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05.23 19:52

하회 별신굿 탈놀이 다섯째 마당의 파계승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초가들

 

하회마을 초가들 사이의 골목길

 

하회마을에서 만난 장독들

 

병산서원에서 숭실국문 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집행부 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과

 

병산서원에서 임채훈 교수, 엄경희 교수, 소신애 교수 등과

 

 

학술답사 후기

-학술답사인가?-

 

                                                                                                                  조규익(숭실대 교수)

 

내 학창 시절 은사 한 분은 늘 논문은 발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논문을 발로 써라? 처음엔 그 말씀이 몹시 낯설었다. 당시 엉망진창인 번역을 발 번역이라 부르던 나였지만, ‘발 논문이란 조어(造語)의 진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들고 공부가 좀 익어지면서 깨달았다. 자료를 찾아 발로 뛰는학자가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일까. 팔도 어디든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의 소장 자()를 찾아다니는 일이 연구 작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꽤 된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논문들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큰 실수 없이 어쭙잖은 글들이나마 엮어 낼 수 있는 건 전적으로 그 때 익힌 현장 중시의 습관 덕분이리라.

 

국어국문학의 현장은 우리 전통사회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그런 공간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어느 마을 논두렁이나 밭두렁에만 가도 생생한 자료제공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이 방언이었고, 힘들거나 즐거울 때 질러내는 소리들이 민요였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아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둔 이야기들은 좀 많았나. 그런 걸 찾으러 틈나는 대로 방방곡곡 누비고 다니며 국어국문학도들은 자긍심을 지닐 수 있었다. 사라지는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글자로 잡아놓고 분석하여,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민족문화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이제, 세월은 마구 변하여 외견상 전통사회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국어국문학도들의 임무나 사명을 고도로 세련시켜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변화는 잔존(殘存)을 전제로 하는 개념일 뿐 사라짐이 아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찾는 일을 포기할 순 없다. 변화의 근거들이야 하다못해 DNA에라도 남아있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집요함은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최종병기. 문학이나 언어의 생산자이자 사용자인 사람들을 만나 보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을 키워 낸 자연과 문화적역사적 잔존물들을 현장에서느껴보지 못한다면, 강의실에서 펼쳐지는 담론들의 공허함을 무슨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오.

 

우리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관광여행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 것도 답사지역이 우리의 또 다른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그곳 인물들의 문학을 찾고, 무형 문화재의 뿌리를 가늠하며, 숨은 역사를 캐는 일은 이 시대의 국어국문학도에게 부여된 사명이자 특권이다. 2018년도 숭실 국문인들이 그 사명과 특권을 오롯이 수행하고 누릴 수 있도록 지역선정-계획 수립-사전답사-자료집 준비등으로 학생회장 김태호를 비롯한 집행부원들이 진한 땀을 흘렸다. 그 덕에 멋진 자료집이 나왔고, 모두 참여하여 현장 공부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제 우리 모두 귀한 공부여행에 적극 동참하여 하나라도 더 얻어오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

 

위 글은 2018학년도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답사 자료집에 실은 나의 인사말이다. 나는 교수 초년병 시절부터 몇 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술답사에 참여하여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 해왔다. 그동안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학술답사의 양상도 많이 바뀌어 이젠 일반인들의 여행과 구분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역과 방문 대상이 역사나 전통문화로 한정되고 강의실 교육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나 국문과의 학술답사는 일반인들의 관광여행과 구분될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적과 테마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만큼 일반인들의 관광여행도 많이 세련되었다. 오히려 문화답사 동호인들끼리의 여행일 경우 대학의 학술답사보다 더 전문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일반인들의 안목이나 교양 수준은 많이 높아진 반면, 대학 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대중화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앞 시대엔 전문인들이나 예비전문인들이 주로 수행하던 학술답사가 이젠 교양의 심화나 지적인 욕구의 충족을 지향하는 일반인들의 문화관광 여행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대학 내에서 학술답사는 국어국문학과의 고유활동으로 굳어지다시피 했다. 그 분야의 교수 로 30년 넘게 재직해오면서 깨달은 시대의 변화는 매우 크고 의미심장하다. 인터넷의 무한한 확장, 기계화를 통한 전통사회의 변화, 교통통신의 발달을 통한 전국의 1일 생활권화 등으로 현장 조사나 학습의 중요도가 많이 저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와 전통의 맥이 살아있는 현장을 둘러 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신나는 일이다.

