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07.0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08.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08.31 23:25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클라호마시티 시가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클라호마 산하


한가한 오클라호마 공항에서


오클라호마 공항에서 확인한 자연의 위력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OSU의 Du 교수 내외와 스틸워터의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스틸워터(Stillwater), 그 평온과 정밀(靜謐)의 입체적 공간성

 

 

27일 오전 11[한국 시각] 인천공항을 출발, 큰 원을 그리며 태평양 상공을 건넌 OZ23627일 오전 950[미국 시각]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내외국인들로 장사진을 친 가운데 두 시간이 넘는 검색과 입국 수속을 거친 오후 230. 드디어 오클라호마로 가는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 한적한 오클라호마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오클라호마의 산하(山河)이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뿐. 수없이 가로 세로 직선으로 그어진 도로망은 마치 신의 솜씨인 듯 망망한 평원을 바둑판처럼 분할하고 있었고, 그 위로 부드러운 구름뭉치들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평화 그 자체의 정물화였다. 그 위에 어찌 토네이도의 폭력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한참동안 공들여 이쁜성채를 만들어 놓은 어린아이가 갑자기 생겨난 심술로 마구 휘저어 놓듯, 인간의 앞에서 조화를 부리고픈 신의 의지도 그렇게 작동되는 것일까. 한적하면서도 요새같이 든든하게만 보이는 공항의 화장실 팻말 위쪽의 토네이도 피난처[Tornado Shelter Area]’란 팻말을 보고서야 지난 5월의 악몽 같았을 토네이도의 현장이 바로 이 지역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순식간에 짐을 찾은 뒤, 픽업 나온 OSU 역사과의 Du[Yongtao Du] 교수를 만난 것이 오후 5시 반. 한적한 길을 두 시간여 달려 드디어 스틸워터에 도착했다. 오클라호마가 카우보이의 본산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스틸워터는 소떼를 몰던 카우보이들이 소들과 함께 코를 박고 물을 마시며 갈증을 지웠을 만한, 조용한 평원이었다. 시차로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Du 교수 부부를 따라간 곳은 자신들의 홈 푸드를 대접하겠다며 데려간 대형 중국음식점이었다. 그들의 호의와 성의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그곳 식당의 음식을 통해 강남의 유자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을 새삼 확인한다. 잔디 곱게 깔린 구릉에는 나지막한 대학 아파트들이 널찍널찍 앉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용한 곳이 바로 우리가 들어갈 윌리엄스 아파트[101 N. University Place Apt #1]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시차에 지친 아내는 곯아떨어지고, 나는 나답게불면의 새벽을 맞아야 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04.06 14:10

 


<헬싱키-반타 공항 모습> 


<헬싱키-반타 공항 내부>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헬싱키 근교>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도중에 내려다 본 핀란드 산하> 


<로바니에미 공항 바깥에서 만난 이정표> 


<로바니에미 공항 바깥 언덕에 세워진 순록 상> 


<로바니에미 공항의 앙증스런 간판-순록의 뿔로 만들었음> 


<로바니에미 첫날 저녁식사를 한 식당 BULL> 


<로바니에미 오우나스 강과 께미강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호수같은 강에서-미숙, 경현> 


<오우나스-께미 주변의 자작나무 숲 뒤로 석양은 불타고...> 


<오우나스-께미에서, 외로운 스키어>

 


<로바니에미에서 목격한 눈의 모습>

 

 

아직도 눈에 덮인 북극권의 낙원

 

 

참으로 먼 곳이다.

 새벽 5시에 기상, 인천공항 행 리무진에 오른 시각이 6시 45분. 공항에서 아침식사 해결 후 핀에어에 탑승한 시각이 10시였고, 이륙한 시각은 10시 30분이 넘어서였다. 베이징 상공, 모스크바 상공, 쌩뜨 뻬쩨르부르그 상공 등을 거쳐 발트해 상공에 들어선 것이 이곳 시각 오후 3시 가까이. 3시 5분경 헬싱키-반타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 짐을 찾은 후 로바니에미 행 비행기 출발 시각인 4시 20분 전에 탑승구 22A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어 해 전 북유럽 여행팀에 합류하여 잠시 거쳐 갔을 뿐인 이곳. 이번에 큰맘 먹고 그 속살을 보고 싶었다. 스웨덴에 650년간, 러시아에 200년간 통틀어 850년을 남의 지배 아래 살아왔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을 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문화를 발전의 거름으로 삼아온 나라. 2차 대전에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을 잘못 선’ 죄로 철저히 파괴되었고, 전후 소련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기한보다 훨씬 앞당겨 갚아 버리고, 그 후 몇 년 만에 올림픽을 유치하기까지 한 나라. 면적은 남북한의 1.5배쯤 되지만 인구는 500여만 밖에 되지 않는 북유럽의 강소국.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북극에 가까워 국토의 30%가 북극권에 들어가 있는 나라. 이 나라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 점이 궁금했다.

