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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07 고전문학과 바다
  2. 2016.09.15 남도에서 만난 무서운 선비, 금남 최부 선생
카테고리 없음2021. 8. 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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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사계 제42호(2021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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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조규익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야기 속의 삶과 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땅. 우리 민족은 한시도 바다와 떨어져 살 수 없었다. 아무리 내륙으로 숨어도 바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특히 먼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세상을 벗어나 알 수 없는 이계異界로 나아감을 의미했다. 바다는 물고기와 해초, 소금을 구하는 현실의 공간이자 알 수 없는 환상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늘 바다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비좁은 땅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다 밖을 몽상하는 일이었다.

 

신라 진평왕 9년 7월 바다 밖으로 떠나간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은 그 시기에 이미 바다 밖의 세계를 꿈꾼 인물들이었다. 대세는 친구 구칠에게 “이 좁은 신라의 산골 속에 파묻혀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못물 속의 고기가 바다 큰 줄을 모르고 조롱 속의 새가 산림 넓은 줄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장차 떼를 타고 바다에 두둥실 떠 오나라·월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아 따르려 하네. 명산에서 도를 구하여 만약 속태를 바꾸고 신선을 배운다면 바람도 잡아타고 훨훨 허공 위로 날 것이니 이야말로 천하에 신기한 놀음이요 장관 아니겠나?”[《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평왕조]라고 설득하여 둘은 드디어 바다로 떠났고, 결국 역사의 기록으로도 남게 되었다.

 

성격이 약간 다른 기록들 둘만 더 들어보자. 첫째는 강원도 고성 땅의 유동지가 동네 사람들과 동해로 미역 따러 나갔다가 풍랑에 떠밀려 고성으로부터 31만 리 밖 단구丹邱라는 절 도絶島에 표착한 사건이다. 그 섬에서 그들은 마찬가지로 고성 땅으로부터 표류해와 정착한 노인의 보호를 받고 50여일을 지냈다. 그 섬에서의 하루는 인간세계의 일 년에 해당하므로 표착 시점부터 50년이나 지났으니, 섬에서 그냥 머물러 지내는 게 좋을 거라고 노인은 말했다. 그 말을 거부하고 돌아와 보니 부모와 처자는 모두 죽고 손자마저 이미 늙어 있었다. 화식火食을 재개하면서 함께 돌아온 두 사람은 죽고 유랑은 단구에서 훔쳐 온 경액 덕분에 200살을 살았다는 것이다.[〈식단구유랑표해識丹邱劉郞漂海〉, 《청구야담》(권19), 학고방, 2017].

 

또 하나는 청주 상인이 제주도에서 만난, 다리 없는 노인으로부터 들은 경험담으로 젊은 날의 노인은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한 섬에 도착했다. 극심한 배고픔과 갈증에 한 집으로 들어갔다가 엄청난 체구에 검은 얼굴, 움푹 파인 둥그런 눈, 나귀 같은 음성의 식인거인食人巨人에게 일행 중 총각 한 명이 잡아먹힌 뒤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고, 배가 파선되면서 혼자만 살아남았으나 몹쓸 고기에 두 다리를 잃었다는 이야기였다.[〈대인도상객도잔명大人島商客逃殘命〉, 임명덕 《한국한문소설전집》(권 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대세와 구칠의 이야기〉는 큰 꿈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바다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음을 암시했으니, 그 때의 바다는 도전을 통해 극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애물로서의 공간이었고, 〈식단구유랑표해〉의 바다는 선계를 설정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킨 환상적 공간이었으며, 〈대인도상객도잔명〉의 바다는 제주도 남쪽 먼 곳 어떤 섬에서 식인종을 만나 고난을 당한 이야기로서 험난한 고통의 현실적 공간일 수 있다.

 

이것들이 상당부분 흥미로운 허구를 뼈대로 삼아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삶의 한복판에서 경험한 바다가 없었다면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다. 인간 현실의 복잡한 삶을 표본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것이 서사문학인데, 바다 이야기들 대부분은 삶과 바다가 하나로 결합된 서사가 그 주축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우리 문학에 나타나는 바다는 경험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중적 의미의 공간이고, 바다의 이런 성격은 동시대나 후대 서사문학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어왔다.