 

올해는 안동지역을 답사 대상으로 잡았다. 첫날(517)은 하회마을에 도착,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함께 관람한 뒤 하회마을의 정취를 음미하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들렀으며, 풍산읍에 있는 안동 펜션 & 게스트에서 1박을 했다. 다음 날은 분과에 따라 고전문학학회와 민속문화학회는 가송리 농암종택(聾巖宗宅)을 방문한 뒤 한국국학진흥원 및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 현대문학회는 권정생 동화마을과 이육사문학관 및 농암종택에 각각 들렀으며, 언어학회는 가구1리 마을회관에서 방언을 채록하고 영호루와 안동 문화의 거리를 답사했다. 셋째 날에는 전원이 함께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들러 서원문화를 체험한 뒤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

 

방대한 이 지역의 문화와 정신을 받아들이기에 23일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에서 작지만 어떤 변화의 조짐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물론 학생들 각자의 내면적 수준이나 성향에 따라 감수(感受)한 것들은 달랐으리라. 어쨌든 늘 복잡한 도심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함께 한국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는 안동에 찾아가 선비문화를 체득한 것은 이들의 삶에 큰 정신적 자산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나는 답사 기간 내내 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지역의 사림문화(士林文化)를 제대로 볼 것을 학생들에게 주문했다. 농암종택 안 쪽에 위치한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입교당(立敎堂)에 학생들을 앉히고 농암 선생의 풍류와 자연 친화의 삶을 강의했고, 도산서원의 전교당(典敎堂)에서는 퇴계 선생의 시가와 도학적 세계관을 강의했다. 병산서원, 도산서원, 농암종택, 소수서원 모두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심성 수양의 공간이었음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분들이 추구한 도()자연 속에서 읽어낸 불변의 길이라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늘이 천성으로 부여한 생태의식이 바로 도학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주어진 세상의 삶을 마치고 뛰어난 생태 공간인 안동의 땅에 스며든 위대한 스승들. 일찍이 퇴계 선생은 <도산십이곡>의 제9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뵈

고인(古人)을 못 뵈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 할꼬

 

그렇다. 신재(愼齋), 농암(聾巖), 퇴계(退溪) 등 우리 스승들의 걸어가신 길을 뒤쫓아 가면 잘못 될 일 없을 터인즉, 이제라도 따라가 보자. 학생들을 지도하겠노라 나선 길이었으나, 나 스스로 배움만 가득 안고 온 23일의 학술답사였다.

 

농암종택에 들어서며

 

농암종택 안쪽의 넓고 안온한 풍경

 

농암종택의 분강서원

 

분강서원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

 

멀리서 잡은 농암종택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안동 박실에서 구미 일선리로 이건한 삼가정의 현판

 

퇴계 선생에게 내린 교지

 

도산서원의 안온한 모습

 

도산서원 전교당 앞에서

 

도산서원 전교당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며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순흥의 죽계루 앞에서

 

근재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 현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학술답사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05.04 17:23

 

투표권 '자가 박탈'의 변  

 

 

 

목하 대통령 선거운동이 진행 중이다. 며칠 남지 않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번에 나는 내 투표권을 스스로 박탈하기로 했고, 아내가 내 판단과 결정의 증인이 되기로 했다. 성년 이후 대통령 선거를 위한 투표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결과가 만족스러운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설사 당선되었다 해도 그 직책을 만족스럽게 수행하는 대통령이 없었다. 최근의 탄핵사건은 그 비극의 정점이었다. 그러니 투표장에서 붓 뚜껑을 들었던 내 손과 그 손을 움직인 내 판단력이나 탓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번엔 스스로에게 한시적 공민권 박탈의 실형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참 후보들에게 불만이 많다. 대통령이란 분명 도덕군자도, 박식한 학자도, 순발력 뛰어난 전장의 장수도, 능숙한 행정가도, 출중한 장사꾼도, 말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웅변가도, 글 솜씨로 사람을 움직이는 문필가도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이 모든 것을 합친 능력자를 대통령으로 뽑길 원한다. 나보다 나은 인격과 능력을 갖춘 인물을 뽑고 싶어 한다. 그런 인간만이 우리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기준이 뒤죽박죽으로 뒤엉겨 그냥 아무나뽑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하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 매일매일 어안이 벙벙해 하는어떤 나라처럼 되는 것 아닌가.

 

후보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행적을 뒤져보라. 얼마나 구린 구석들이 많은가. 뻔한 질문에 답변이 궁색하여 진땀 흘리는 모습들을 보라. 거칠 것 없는 나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가. 둔사(遁辭)를 농하며 상대가 파놓은 덫을 빠져 나가려는 가련한 몸짓들을 보라. 아무도 무언가를 추궁하지 않는 달달보살인 나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가.