 

***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날아가는 1시간 30분 동안, 아직도 하얀 눈에 덮여 잠들어 있는 핀란드의 자연을 음미했다. 구릉 하나 보이지 않는 평원에 다닥다닥 둥근 공간들이 하얗게 널려 있는 건 핀란드 전역에 수만 개나 있다던 바로 그 ‘눈 이불을 덮고’ 얼어버린 호수들이었다. 그 뿐이랴. 온 평원엔 백설을 뒤집어쓴 전나무와 삼나무 숲이 들어차 있고, 누가 그었는가? 그 사이사이로 핏줄처럼 도로들이 교차하며 끝없이 뻗어 있었다. 호수와 숲의 나라. 그런데 아직 한겨울의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 겨울잠을 누가 있어 깨울 것인가? 나그네의 마음속 떠오른 부질없는 걱정과 의문이었다. 도회의 냄새는 로바니에미 인근에 도착할 무렵에서야 맡을 수 있었다. 사뿐히 공항에 내리니, 참으로 한적하고 ‘이쁜’ 시골 공항이었다. 공항 건물 앞 언덕 위엔 순록의 모형들이 달릴 듯 서 있고, 순록의 뿔을 이어 붙여 만든 공항 간판은 건물 뒤쪽에 숨듯이 달려 있었다. 렌터카를 몰고 나온 경현의 안내로 시티호텔에 여장을 푼 뒤 본격 탐사가 시작되었다. 호텔 옆 BULL에서 시장기를 지운 우리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한 시가지를 거쳐 꽁꽁 얼어붙은 오우나스강(Ounasjoki)과 께미강(Kemijoki)이 합쳐져 호수를 이룬 곳에 들어갔다. 텅 빈 얼음판엔 하얀 눈만 한 길 싸여 있고, 간혹 스키어들만 외롭게 그 공간을 왕래했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그제서야 넘어가는 석양이 불타듯 스며들었고, 아주 조금씩 우리의 품속을 파고드는 어둑발과 함께 숙소에 들어왔다. 시차를 극복하지 못하여 몸은 천근이었으나,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운 로바니에미의 첫 밤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10.26 18:29


 <플라니에타 호텔>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김마리아>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박비탈리>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박아나똘리>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고려인 협회 이기미 회장과 김유리 교수>

 <벨라루스 고려인 협회 이기미 회장>

<벨라루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과 함께>

 <벨라루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과 함께>

 <벨라루스대학교 국제관계학과 빅또르 샤두르스키 학장과 함께>

  <벨라루스대학교 한국학센터>

 <민스크 시내의 한 전통교회>

 <민스크 독립광장의 시몬과 헬렌 성당>

  <민스크 독립가도(Independence Avenue)>

  <민스크 시내 전통시장>

  <민스크 시의 오페라 극장>

 <점심으로 먹은 샤쉴릭>

 <민스크 시내에서 점심을-아리안과 함께> 

 <뎨르쥔스크 극장>

 <뎨르쥔스크 극장>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승무>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 중인 무용단>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이대 무용과  학생들과 관객들>

  <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에서 사진을 찍는 신혼커플>

 <이반 비탈리 작 "푸쉬킨"-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작자미상의 "전쟁 후 돌아오는 사람들"-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미르성>

  <미르성 안에서>

  <미르성 조감도>

  <아름다운 벨라루스의 늪지대>

  <광야를 달리는 벨라루스의 들소들>

  <미르성에서 안톤, 올랴, 백규>

  <미르성의 우물 앞에서 안톤, 오교수, 올랴>

  <미르성의 식당에서 백규와 올랴>

  <미르성의 러시아 정교회 앞에서 오정혜 교수, 백규, 올랴>

  <미르성의 러시아 정교회>

  <민스크 시내 승리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

 <민스크 시내 전통시장에서>

 