 

 

노래문학 속의 삶과 바다

 

원래 말로 만들어져 존속되던 이야기나 노래들을 문서로 기록한 것들이 우리 고전문학이다. 이야기나 노래에 쓰인 말들 대부분 일상의 구어口語였으므로, 고전문학이 특정 지식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모든 계층이 이야기와 노래에 쓰인 개념어와 사물 지시어 등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노래문학이나 이야기문학에 바다가 소재 혹은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들은 적지 않다. 향가·악장·가곡창사[시조]·가사 중 몇 작품들을 통해 바다의 의미를 찾기로 한다.

 

현실적 고통에 시달리던 중생들을 깨우치고 구세하려는 목적으로 지은 노래가 균여대사의 〈보현시원가普賢十願歌〉였다. 한시 아닌 일상의 구어로 부르고 향찰鄕札로 표기하여 중생들이 쉽게 부르며 얻은 깨달음을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 향가다. 이 노래의 몇 군데에 바다[海]가 등장하는데, 바다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기대지평이 명료하게 반영되어 있다. 〈보현시원가〉 중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의 ‘無盡辯才叱海(끝없는 말재주의 바다)’·‘際于萬隱德(갓 없는 덕의 바다)’,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의 ‘燈油隱大海逸留去耶(등유는 큰 바다 이루거라)’,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의 ‘佛體叱海(부처ㅅ바다)’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의 ‘際毛冬留願海(갓 모를 소원의 바다)’ 등에 나타나는 바다는 불교의 종지宗旨를 드러내기 위한 유의喩意이다. 관념적 용어이긴 하나 경험을 전제로 하지 않은 경우 노래로 불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현시원가》의 바다는 관념과 경험 양자를 절충하여 당대의 보편적 인식을 드러낸 사례이다. 당대에도 실재의 바다는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의 세계였고, 외경스럽고 위력적인 대상이었으며, 깊고 충만하고 무한·광활하며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의 근원이자 실체였다. 이런 관념적 바다와 달리 경험적 공간인 바다가 미래의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속악가사俗樂歌詞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사례도 있다. 이 노래 제6연의 “살어리 살어리랏다/바ᄅᆞ래 살어리랏다/ᄂᆞᄆᆞ자기 구조개랑 먹고/바ᄅᆞ래 살어리랏다”에서 ‘나마자기와 구조개를 먹는’ 바다는 ‘머루랑 다래를 먹는’ 청산[제1연]과 함께 한계상황에 부닥친 화자가 돌아와 살고 싶은 두 갈래의 이상향 들이었다. 세속에서 버림받은 시적 자아에게 바다는 청산과 함께 허여許與된 유일한 대안이자 선택지였던 것이다.

 

조선조로 넘어오며 의미심장한 첫 바다는 《용비어천가》 제2장[“ᄉᆡ미기픈므른 ᄀᆞᄆᆞ래아니그츨ᄊᆡ내히이러ᄇᆞᄅᆞ래가ᄂᆞ니”]에 등장한다. 건국신화·영웅신화의 모티프를 뼈대로 이루어진 교술적 서사시 《용비어천가》는 궁중 의례문학儀禮文學으로서의 악장이면서 노래문학의 모범적 선례이기도 했다.

 