 

그들도 대통령(후보)이란 허울을 벗겨 놓으면지극히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진실은 바로 거기에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하고자 하는 결기(決氣)만 있다면, 대통령으로서 충분하다. 내가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나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나서 나누는 정담(政談)’은 정치인 누구 못지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 후보들의 도덕과 상식 수준보다 이들이 훨씬 우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친구들 중의 하나에게 대통령의 허울을 씌워서 청와대에 들여보내는 상상 유희를 즐기곤 한다. 그들 중의 누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아도 탄핵으로 쫓겨난 그녀나 지금 그 대통령직을 차지하기 위해 부나방처럼 달려든 15명보다야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이번에도 어느 사기꾼이 대통령으로 뽑히나’, ‘국민을 얼마나 괴롭게 할 것인가라는 불안감 때문에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는 속담만 원망스러울 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9.15 23:34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몇 년이나 지났을까.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가 친구의 사무실에 들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가 마무리 멘트로 던진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일 내로 쓴물이나 한 잔 허세!”

 

쓴물이라? 잠시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커피를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무릎을 쳤다. 그 날부터 아침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그가 깨우쳐 준 쓴 물의 다의성(多義性)과 함축성을 곱씹기 시작했다. 최근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우리네 막대커피의 우수성(?)을 서양인들도 인정하기 시작했다지만, 사실 커피의 매력은 쓴 맛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양동이만한 커피 잔을 안고 다니는 게 일종의 패션처럼 되어 있다. 대부분 나로선 이름도 외우기 힘든 달달한 커피 일색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친구들, 쓴물의 철학적 원리나 약리(藥理)를 알 리가 없다.

 

공자는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좋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良藥苦於口而利於病이요. 忠言逆於耳而利於行)"고 말씀하셨다. 내 경험상 익모초 달인 물을 비롯, 전통사회의 약들은 으레 몸서리쳐질 정도로 쓴 것들뿐이었다. 현대인들의 병 가운데 상당수가 당분의 과다섭취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요즘 대부분의 약은 달콤한 설탕을 겉에 바른 당의정(糖衣錠)’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쓴 약은 먹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인간의 본능적 기호(嗜好)를 역으로 잘 보여주는 경우 아닌가.

 

쓴물과 비슷한 표현에 쓴잔이 있고, 그것을 한자어 고배(苦杯)’로 쓴다. 어떤 시도가 실패할 경우 고배를 마셨다고들 한다. 그러나 쓴물혹은 쓴잔고배가 항상 같은 의미범주인 것은 아니다. 인류사 최고의 극적인 쓴물은 성서에서 발견된다. <<신약성서>>마태복음26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은 그야말로 지극한 의미의 쓴잔이다.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신 예수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에서 당하신 온갖 모욕과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말 속의 쓴잔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경우의 은 패배의 그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적 고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쓴맛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성어도 있다.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을 다투던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에 관한 고사다. 치고받고 싸워오던 과정에서 위기를 모면한 월왕 구천이 다시 월나라로 돌아와 곁에 쓸개를 놔두고 항상 그 쓴맛을 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상기하다가 결국 패권을 차지했다는 것이니, 쓴맛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약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승리의 환희보다 패배의 고통을 훨씬 자주 경험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패배의 고통을 겪지 않은 승리는 큰 의미가 없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입장에서 보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들의 삶도 알고 보면 성공과 실패’(혹은 승리와 패배’)가 반반, 아니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남의 성공만 볼 뿐, 실패는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실패 속에 고심참담하던 그들의 모습은 아예 보려하지 않는다. 남의 화려한 성공만을 보고 부러워하는 게 장삼이사들의 보편적인 심성이기 때문이다.

 

쓴물이나 한 잔 허세!”

내 친구의 허허로운 이 말 속에는, 성공을 소망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살고자하는 장삼이사의 철학이 들어있다. 툭하면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그들, 아니 우리들. 늘 실패를 맛보면서도 내일은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우리네 필부필부들은 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새로운 도전의 결기를 다지는 게 아닌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1.13 12:11

 

가짜 영웅 전성시대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있다.

()에 포위된 조()나라 왕이 합종을 위해 초()나라 왕에게 평원군을 파견했을 때였다.