<벨라루스 대학 관계자들, 왼쪽부터 김유리교수, 백규, 알리악스 동방학과장, 길경숙 교수>




아름다운 벨라루스, 그리고 여덟 가지 만남들

 

조규익

 

먼 길이었다. 루프트한자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을 떠난 시각이 19일 오후 1시 30분. 중간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건 정확히 12시간 후인 한국시각 20일 오전 1시 30분. 두 시간 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나 민스크에 도착하니 현지 시각 19일 밤 11시 45분이었다. 만 17시간을 날아온 셈. 호텔에 여장을 풀고 짐 정리를 마친 시각이 새벽 2시였다. 대충 자고 일어나 다음 날 오전 10시부터 이곳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샤갈의 고국, 제법 눈이라도 내릴 법한 쌀랑하고 음산한 날씨가 김춘수의 시를 떠오르게 했다.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에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1887년 7월 7일, 벨라루스 비텝스크 인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샤갈. 대상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춘 그의 화풍이 어쩌면 햇살의 세례를 마음껏 받지 못하는 듯한 벨라루스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는 생각이리라. 이 쌀랑한 추위, 어찌 3월뿐이랴. 한 여름에 내리는 눈도 볼 수 있을 것이니. 시인 김춘수의 감성이 새롭게 빚어낸 페이소스가 폐부에 깊숙이 스며드는 나라를 나는 찾아온 것이다.

 

#1 낙후된 시설, 그러나 반짝이는 학생들

 

10월 21일. 벨라루스대학교 국제관계학부 한국학센터의 사람들을 만났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 민스크 대학의 따찌아나 교수까지 참석했다. 특히 이 학과의 핵심 길경숙, 오정혜, 김유리 교수 등과 학생들은 똘똘 뭉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강연제목은 ‘한국문화의 특성과 세계화의 실상’이었지만, 학생들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준비해간 교과서적 논의는 사라지고, ‘한-벨라루스’ 두 민족의 공통점이나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 경험한 내 생애와 꿈을 바탕으로 벨라루스의 젊은이들이 가꾸어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

참으로 선량하고 순박하며 ‘똘똘한’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환상적인 것은 그들이 타고나다시피 한 어학 능력이었다. 구소련의 일부로서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 북쪽으로는 발트 3국,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벨라루스는 ‘대륙 속의 섬’이었다. 독립국가연합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이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다양한 민족들과 교류해온 증거는 이 젊은이들의 말과 피부, 그리고 눈동자에 살아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벨라루스어와 함께 러시아어를 어머니의 젖과 함께 먹고 자란 그들이었다. 부모나 조부모가 속한 민족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의 세례 속에서 이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영어나 불어 독일어 등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아버지가 이란인, 어머니가 벨라루스인이고, 지금 할머니가 테헤란에 살고 있는 다문화 출신의 청년 아리안.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영어, 이란어,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드디어 한국어까지 구사하게 된 수재였다. 이미 두 세 개의 언어를 막힘없이 구사하는 그들은 미지의 한국 교수에게 대단한 호기심을 표했다.

한국의 몇몇 대학들이나 국제교류재단 등에서 학비와 생활비의 지원을 받아 유학하게 된 상당수의 학생들은 장밋빛 코리안드림들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주어진 ‘한국행’을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마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꿈이 얼마나 현실화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그런 꿈들이 환상에 그치지 않도록 도와줄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벨라루스 대학 국제관계학부 샤두르스키 학장도 동양언어학과 알리악사놀리 학과장도 학생들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쉽진 않겠지만, 벨라루스대학이 현재의 정체(停滯)를 조만간 탈출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기로 했다.

대학의 건물은 낙후되어 성냥갑만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를 포기한 채 7층, 8층을 도보로 오르내리면서도 힘들어 하지 않고, 점심시간을 갖지 못할 만큼 강의실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들이 바로 벨라루스의 미래였다.

