버린다. 정부가 2만불 시대를 고창하고 있지만, 표절문제에 미온적인 한 1만 불의 현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표절을 중죄로 다스리기 위해 법을 보완하고, 감시 기구의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범국민적인 양심 회복 운동이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다해도 국민 각자가 마음을 바로 먹지 않는 한 표절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한 번 빠져버린 표절의 함정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절은 금단의 열매인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