깊은 샘물은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고, 바다는 자손만대 왕조의 번영을 상징한다. 원래 샘과 바다는 물을 공유하는 공간들이며, 그것들 모두 생생력生生力의 근원적 실체들이다. 샘물처럼 유래가 오랜 조상으로부터 바다같이 무한한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한 것이 이 노래다. 《용비어천가》 제53장[사해四海ᄅᆞᆯ 평정平定ᄒᆞ샤 길우희 양식糧食니저니]을 포함,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사해四海ㅅ믈이여 오나ᄂᆞᆯ 마리예 븟ᄉᆞᆸ고 태자太子를 셰ᄉᆞᅀᆞᄫᆞ니]·〈감군은感君恩〉[오백년五百年이 도라 사해四海ㅅ므리 ᄆᆞᆯ가] 등의 악장들에 두루 사해四海가 등장한다. 이 경우 ‘바다’라는 유의喩意와 ‘온천하’라는 취의趣意들로 이루어진 ‘사해’는 불덕佛德 혹은 왕이나 왕조의 치공이 미치는 범위를 최대한 넓혀 표현하려는 욕망의 소산이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 실제 바다가 지닌 무한無限[무변無邊]의 이미지로부터 나왔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관념의 바다와 현실이 결부되어 나타난 사례가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라고 할 수 있다. 〈춘사春詞 제1연〉[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ᄒᆡ비췬다/밤믈은 거의디고 낟믈이 미러온다/강촌江村 온갖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추사秋詞 제3연〉[수국水國의 ᄀᆞᄋᆞᆯ히 드니 고기마다 살져읻다/만경징파萬頃澄波의 슬ᄏᆞ지 용여容與ᄒᆞ쟈/인간人間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동사冬詞 제4연〉[간밤의 눈갠후後에 경물景物이 달랃고야/압희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희ᄂᆞᆫ 천첩옥산千疊玉山/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등에는 바다와 대비되는 현실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나타나 있다. 어로인漁撈人 아닌 작자가 어부漁父의 페르소나를 빌려 쓴 채 실제 바다에서 자신을 버린 세상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한 부분들 각각의 앞부분 두 구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다를 객관적으로 그려낸 내용인 반면, 마지막 구절들[강촌江村 온갖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 인간人間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 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은 인간세상과 대비되는 바다를 윤선도 자신의 감정에 적셔낸 것들이다. ‘먼 빛이 더옥 좋다’든가 ‘멀수록 더욱 좋다’는 것은 부정적인 세상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세상에 대한 윤선도의 혐오를 암시한다. 바다로 갈수록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니, 세상이 좋아 보이는 것은 현재 그가 세상으로부터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며 바다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사夏詞 제2연〉[년닙희 밥싸두고 반찬으란 쟝만마라/청약립靑篛笠은 써 잇노라 녹사의綠蓑衣 가져오냐/무심無心ᄒᆞᆫ 백구白鷗ᄂᆞᆫ 내 좃ᄂᆞᆫ가 제 좃ᄂᆞᆫ가]를 보면 작자가 비록 가어부假漁父에 불과하다 해도 전형적인 어부의 삶을 노래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앞의 노래들처럼 부정적인 세상에 대한 이상공간으로서의 바다를 노래하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바다의 활력을 제유提喩하는 백구와 시인의 자아가 합일되는 경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분명 초창기에 비중이 높았던 관념의 바다로부터 현실적이며 미학적인 바다로 옮겨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가사의 경우 다른 시가장르들과 달리 호흡이 길고 작품의 길이에 제한이 없었던 만큼 관념이나 압축보다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바다가 주류를 이룬다. 유배가사 중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니진항구梨津港口의 쥬즙舟楫을 뎡돈整頓ᄒᆞ야/동풍東風이 건듯 불며 쌍범雙帆을 놉히 다니/창파묘망滄波渺茫ᄒᆞ며 물밧근 하ᄂᆞᆯ일다/고도孤島ᄅᆞᆯ 지졈指點ᄒᆞ니 흑ᄌᆞ黑子만 계유하다/시야쟝반時夜將半ᄒᆞ매 광풍狂風이 졉텬接天ᄒᆞ니/듕뉴실타中流失柁ᄒᆞ야 호흡呼吸의 위ᄐᆡᄒᆞᆯᄉᆡ/장년長年 쇽슈束手ᄒᆞ고 쥬듕舟中이 실ᄉᆡᆨ失色ᄒᆞ니/묘연渺然ᄒᆞᆫ 이 내 몸이 ᄉᆞᄉᆡᆼ死生이야 관계關係ᄒᆞ랴], 박인로의 〈선상탄船上嘆〉[ᄇᆞ람조친 황운黃雲은 원근遠近에 사혀잇고/아득ᄒᆞᆫ 창파滄波ᄂᆞ 긴하ᄂᆞᆯ과 ᄒᆞᆫ빗칠쇠/(…)/대양大洋이 망망茫茫ᄒᆞ야 천지天地예 둘려시니 진실로 ᄇᆡ아니면 풍파만리風波萬里밧긔 어ᄂᆡ 사이四夷 엿볼넌고], 김인겸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이윽고 ᄒᆡ돗거ᄂᆞᆯ 장관을 ᄒᆞ여보ᄉᆡ/ᄉᆞ면을 ᄇᆞ라보니 어와 장ᄒᆞᆯ시고/구만니 우듀속의/큰물결 분이로ᄉᆡ/동남을 도라보니 바다히 ᄀᆞ이업ᄂᆡ/슬프다 우리길이 어ᄃᆡ로 가ᄂᆞᆫ쟉고] 등은 가사에 묘사된 바다의 모범적 사례들이다.