 

#2 수줍고 조용한 고려인들

 

민스크 체류 둘째 날. 벨라루스 방문의 주목적인 고려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고려인협회 이기미 회장의 주선으로 고려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중년의 남녀들과 만날 수 있었다. 러시아어권의 고려인들을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몇 마디 고려 말이나마 꺼내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몇 번이고 채근해야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몇 마디 고려 말들을 꺼내는 그들이었다.

왜 그럴까? 사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의 그늘에 살아오면서 동족을 만나는 일과 조상들의 말을 함께 나눌 상대를 만나는 일이 그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일까.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쭈뼛거렸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말을 못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가혹한 동화정책으로 인해 고려 말을 잊어버린[아니, 잃어버린] 상처로부터 생겨나는 강박관념이 그 두 번 째 이유이리라. 가끔 반죽 좋은 고려인 아줌마들의 경우 고려 말을 하려고 애쓰는 수가 있긴 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으레 “고려 말이 틀릴까봐 겁이 납지비!” 하며 꽁무니를 빼곤 했다.

우리가 흔히 외국인 앞에서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은 혹시나 ‘말이 틀릴까봐서’이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을 쓰면 어쩌나,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나’ 등 이런저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늘 ‘틀려도 좋으니 과감하게 입을 벌려 말하라’ 고들 하지만, 인간의 자존심과 수치심은 그런 용기를 억누르기 일쑤다. 말하자면 고려인들이 동족을 만나면서도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는 것은 그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용기를 내어 입을 떼는 고려인들도 대부분 어미(語尾) 부분은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 억양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제 부모나 조부모가 당했던 강제이주의 트라우마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워진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데서 느낄 수밖에 없을 긴장이나 조심성은 대단한 듯 했다.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박비탈리, 박무사, 이기미, 김유리엔나, 김엘비라, 박아나똘리 등 고려인 어른들. 이 중 회장인 이기미 선생만 뺀 다른 사람들은 대개 고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고려 말 쓰는 것을 어려워했다. 부모 대에서 한 번의 혼혈이 이루어진 젊은 고려인 김유리가 어린 사람들에게 고려 말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인 것은 젊은 혈기와 자신감 덕분이리라. 대부분 구소련의 정책에 순응하여 살아남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의 처지에서 자식들에게 고려 말을 강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고려 말을 빨리 버릴수록 그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길이었을 것이고, 그 방법만이 자신들의 살길이었음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내 눈 앞에 나타난 고려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분명한 결과였다.

 

#3 오페라 극장에서 만난 벨라루스의 예술혼

 

10월 21일 밤. 벨라루스 대학교 국제관계학과의 몇몇 교수와 학생들 덕분에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카르멘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멋지게 세운 하얀색의 오페라 극장에 도착하니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밀려드는 인파가 인상적이었다.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늘상 해온 방식이라는 듯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급한 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를 싼 값에 인수하기도 했다.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나 같은 문외한이 듣기에도 정상급임을 느낄 수 있었다. 벨라루스의 오페라나 발레 수준이 유럽에서 정상급이라고 자랑하는 인나 양의 말이 허언(虛言)은 아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발레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할 뿐 아니라, 인근의 국가들에서도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한 주일의 일과가 끝나는 금요일 밤, 이곳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며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민스크 시민들의 삶의 단편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허리 구부정한 노인들까지 좌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소리를 감상하는 데 방해된다는 노기(怒氣)의 표현인 듯, 소곤대는 뒷좌석의 초등학생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경고하는 한 노파의 거동, 막이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로 출연자들을 격려하는 관람객들의 적극적 참여 등이 이들의 문화적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민스크 시민들의 예술적 안목이 빛을 발하는 현장이었다.

 

#4 깨끗하고 기품 있는 도시미학

 

건물과 도로,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 구성의 3요소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건물이란 공간이 필요하며, 물류나 이동을 위해 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들의 질서의식 혹은 매너다.

‘백색의 깨끗함’으로 빚어낸 도시미학의 정점이라는 것이 벨라루스 특히 민스크의 첫 인상이었다.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껏 상당수의 나라들과 도시들을 구경했다. 구소련권의 국가들 대부분은 무겁고 침침하며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유럽의 도시들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칙칙함과 무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에 비해 밝고 단정하면서도 역사성까지 갖춘 것이 민스크였다. 민스크는 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대부분 파괴된 터전 위에서 새롭게 계획된 도시다. 그래서인지 도시 전체에서 분명한 계획성이 느껴졌다.

