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2.26 새내기 OT에 다녀오며
  2. 2013.09.08 미국통신 3[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4
  3. 2010.01.01 경인년 신년인사 3
글 - 칼럼/단상2019. 2. 26. 07:34

 

새내기 OT에 다녀오며

 

 

 

                                                                                                                        조규익

 

 

 

매년 이맘때(2월의 마지막 주)면 대학 본부가 주최하는 새내기들의 OT 모임이 있다. OT‘ORIENTATION’의 약자일 터인데, 서양의 대학들에서 기원한 Student Orient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새내기들에 대한 환영과 대학생활 안내, 새내기들과 교수 및 선배들의 만남, 새내기들 간의 친목 도모 등 다양한 목적과 내용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3천명 넘는 신입생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없으니, 각 단과대학별로 흩어져 열리게 된다. 올해 인문대학 OT는 포천의 한화리조트에서 있었고, 교수들은 그곳으로 가서 새내기들을 만났다.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부푼 갓 20의 젊음들이 텅 빈 계곡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으며, 나도 새내기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 그들 사이엔 45년 전 새내기였던 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45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시골 소읍(小邑)에 있던 모교의 OT 장소는 부속고등학교 강당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진행되던 당시의 OT가 내겐 참으로 씁쓸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시골 치고 인심 사나운 곳이었다. 객지에서 겨우 잡은 자취방은 주인집 뒤쪽의 쪽문으로 통하는 곳에 있었고, 주인은 아예 한 번 와보지도 않았다. 방세를 내기 위해 안채를 방문하면 받아 든 돈의 액수만 확인한 뒤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곤 했다. 말을 섞을 필요도 섞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취방의 연탄온돌은 좀처럼 데워지지 않았고, 그 해 마침 연탄파동으로 연탄가게는 늘 텅 비어 있었다. 하루에 한두 덩이씩 연탄을 사서 새끼줄에 꿰어들고 언덕마을 자취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채 마르지 않은 연탄이었던지라, 부엌에 갖다 놓아도 불을 붙이는 게 쉽지 않았고, 가까스로 불이 붙어도 고약하게 만들어진 구들장 탓으로 방 안엔 온기가 돌지 않았다. 밤새 참새새끼처럼 떨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겨우 식사를 해결한 뒤 찾아가던 OT 장소.

 

‘4년 동안 이렇게 지루한 강의가 진행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겁을 주려는 행사가 OT라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강당을 빽빽하게 채운 410명의 새내기들은 지루하게 짜인 강의들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웅성거리는데, 하루 일정이 끝나고 냉방으로 들어갈 생각에 나 혼자만 우울했었다. 그렇게 대학 새내기 시절의 OT는 내 회색빛 추억의 폴더에 지금까지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으레 회상하고 싶지 않은 회색빛 추억을 소환할 수밖에 없어서일까. OT 때만 되면 가급적 현장에 가지 않으려 꾀를 내곤 한다.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는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라진 내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미 6학년을 넘어섰고, 강의실 밖에서 요런 젊음들과 가까이 할 날들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들에게 꿈을 물었다. 대답은 국어교사, 아나운서, 출판 편집자, PD, 작가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없다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겠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나라가 아니니, 애당초 그들 내면의 현주소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시야는 넓어진다./ 장래에 무슨 일로 입신(立身)할 것인지는 앞으로 결정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시야를 갖기 위해 지금 당장 하루-한 달-한 학기-한 해-대학 4-일생에 걸친 자신만의 시간표를 짜야 한다./ 그 시간표는 수시로 수정되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표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예의 내 시간표론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꿈을 갖고 노력하는 일만이 대학생활에 성공하고 인생에 성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올해도 어김없이 역설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몇이나 내 말을 알아듣고 실천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지둘려보는 수밖에.

 

OT장에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새내기 부모들의 얼굴이 자꾸만 밟혔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대학 공부를 발판으로 험한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서바이벌해주기를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대학에 보내놓고 고관대작이나 재벌이 되어주길 소망하거나 자신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저 밥이나 제대로 먹고, 착한 남녀 만나 자식들 낳아 기르며, 소소한 행복이나마 누리며 살게 되는 것. 이른바 소시민의 행복이라도 보장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 부모들의 바람 아니겠는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제자들에게 그걸 안겨주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자신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촛불 들고 광야에 나서게 함으로써 젊은이들을 혁명의 전사로 만드는 게 정치인의 할 일인가. 고매한 이상이나 그럴 듯한 이념을 추구하기에 앞서 젊은 영혼들에게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게 교육자의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 막바지의 스산한 풍경이 우울한 내 마음에 끝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나마 이렇게 피곤한 육신을 뉠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마저 내겐 사치스러운 일일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8. 07:40

 

 


OSU의 백규 연구실에서. 왼쪽이 수잔, 오른쪽이 다이아나

 

둘쨋날 부재중에  다이아나가 써놓고 간 메모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Fulbright Scholar로 선정되었음을 통보 받은 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정하고 그 책임자로부터 초청장을 받는 일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토네이도 소식이 좀 걸리긴 했으나, 학교의 자매대학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아니라 한적한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연구와 힐링을 겸할 수 있다고 본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은 망설일 필요가 없는 적지(適地)였다.

 

우리의 인문대학에 해당하는 OSU‘College of Arts and Sciences’의 대닐로위츠[Bret Danilowicz] 학장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하루 만에 쾌락의 응답이 왔고,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역사학과 학과장 로간[Michael F. Logan] 교수로부터 초청장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 초청장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내용은 선생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우리는 선생님께 연구실, 비서의 지원, 컴퓨터와 인터넷 서비스 등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During your stay here, we will be able to provide you with and office space, secretarial support and computer and internet access]라는 요지의 약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비서의 지원(secretarial support)’.