 

광풍 속에 키를 잃은 뱃사공들이 어찌 할 바 모를 정도의 위급하고 고생스런 상황을 그려낸 것이 〈속사미인곡〉이다. 이 작품에서 바다로부터의 가혹한 시련을 묘사한 점은 표류설화나 표해록들의 그것과 같다. 그러나 〈선상탄〉과 <일동장유가>에는 다른 모습의 바다가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좌절도사 성윤문 막하의 수군으로 참전한 박인로의 <선상탄>에는 천지를 둘러 나라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 같은 바다가 묘사되어 있다. 배만 없었다면 왜구들이 이 땅을 넘보지 못했을 거라는, 현실적이면서도 약간은 소극적인 바다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서정적 공간으로서의 바다가 <일동장유가>에는 등장한다. ‘어와 장ᄒᆞᆯ시고’, ‘슬프다’ 등 감탄구들이 정서의 핵심 포인트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바다의 서사적 흥분이나 긴장보다는 자아와 대상의 합일을 미학적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나가며

 

예로부터 다양한 산문들과 운문들의 배경으로 사용하거나 개별 작품들의 주지主旨를 드러내기 위한 이미지로 바다를 끌어왔다. 대부분의 산문들에서 바다는 위기와 시련으로 점철된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현실적 공간으로, 운문들에서는 이미지를 통해 작자의 미적 인식과 작품의 미학을 완성시켜주는 서정적 공간으로 각각 사용되어 왔다. 관념과 현실, 서사와 서정의 병행이나 착종錯綜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온 공간이 바로 바다였다. 심해深海 탐사 기술이 발달한 현재도 바다의 깊은 속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겉만 알고 속을 모르면, 그걸 안다고 할 수 없는 법, 바다 속을 모르니,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공포와 경외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며 당하는 시련은 인간의 공포와 경외심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바다의 맥을 잡는다거나 의미를 구조화시키는 것이 그다지 수월한 일은 아니다. 고전문학이 생산되고 소비되던 각 시대의 미의식과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 관념, 서사와 서정을 적절히 조합하여 바다를 아름답게 형상해낸 우리 고전문학은 매우 소중하다. 미친 듯 파도치는 대양을 일엽편주로 건넌다든가 사투 끝에 괴물 같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행위를 ‘대자연에 대한 인간의지의 승리’로 그려내는 현대 해양문학의 전통적 발판이 바로 고전문학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9. 15. 23:09

남도에서 만난 무서운 선비, 금남 최부 선생

 

 

 


<<최금남표해록>>


 

 


최부 선생의 표류 및 귀환 노정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회장) 박사로부터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파릇파릇하던 시절, <<금남선생 표해록>>을 읽고 언젠가는 그 길을 밟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흘러간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다! 끔찍한 표해(漂海)의 노정은 뒤로 미루고, 선생의 고향인 남도에서 그 분의 뜨거운 자취를 느껴보기로 했다.