우선 색깔이다. ‘벨라루스’란 말이 ‘하얀 루시[Белая Русь 벨라야 루시]’에서 유래된 것처럼 이 나라 사람들이 흰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도시의 배색(配色)에서 알 수 있었다. 대부분 하얀 피부를 갖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특히 여성들]은 흰옷을 좋아하고 주택의 벽도 희게 칠하는 듯 했다.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대충 지은 경우가 없었다. 특이한 디자인과 채색으로 한껏 멋을 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 집만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드러지면서도 다른 건물들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청과 벨라루스대학 본부, 민스크 호텔, 시몬과 헬렌 성당 등이 둘러싸고 만들어진 독립광장으로부터 독립가도[獨立街道 ; Independence Avenue]는 시작된다. 유럽을 통틀어 가장 긴 가도라 하는데, 길을 경계로 양 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베이지색을 바탕으로 한 흰색 위주의 배색이었다. 건물들은 높아야 3~4층. 주변 건물들과의 밸런스를 해칠 만큼 두드러지게 높은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균형 잡힌, 이른바 절제의 미학이었다. 절제의 미학을 완결시키는 요소가 바로 기껏 베이지 톤을 넘지 않는 흰색의 바탕의 건물들이었다. 주황색의 시몬과 헬렌 성당이 오히려 이색적으로 보일 만큼 민스크 시내의 색채미학은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백색의 조화로부터 구현되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도시의 야경(夜景). 높고 낮은 건물들에 일일이 조명등이 설치되어 도시 전체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는 사실이었다. 흡사 어둡고 칙칙한 것을 혐오라도 한다는 듯, 백색과 은은하게 어울리는 음영(陰影)의 조화가 도시를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도시의 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나 아닐까.

 

#5 벨라루스의 미술을 훔쳐보고, 한국 전통예술의 전도사들과 만나다

 

10월 22일. 고려인협회의 이 회장과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오 교수의 권유로 오후 4시 뎨르쥔스크 시에서 열리는 고려 춤 공연을 참관하기로 하고, 비는 짬을 이용하여 오전 10시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학생 아리안의 안내로 벨라루스 국립 예술박물관을 찾았다. 큰 규모의 건물에 다양한 시기와 다양한 민족 및 국가들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를 비롯, 브론즈 상, 목각, 도자기, 이꼰 등 각 시대의 생활ㆍ종교미술부터 파인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과 성향의 예술작품들이 하나의 공간에 배치됨으로써 드러나는 조화와 융합이 감동적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엄청난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을 두루 보아온 입장이지만, 벨라루스 역시 유럽 권 국가의 예외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의 창조 못지않게 보존과 전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보아야 할 예술은 많고 그것을 향유할 시간은 턱 없이 짧음을 한탄하며 벨라루스 미학의 호수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립예술박물관의 관람을 중도에 포기하고, 이 회장의 차에 편승하여 1시간 남짓 달려간 곳이 작은 시골 도시 뎨르쥔스크였다. 그곳 공연장은 썰렁했으나, 곧바로 주민들이 들어차면서 온기가 돌았다. 앙증맞게 꾸민 무대 위로 우리의 전통무원들이 등장했다. 우리 전통문화 전파의 사명을 지고 이곳에 파견되어 온 5명의 이화여대 무용과 학생들[윤서희, 김아람, 김민지, 김수지, 최윤선]이었다. 태평무, 승무, 부채춤, 장고춤, 검무, 북춤, 사물놀이 등 기억하기에도 벅찬 레퍼토리들이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곳에 파견되어 우리 전통예술의 보급 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과 함께 등장한 고려인, 벨라루스인, 한인 소년ㆍ소녀 등이 하모니를 이루어 펼치는 춤사위는 썰렁하던 공연장의 냉기를 녹여주었다. 객석은 주로 벨라루스인들이 채웠고, 손님으로 초대 받은 우리들과,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고려인들 몇몇도 섞여 있었다. 프로급인 이화여대 학생들에 비해 나머지 요원들은 약간 어설펐으나, 감동으로 말을 잃은 채 주시하는 벨라루스 주민들[특히 어린이들]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천상의 요정들로 비쳤을 것이다.