 

대학에서 비서는 으레 총장실에나 앉아 있는 묘령의 여직원으로 알고 있던 내 상식으로 비서의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로간 교수의 말은 묘한 감동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0년 가까이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제자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인 조교들로부터 강의와 연구에 도움을 받아오던 나로서는 학과 비서의 존재나 성격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바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의 책과 드라마로 번역소개된 ‘The Paper Chase’가 한동안 대중의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킹스필드(Kingsfield) 교수에게 비서 노팅엄(Mrs. Nottingham)이 있었다. 외부인들 특히 학생들에게 타협을 모르던 고집스런 캐릭터였지만, 교수에겐 매우 충직한 비서였다. 이처럼 명비서 노팅엄[배우는 베티 하포드(Betty Harford)]의 존재 같은 간접자료를 통해 나는 겨우 미국 대학 학과들의 비서 상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역사학과의 비서는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인데,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주로 수잔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간결하면서도 자상하게 답신을 보내주던 그녀 덕분에 나는 준비과정에서 많은 수고를 줄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킹스필드 교수의 노팅엄을 잠시 잊은 채, 한결같이 이쁘고붙임성 좋은 한국의 비서들만 상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부친 짐의 배달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끙끙대다가 아무래도 학과 비서를 통해 알아보아야겠다는 계산으로 시차 적응도 안 된 사흘 만에 학과 사무실로 나가 수잔과 다이아나를 만났다. 중년 혹은 중년에 가까운 두 여성이 나를 맞았고, 그 가운데 약간 젊은 수잔이 매우 사무적으로 나를 배정된 연구실로 안내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 아닌가. 그 때서야 이곳이 미국이고, 미국 대학의 학과들에는 노팅엄만 있을 뿐, 한국의 비서들은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미국 우체국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와 연락처를 주며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자 ‘Yes!’하며 나가더니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학과 사무실에 가서 다이아나에게 수잔의 행방을 물은 즉 짐을 찾으러 우체국에 나갔다는 것이다.

 

 아뿔싸, 엄청난 무게의 박스 두 개를 연약한 여성이 어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곳 스틸워터(Stillwater)의 지리에 어두웠던 나는 다만 내 짐이 어느 우체국에 보관되어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찾아야 하는지만 알고자 했으나, 그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해당 우체국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조교에게 우체국 편지 심부름조차 시키길 꺼려하던 나인지라, 그 소식에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40 만 원 이상의 탁송료가 들었던 박스 두 개의 중량이 미안함으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리 비서라지만, 첫 대면에 짐꾼 노릇을 명()한 셈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남아 있던 다이아나에게 사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노라고 구구하게 해명했지만, 그녀의 말은 간단했다. ‘It’s our duty!’란다. 결국 수잔을 만나지 못한 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하루 뒤 다시 들른 내 연구실에는 태평양을 건너 온 박스 두 개가 오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수잔, 박스에 대한 언급은 입도 뻥긋 아니 한 채 우리를 맞아 주는 게 아닌가.

 

그 해프닝을 통해 제 할 일에만 충실한미국인들의 업무 철학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연구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교수들의 일을 충실하게 거들고 해결해주는 것이 학과 비서들의 업무이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업임을 그들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혹 생색이라도 내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던 내게, 그녀는 사무실의 꽃이 아닌 충직한 전문가로서의 존재의미를 120% 보여주고 말았다. 미국 도착 이후 내 인식의 한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첫 사례였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10. 1. 1. 14:09



신년인사

 

경인년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난 1년, 우리는 참으로 분주하게 지내왔습니다.

저는 그간 시종일관 학자를 자처하며 살아왔는데, 격에 어울리지 않게 지난 2학기부터 인문대학의 학장직을 겸하면서 행정 파트에도 한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학장직을 수행하면서 평소 연구실이나 서재에서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것이 공동체에 대한 제 생각을 얼마간 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크나 작으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의 돌아가는 모습이야 다 같지 않겠습니까?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면서 갈등이나 좌절이 생겨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런 것들이 잘만 조정된다면, 공동체 발전의 추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연말 며칠의 여유를 틈 타 캄보디아의 앙꼬르왓을 다녀왔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에 진이 빠져 널브러진 돌들을 신물 나게 보았습니다. 신이 떠난 신전에는 먼지와 찌든 시간의 때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을 매고 있던 신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버린 것일까요? 맨발에 ‘원 딸라(one dollar)!’를 구걸하며 관광객들의 눈만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들의 후예에게 그 신들은 왜 한줌의 은총도 내려주지 않은 것일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확인되는 현장이었습니다. 남들은 ‘7대 불가사의’니 ‘6대 불가사의’를 언급하며 존경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 신들의 집이 제겐 한갓 ‘인간 욕망의 찌꺼기’로 보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허무’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방궁을 짓고 살아도, 먼 훗날 후손들에게 물려진 그것들을 바라보며 저처럼 ‘허무’와 ‘부질없음’을 느낄 사람이 분명 있겠지요? 

그런 허무의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올해 기를 쓰고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허여(許與)된 삶의 소중함을 찬양하는 유일한 길은 남들이 보고 감탄할 만큼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개미와 꿀벌의 대열에 함께 하십시다. 바야흐로 내려 쪼이는 은총의 햇볕을 원료로 맛있는 꿀을 빚어 남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소원하는 ‘구원의 길’이 아니겠는지요? 

모쪼록 올 한 해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모든 일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인년 첫 날 아침에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