 

93일 토요일. 추석맞이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는 만원이었고,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는 중이었다. 답사 참가자 12명을 태운 버스가 1차로 선 곳은 광주 광산구의 무양서원(武陽書院). 고려 인종 때의 어의(御醫)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후손인 선생을 비롯하여 최윤덕(崔允德)유희춘(柳希春)나덕헌(羅德憲) 등이 배향되어 있었다.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1927년 건립, 매년 음력 96일에 제향을 올리는 곳이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이택당(以澤堂) 좌우로 합의문(合義門)과 합인문(合仁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쪽에 낙호재(樂乎齋)와 성지재(誠之齋)가 좌우로 서 있었으며, 몇 계단 위에 무양사(武陽祠)가 높직이 앉아 있었다. 90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원 전체가 단정했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무양서원 현판

 

 


무양사

 

 


무양서원 묘정

 

 


측면에서 올려다 본 무양서원

 

 

거기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나주목 관아(금성관). 아직도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목사골 나주의 위용과 분위기는 당시의 모습인 듯 고풍스러웠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이 바로 선생의 탄생지였으나, 시간 상 돌아올 때 들르기로 했다. 선생을 배향한 강진의 강덕사(康德祠,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14/군동면 라천리 1044)에서 탐진 최씨 청년 화수회최윤영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창건된 강덕사에는 고려 인종(1122-1146) 때 왕을 호종하여 이자겸의 난을 좌절시키고 나라를 보존시킨 어의 최사전을 주벽으로, 선생과 함께 최표최극충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어둠이 깔린 해남 시내에 입성, 해남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주목 정수루(正綏樓)

 

 


나주목 의열각(義烈閣)

 

 


나주목 망화루(望華樓)(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

 

 


나주목 금성관의 내삼문


 

 


나주목 금성관(주로 사신을 접대하던 곳)

 

 


나주목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쯤 우측 성벽 옆의 각종 송덕비들

 

 


나주목사 행렬행차


 


나주목사 행렬 행차

 

 


나주목 행정 관할도

 

 


조선시대 20목 분포도

 

  


입구에서 보이는 강덕사

 

 


강덕사 대문

 

 


강덕사 묘정비

 

 


강덕서원 뜰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강덕사 주벽 최사전의 영정과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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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사의 아름다운 단청

 

 



강덕사 앞면

 

 

 
강덕사와 탐진 최씨 문중에 대하여 설명하는 후손 최윤영 선생(미래상사 대표)

 

 

관광호텔 밖으로 내다보이는 어둘녘의 해남읍

 

 

94.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선 답사단은 해남향교를 찾아 전교인 임기주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정위인 문선왕의 위패를 친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나, 바다를 건너 온 공자의 위패를 모신 시기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최초라 하는 강화도의 교동향교보다 이곳이 먼저라는 것이 그 분의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해남향교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일 뿐 최초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이 향교도 해남정씨와 결혼한 뒤 해남에 정착하여 관서재(官書齋)를 열고 후학을 기른 선생의 활동영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외손자 유희춘(柳希春),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 유계린(柳桂隣) 등을 해남유학의 핵심으로 꼽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해남군 지도

 

 


해남향교

 

 


해남향교 대성전

 

 


해남향교 주벽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자리

 

 


해남향교 공자(대성지성 문선왕)의 위패

 

 


해남향교에 모신 기국술성공 자사의 위패

 

 


해남향교의 각종 제기들

 

 


해남향교 진설도

 

 


해남향교 명륜당

 

 


해남향교 장서각

 

 

 

향교를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은 해촌서원(海村書院). 거울 같은 금강골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서원의 단아한 자태가 돋보였다. 선생과 함께 임억령(林億齡), 유희춘,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이 지역의 6현이 배향되어 있었다. 효종 3(1632) 임억령 선생이 처음으로 배향되었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마지막으로 배향되었으니, 여섯 분이 배향되기까지 무려 290년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도 금남 선생이 으뜸으로 모셔지고 있음은 그 분의 강학비(講學碑)가 우뚝 솟아 있는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해촌서원

 

 


해촌서원

 

 


해촌서원과 금강골 저수지

 

 

 


해촌서원의 최부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의 최부 선생 강학비

 

 