객석 앞자리에 앉아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벨라루스의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뿌린 씨앗이 싹터 미래의 어느 시기엔 그들 스스로 한국의 전통예술에 빠져 들 날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이들의 표정에서 읽었다.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이역만리 벨라루스로 날아와 그들에게 우리 전통예술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마음이 통하는 이웃으로 만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훌륭하도다, 이화여대 춤꾼들의 멋진 춤사위여!

 

#6 벨라루스 화폐와의 만남

 

외국에 나가는 경우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현지 화폐에 적응하는 일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더하다. 그런 나라들일수록 화폐의 가치가 턱없이 낮아 기준 화폐보다 액면가는 엄청나게 높은 반면 실질 교환가치는 아주 낮다. 말하자면 물가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한 두 해 전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미국 달러화를 갖고 있었으나, 가게에서 물 한 모금 살 수 없었다. 현지 화폐인 ‘숨’을 확보해야 하는데, 은행의 환율로는 큰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당시 그곳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실질적인 환전상(換錢商)들인 셈이었다. 자신들의 화폐가치는 믿을 수가 없으니, 기회 닿는 대로 달러를 사 모으는 것이 그들의 자구책이었다. 당시 암달러상이나 환전상들이 쳐 주던 환율은 미화 1달러에 15만숨 정도였다. 가뜩이나 표면이 큰 지폐로 15만숨은 커다란 다발로 묶이는 것이었다. 호주머니에 넣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서책들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도 없었다. 참으로 처치곤란이었는데,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내 스스로 부자가 된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보고 나서야 그 돈이 얼마나 형편없는 가치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밥 한 끼 먹기 위해서 몇 만 숨을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벨라루스의 현실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처음 호텔에 들어오던 날, 환전 코너에 적힌 환율은 미화 100달러에 800,000벨라루스 루블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그 환율은 820,000루블로 바뀌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들의 화폐가치가 그만큼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미화 100불을 바꾸면 82만 루블이란 현찰이 호주머니 속에 그득했다. 밥 한 끼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면 보통 10만, 20만 루블이 달아났다. 아무리 싼 음식을 먹어도 음료수나 맥주 한 컵을 곁들이면 그 액수는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는 것이었다. 밥값을 치르고 나면 100원, 500원, 1000원 등의 잔돈이 수북하게 되돌아 왔다. 돈 머릿수 따질 줄 모르는 나는 두툼한 현찰들의 무게와 두께 덕에 며칠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내 호주머니 속의 현찰들을 바라보곤, “그 쓰레기들은 뭣 하러 넣고 다니우?”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기도 했다. 경제가 어려운 나라의 화폐가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말았다. IMF 통치의 터널에서 신음해 온 우리가 아니던가? 우리는 장롱 속의 금을 모조리 끄집어 내 재빨리 고통과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감동적이고 대단한 집단 체험이었다. 그런데 지금 유럽 아니 세계의 경제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는 일부 국가들, 금을 모으기는커녕 자신들의 탐욕을 지속시키기 위해 시위로 날밤을 지새우는 이 나라들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웃나라들에게 자신들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을까?

 

#7 아름다운 벨라루스 여인들

 

‘여성은 아름다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잠재된 존재를 실현시키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는 역사가 긴 남성 중심의 언급일 것이고, 후자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의 언급일 것이다.

민스크에 들어서자 여성들의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 누구의 말대로 모두가 ‘미스 코리아 급’이오, 모두가 TV 탤런트이자 영화배우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 했다. 연기만 된다면 즉시 드라마에 투입해도 좋을 만한 미모들이 길거리에 그득했다. 얼굴 뿐 아니라 늘씬늘씬한 몸매들이 ‘벨라루시 여인들이 최고의 미인’이라는 속설을 입증하는 듯 했다. 벨라루스의 ‘벨라’는 백색이란 뜻이며, 백색은 벨라루스의 대표색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흰 눈이 많이 내리고, 여인들은 순백의 피부색을 갖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여자의 수준보다 못하다고들 하나, 사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슷하거나 낫다고 할 만큼 벨라루스 남녀들의 미모는 특출 난 데가 있었다.