평원군은 모사와 책사들로 20명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마지막 한 명이 모자랐다. 그 때 식객 중 모수란 자가 스스로 나섰고, 결국 그가 일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이다. 처음 모수의 정체와 능력을 의심한 평원군과 모수 사이에 오간 대화가 바로 낭중지추(囊中之錐)’. 대저 어진 사람이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는 법인데, 식객으로 있던 3년 간 모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평원군의 물음이었고, 그동안은 주머니 밖에 있었으니 이제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응수한 것이 모수의 답변이었다. 그래서 결국 모수는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어려울 때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한다는좋은 뜻으로 쓰여온 것이 '모수자천'이란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스스로 나서려 한다는 부정적인 말로 쓰이고 있다.

 

***

 

너도 나도 민의를 받들어 나라를 경영해보겠노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모수자천식으로 등장한 인물들의 병아리 셈법이 참말 가관이다. 땅 덩어리 크기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는 미국 텍사스 주의 7분의 1, 캘리포니아 주의 4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에 서너 명의 고만고만한 인물들(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니 새삼 나까지 손목 아프게 이들의 실명을 이곳에 기록할 필요는 없으리라)이 등장하여 돌아다니는 모습을 날마다 보고 있노라면, 기가 찰뿐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건 원대한 포부나 숭고한 뜻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당장 국민의 눈을 호려보자는 고식지계(姑息之計)’가 전부인 듯하다. 누구의 말대로 현대판 천명(天命)’이라 할 수 있는 민의(民意)를 왜곡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참칭(僭稱)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시대를 읽는 눈이나 천하 질서의 재편을 노리는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하다못해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의 아픔을 읽는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배들의 아첨과 계략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골목대장에 지나지 못하는 존재들이 바로 이들 아닌가.

 

***

 

제갈량(諸葛亮)은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자신의 주군인 유비로 하여금 그 한 나라를 차지하게 했다. 이른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그것이다.[각주:1] 그도 궁극적으로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노렸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터. 천시(天時)를 타고 난 조조, 지리(地利)를 차지한 손권과 달리 유비는 인화(人和)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 제갈량의 생각이었다. 영웅이 되려면 천하를 호령할만한 권능을 지녀야 하고, 책사가 되려면 모름지기 주군의 장점을 꿰뚫어 보는 제갈량의 안목과 배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착안과 전략은 대국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실천은 작은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백성들은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세계는 국익에 따라 혼란스럽게 요동치는데, 눈앞의 식어가는 잿밥에만 눈이 먼 술사(術士)들이 자신들의 암매한 주군을 모시고 조막만한 권력을 차지하겠노라 동분서주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이번에야말로 천명이 자신들의 주군에 내려졌다고 믿는 것일까. 세속적 욕심 그득한 평원의 필부들을 영웅으로 둔갑시켜 내세운 채 만인의 눈을 속이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영웅이란 말인가. 바야흐로 가짜 영웅들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이 소극(笑劇)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제갈량

 

 

 


유비

 

  1. 혹자는 필자가 이곳에 언급한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안철수의 신당 창당과 결부시키려 할지도 모르나, 단언컨대 그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새 글에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1.03 07:45

악마들과의 동거

 

 

어린이집 아가 폭행사건을 보며 악마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작은 천사들이 모여 꼬물대는 어린이집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었다. 악마의 손에 나가떨어지는 아가를 보며, 지옥의 악마 하나가 운 좋게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 올라가 악마 본연의 모습을 과시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얼마 전에 만난 ‘11세 소녀 감금학대 사건은 새삼 우리의 눈을 의심케 했다. 아버지가 방어능력 없는 어린 딸에게 가했다는 폭행과 학대는 엽기적이었다.

 

노인 학대와 살해의 주범은 자식들, 그것도 재산을 받을 만큼 받은 자식들이라는 것은 이미 천하공지의 사실이다. 죽인 애인의 시신을 토막 내어 호수에 버린 악마도, 남편을 플라스틱 통에 집어넣어 집안에 처박아 둔 악마도, 학생의 탈을 쓰고 떼로 몰려나가 교탁의 선생을 폭행하는 악마들도 보게 되었다.

언론의 눈에 잡힌 몇몇 사건들이 세상을 흔들어놓고 있던 와중에도 폭행과 살인을 일삼는 악마들은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다.

 

악마 바이러스는 이미 세상에 퍼져 쉼 없이 자기 복제를 반복하고 있다. 갈수록 수법과 결과가 참혹하고 참담하다. 악마 바이러스들 가운데 돌연변이의 사이클로 들어가 변종 악마들로 재생되는 비중이 상당하다. 준동하는 악마들의 행태들. 그 모습들을 그려내기에 우리는 상상력의 빈곤을 절감한다.