해촌서원을 뒤로 하고 달려간 곳이 송나라가 해로를 통해 고려 땅에 처음으로 닿았다는 관두량(關頭梁). 중국과의 국제적 무역항이자 제주도와의 교역항이었다. 송나라의 사신들도, 상인들도 모두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니, 당시 이곳의 번화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생이 제주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성종 18(1487) 1111일 관두량에 도착해 다음날 제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질펀하게 넓은 바다가 고요하니, 당시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손색이 없었으리라. 지금은 방조제로 막혀 그 옛날 배가 닿고 떠나던 포구는 마을과 논으로 바뀌었고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내륙의 수면 위로는 하얀 전어들이 뛰고 있었다. 관동리 주민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 몇 분이 구전해오는 마을의 역사를 조심스레 들려 줄 뿐 이곳에 남아있을 선생의 행적을 알아낼 재간은 아예 없었다.

 

 

 


관두량 포구와 이를 설명하는 신춘호 박사

 

 


포구의 한켠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관두량 방조제 안쪽의 내륙 수로

 

 


관동리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함께

 

 

관두량을 떠나 백포리의 윤두서 고택과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을 들러 무안 지역으로 이동, 금남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이른바 늘어지 마을의 양지바른 산록이었다. 선생 부부는 부모 묘소 아래에 자리잡고 앉아 굽이도는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초가을의 햇살이 내려 쪼이는 명당의 음택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선생께 하직인사를 올린 뒤 한참을 달려 나주군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 있다는 선생의 생가 터에 도착했다. 조심조심 마을길을 달려 막다른 곳에 도착, 촌가의 담장 옆을 통해 올라가니 생가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 관리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주의 한촌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다가 인근 무안에 묻힌 선생. 그 분의 일생은 당시 중세 조선의 정치적 격랑을 거슬러 가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림파 문인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선생의 무덤과 생가 터는 차로 달려 30여분 거리였다. 그 거리는 삶과 죽음의 거리, 아니 시종일관 생사가 교차하던 선생의 일생이었다. 과연 선생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녹우당의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녹우당 현판

 

 


고산 윤선도 선생 사당

 

 


금남 선생 묘소가 있는 '늘어지 마을' 표석

 

 


금남 선생 부자묘 입구

 



금남 선생 사적비

 

 


금남 선생 묘소

 

 


금남 선생 묘소에서

 

 


늘어지 마을의 아주머니들

 

 


금남 선생 생가터 비석

 

 


금남 선생 생가터 앞에 열린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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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초창기 조선조의 사림파는 유교의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결국 훈구파를 누르고 노론을 형성하여 망할 때까지 조선조를 끌고 나간 사림파. 서슬 퍼런 선비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나간 인물들이었다. 제주에서 부친의 부음을 받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다에 표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선생. 북경에 호송되어 황제에게 사은하게 되었을 때도 친상을 당한 자식으로서의 예가 아님을 내세우며 옷 갈아입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은 강요에 의해 잠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은 선생이었다.

 

선생은 귀환 후에도 왕명으로 8일 만에 표해록을 작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 다음 즉시 내려가 상주로서의 임무를 다하면서 왕명으로 중국에서 목격한 수차(水車)를 제작하기도 했다. 1년 후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선생은 4년 동안이나 복을 입게 된 것이다. 탈상 후 선생을 아끼던 성종이 벼슬을 내리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의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 표류한 뒤 중국에서 많은 시문을 지은 것, 비록 왕명에 의한 일이긴 하지만 즉시 빈소로 달려가지 않고 여러 날 서울에 머물면서 표류기를 쓰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애통함이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벼슬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왕에게 대들었으니... 당시의 젊은 신료들 또한 선생과 같은 류의 무서운 원리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성종이 일찍 하세하고 연산군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무오사화의 와중에 점필재의 문하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6년 뒤 갑자사화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 끔찍한 참형을 받고 효수까지 당했다. 51세의 창창한 나이로, 파란 많은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남도의 이곳저곳에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선생의 자취는 인간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교과서였다. 조만간 제주-중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행적을 다시 밟아볼 필요성을 절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때가 마냥 기다려지는 지금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