첫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었고 셋째 날 미르성에서 가이드를 해 준 학생 안톤도 ‘벨라루스 남성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얼마간은 사실’이라고 애교 있게 대답할 정도였다. ‘얼마간’이란 그 친구의 말 속에서 모종의 뼈가 느껴졌는데, 아름다운 여인들의 남자 노릇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암시한 것이나 아닐까. 안톤과 함께 미르성을 따라나온 학생 올랴 역시 범상치 않은 미모를 보여주었다. 사실 벨라루스의 빼어난 자연[숲, 강, 호수, 평원]은 생활미학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인체미학에도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미학과 도시미학, 그리고 인체미학의 삼위일체를 벨라루스에서 발견한 셈이었다.

 

#8 벌판 위의 요새, 미르성

 

2011. 10. 23. 오전 11시.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학생 안톤의 차로 민스크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미르시의 미르성[벨라루스어 Мі́рскі за́мак/러시아어 Мирский замок]을 찾았다. 대개의 경우 성은 험고(險固)한 곳에 기대어 짓는 것이기 때문에, 가도 가도 산이 없는 평지의 벨라루스에서는 어떤 양식의 성이 세워져 있는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벨라루스 북서쪽 미르시에 위치한 고딕 양식으로 15세기 말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초 일니크 공작이 완성한 이 성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1568년 리투아니아의 라드빌라 공작(Duke Radvila)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가미되었고, 3층으로 이루어진 동북 방향의 궁성, 석회석의 화려한 문 장식, 발코니와 복도 등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성이다.

상당 기간 버려져 있다가 나폴레옹 1세 때 큰 피해를 입었고, 19세기 말엽에 복원되었으며, 도미니크 라지빌로부터 그의 딸 스테파니아와 그녀의 딸 마리아에게 계속하여 소유권이 넘어간 이 성은 2차 세계대전에 나찌군으로부터 전쟁의 참화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평원에 나무숲이 조성되어 있고, 평지의 한 복판에 도시를 건설한 벨라루스인들이었다. 넓은 구릉에 융단처럼 깔린 진녹색의 밀과 감자를 보며 벨라루스가 풍요로운 농경국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감자가 주식으로서 500여 가지의 감자 요리가 있다고 하는 이 나라다. 감자가 자랄 만한 평원 위에 성채는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가 막 지난 16세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성벽의 높이 13m, 둘레는 75m에 이르는 미르성은 전형적인 유럽 성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의 성들이 대부분 그렇듯 미르성 역시 ‘미학과 실용성’을 겸비한 건축물이었다. 그 옛날 이 성의 바깥에 백성들이 몰려 살았을 것이다. 성 안의 지배자와 성 밖의 백성들. 당연한 일이지만, 성 밖의 백성들은 외적의 침입을 1차적으로 막아내야 할 방패였다. 그 방패가 뚫리면 성 안에 웅거하고 있던 지배자들은 성을 의지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이른바 농성(籠城)이 바로 그것이다. 미르성은 밖에서 보는 아름다움 못지않게 내부도, 내부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경치 역시 특출했다.

성채 곁의 호수에서 수영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의 혼이 깃들어 있어, 누구든 수영을 하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슬픈 전설이었다. 그런 전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리 떼는 여유롭게 유영을 하고 있었으며, 제방에 심어진 키 큰 소나무들은 길게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었다.

 

***

 

고려인 프로젝트 관련 자료 수집과 벨라루스 대학에서의 특강. 그것들이 벨라루스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번쩍 번쩍 눈에 띄는 것들이 많았다. 벨라루스는 사실 한국에서 잘 들어보지 못하던 나라였다. 연해주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그 가운데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니, 대단한 역사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세 번의 디아스포라를 겪어 온 셈이다. 한반도로부터 연해주로 건너 간 할아버지 세대의 1차 디아스포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옮겨 간 2차 디아스포라, 중앙아시아에서 벨라루스로 옮겨 온 3차 디아스포라가 그것들이다. 그곳에 고려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이제 새롭게 우리의 문화영토 안으로 들어오려는 벨라루스 젊은이들도 있었다. 옛날의 고려인들을 우리 사람으로 되돌려놓고, 새롭게 들어오려는 고려인들을 우리 사람으로 껴안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지혜롭게 그들에게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돈만 퍼붓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벨라루스대학 한국어학과의 오정혜 교수가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다문화 시대의 교육은 벨라루스 현지의 한국어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길고 깊은 공부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간의 만남이 깨달음을 갖다 줄 수도 있다. 닷새 동안 벨라루스에 머물렀다. 물론 깨달음을 얻기엔 턱 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그러나 얼마가 되었든 그곳에서의 소득을 내 사업에 투자한 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결산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벨라루스 여행의 수확을 지금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그저 열심히 내가 얻어온 작은 기억들과 체험들을 열심히 발효시킬 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09.11 08:43