 

세상 법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법을 집행한다는 사람들의 자질 부족 때문일까. 사람을 죽이고도 3~5년 징역형을 받았는데, 언론에선 중형이라 떠든다. ‘5년 동안 공짜로 주는 밥 얻어먹어가며 조용히 살다 나오는 것살인의 죗값으로 충분하다는 걸까. 같은 시공간에 살면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법조인들의 저울추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상식이 그토록 다를 수 있을까. 사람의 목숨 값을 이토록 헐하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

 

기원전 4~3세기에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불인지심(不仁之心)을 말한 맹자(孟子)가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짊의 극치라 했고, ‘차마 끔찍하게 할 수 없는마음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착한 존재라 했다. 그가 살던 시절에도 악마가 들끓었음은 그의 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찌 그 때라고 지금과 달랐으랴. ‘차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인간들도 넘쳐 났으리라. 공자와 맹자가 인류의 도덕선생으로 좌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 이미 악마들이 준동하고 있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과연 맹자는 인간에 대하여 푸진 꿈을 갖고 있던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 그 시절 그나마 그런 희망이라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악마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못 견뎌 했을 현실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본래 착한 존재임을 강조하여 천하가 예()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일이야말로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하는 나야말로 극도의 비관주의자, 혹은 염세주의자인가.

너도 나도 어느 순간 악마로 돌변할 수 있는 인자(因子)들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잠재적 악마가 바로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는 게 차라리 현명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맹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12.31 13:26

               

轍鮒之急

飽食煖衣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는 보도가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것. 즉 거짓으로 윗사람과 주변사람들을 농락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일에 대하여 딱히 반론을 제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저도 이 달 초 같은 신문으로부터 올해를 대표할만한 사자성어 두 건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은바 있습니다. 당시 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한 해의 영상을 뒤로 빠르게 돌려보았습니다. ‘지록위마’가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건 너무 싱거운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우리네가 ‘지록위마’의 거짓과 비리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있었던가요. 특히 지도층의 가식과 위선, 혹은 ‘갑질’의 행태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나 본 적이 있었나요. 지금까지, 아니 지금부터 앞으로 언제까지나 ‘지록위마’의 상황을 그러려니 여기며 살아가는 게 속 편한 것이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팔자가 아닌가요. ‘지록위마’가 새삼 올해만의 사자성어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철부지급(轍鮒之急)’과 ‘포식난의(飽食煖衣)’ 등 두 가지 성어를 추천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적실하게 나타낸 말이라고 본 것입니다.

 

‘수레바퀴(자국) 속의 붕어’ 즉 ‘생존을 위해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할 뿐 장강대하(長江大河)의 물은 먼 훗날에나 필요하다’는 것이 ‘철부지급’의 뜻이고, ‘생활고로 죽어가는 서민들을 살려내는 것이 시급한데,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만 바라보고 있다’는 현실 비판이 그 말의 속뜻입니다. 당장 한 줌의 곡식이 없어 죽어가는 서민들을 바라보며 ‘100년 대계(大計)’를 고창(高唱)하던 그 시절의 위정자들을 장자(莊子)는 한심하게 바라보며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같은 비극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당장 이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위정자나 정치인들은 대체 무얼 쳐다보고 있는 걸까요.

 

‘포식난의’는 <<맹자>> ‘등문공 상편’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면서 가르침이 없다면 짐승에 가까워진다[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는 맹자의 일갈(一喝)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가르침’이 전제될 때 비로소 이 말의 의미는 온전해지는 것이지요. 국회의원 김현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기내(機內) 패악사건 등 올해 일어난 이른바 ‘갑질 사건’들의 근저를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은 필수적이라 본 것입니다. 이들은 권력이나 부를 거머쥐고 ‘포식난의’를 즐기는 대표적 부류입니다. 그런데 ‘포식난의’를 즐기면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맹자의 말처럼 결국 ‘짐승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지식교육’ 아닌 ‘인간교육’을 말하는데, 그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가정교육’입니다. 1차적으로 김현의 부모나 조현아의 부모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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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철부지급’과 ‘포식난의’를 올해 이 땅에서 근근이 살아온 서민들의 곤경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사자성어로 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새해에는 정말로 정치인들이나 부자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한 모금의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서민들의 급박한 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요즘 종북주의자들로 매도되는 일부 인사들이 그 ‘종북’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철부지급’ 중에서도 최고로 급박한 처지에 놓인 북한 주민들의 삶을 먼저 걱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고, 이 땅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붙어 다니는 ‘무책임’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라도 어려운 서민들이 겪고 있는 ‘철부지급’의 상황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엔 서민들이 진정으로 ‘포식난의’를 즐기는 원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