"대리기사 노릇까지… 온종일 교수님 몸종"
상아탑의 그늘- 연구조교 A씨의 하루
교수 자녀 돌보기 등 잡무·심부름으로 하루
"내 공부할 시간은 없어" 참거나…그만두거나…

남상욱기자 thoth@hk.co.kr


'몸종''개인비서'라고 자학하는 학생들이 대학 교정을 배회하고 있다. 교수의 연구보조를 이유로 각 대학 교수 연구실에 상주하는 수 만 명의 대학원생 연구조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교수의 자녀 보육부터 세금명세서와 같은 개인서류 챙기기, 대리기사 노릇 등 '상전'의 갖은 일을 챙기느라 녹초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다. 교수 눈밖에 나는 순간, 그들의 미래가 단박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대학조교의 실상을 들여다봤다.

8일 오후 늦은 시각. 서울 모 사립대 문과계열 대학원 3학기째인 연구조교 A(29)씨가 교수 연구실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1년 내내 연구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반복된 생활이다. 가방에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겨드랑이에까지 두툼한 책을 끼워 든 그는 밤새 공부할 작정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학기 내 학위논문을 끝낼 계획을 세워두고 강행군 중이다. 하지만 A씨는 "오늘도 교수님 딸의 과제를 도와주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교수님 뒤치다꺼리에 공부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공부하러 대학원에 왔는데 이게 뭔가 싶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석사과정을 마치는 내년 하반기에 대학원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다른 현실에 자괴감이 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 그 중심에는 물론 '부려먹기만 할뿐 공부에 도움을 안 주는 교수에 대한 원망'이 깔려있다. 그는 "교수가 쓸 논문자료를 찾고, 수업보조에다 시험이나 과제물을 확인하다 보면 이렇게 밤 늦게야 내 공부를 할 수 있다"며 "이런 고생도 미래가 보이면 감내하겠지만 지도교수는 논문지도 등에는 무관심하다"고 하소연했다.

A씨의 하루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오전 8시 교수 연구실로 출근, 그날 예정된 교수의 수업자료 챙기기로 일과를 시작한다. 수업에 들어가 출석 체크를 하고, 과제물을 걷거나 교수 전달사항을 전하는 게 그의 일상적인 수업보조 일이다. 간혹 과제물 채점을 직접 할 때도 있다. 그 사이 자신의 대학원 수업도 들어야 한다.

최근에는 지도교수가 학술지 발표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 자료수집에 여념이 없다. "논문에 이름 하나 걸어준다"는 '대단한' 조건이 암묵적으로 걸렸지만, 그는 "내가 논문을 쓰는 건지, 교수가 쓰는 건지 모르겠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거부할 수 없다. 학술지에 이름 하나 오르는 것이 다음 학기 장학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교를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조교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향토장학금(집)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날 오후 그는 교수와 함께 인천공항에 갔다 왔다. 친한 외국 교수가 한국에 도착한다며 지도교수가 마중을 같이 나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는 교수 아들이 학교에 놀러 온다고 해서 오후 내내 놀아줬다"고 했다.

이러다 보면 어느 새 퇴근 시간이다. 퇴근은 물론 교수가 집에 가는 시간이 기준이다. 저녁 술자리가 있으면 함께 가는 경우가 많고, 가끔은 술 취한 교수를 집까지 모시는 '대리운전기사' 역할도 해야 한다. 그는 "한 마디로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하루 근무시간은 평균 12시간. '개인 비서'노릇을 하며 월급은 평균 80만원 가량으로 정확히 등록금만큼이다.

물론 그는 마음에 담아둔 말을 교수에게 한 적이 없다. 그는 "장학금은 물론 논문 심사까지 교수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 힘들다고 어떻게 얘기하겠나. 참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말한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