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3. 28. 17:48

 


백규서옥을 방문한 아리안 군

 

 


백규서옥을 방문한 유리 군

 

 

언어구사의 천재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몇 년 전 고려인들을 찾기 위해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간 적이 있다. 공항에서 호텔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과 자작나무 가로수 길이 인상적이었다. 벨라루스는 1922년 소련에 편입되어 1991년까지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존속하다가,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 국가 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창설을 주도한 나라다. 당연히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였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를테면 다수의 민족국가들 속에 파묻힌 육지 속의 섬과 같은 나라였다.

민스크 도착 다음 날 벨라루스 국립대학 한국어과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학생들을 통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 사람들의 혈통과 말이었다.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국어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영어를 썼는데, 소통의 정도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얼굴 모습들은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이었으나, 피부 한 꺼풀만 벗기면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났다. 다음 날부터 학과에서 소개해준 두 명의 학생들이 민스크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한 사람은 아리안(Aryan), 또 한 사람은 유리 킴(Yuri Kim)이었다.

 

#1 아리안의 할머니는 이란인으로서 현재 테헤란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미처 묻지 못했는데, 그의 얼굴 모습으로 보아 할아버지가 아리안족인 듯 했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는 이란과 인도계의 혼혈일 것이고, 그 혼혈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이 아리안이었다. 내 관심은 그가 지닌 외국어 능력이었다. 그는 이란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에 이미 능통해 있었고, 막 일본어에 손을 대고 있었음은 물론 중국어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자도 제법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머니로부터 젖을 받아먹듯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를 마더 텅(mother tongue)으로 받았고, 할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이란어를 받았으며, 중학교~대학에 이르는 학교 교육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한국어를 익힌 것이었다. 대개 마더텅으로 두, 세 개의 언어를 습득한 경우, 마음만 먹으면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그들로부터 알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한국에 와서 모 대학의 어학코스를 최우등으로 마치고 돌아가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대학원을 이수하면서 어학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2 내가 벨라루스에 머무는 동안 내게 친절을 베푼 또 하나의 벨라루스 청년이 유리였다. 워낙 한국어에 출중하여 당시 학부생의 신분임에도 한국어 강사로 활약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려인이긴 했으나, 할아버지 자신이 고려 말을 버린 지 오랜 상태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서로 왕래도 없었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한국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자마자 마스터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 내력이 궁금하여 가계를 캐물었다. 할아버지는 고려인이고 할머니는 타타르인으로서 카자흐스탄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벨라루스로 이주하여 벨라루스인 여자와 결혼하여 유리를 낳은 것이었다. 화학 전공자였던 외할아버지와 프랑스어 음운론 교수였던 외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는 편집 기자였고, 아버지는 가구 및 건축 디자이너였다. 그러니 그가 태어나자마자부터 접했을 언어적 다양성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를, 아버지로부터 카자흐스탄어와 러시아어 및 벨라루스어를, 그리고 간혹 아버지로부터 단 몇 단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고려어의 냄새 정도는 맡았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3개 국어를 마더텅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그 후 자라는 과정에서 다민족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학교교육을 통해 여러 외국어들을 덤으로 배우게 된 것이었다. 벨라루스어, 러시아어, 불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그는 지금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일생을 노력해야 겨우 영어 하나를 외국어로 구사하게 되는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이었다. 참으로 부러운 그들이었다. 간혹 외국에 나가면서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을 흔히 만난다. 그러면서 외국어에 관한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뒤처진 사람들이 또 있을까?’라는 한탄을 매번 하게 된다. 그러면서 말은 혼임을 깨닫는다. 혼은 물려받는 것일 뿐 흉내를 내거나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3 최근 나에게 이쁜손녀가 하나 생겼다. 이제 돌을 갓 지난 녀석을 보며 나는 언어 학습의 과정과 실상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녀석이 말을 배워가는 과정과 방법이 참으로 신기하다. 제 어미가 젖병을 물리는 동안 녀석의 눈길 멈추는 곳이 예사롭지 않다. 바로 엄마의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입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었다. 녀석은 무얼 보고 듣는 것일까. ‘자 이제 다 먹었네? 그럼 일어나 트림을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엄마 입술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는 듯 했다. 말하자면 녀석은 엄마 입술의 움직임만으로도 그 말을 알아듣겠다는 듯 반응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묘했다. 그러다가 엄마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한 단어, 두 단어, 세 단어...녀석이 흉내 내는 엄마 말의 분량은 주간 단위로 늘어나는 것이었다.[나는 사실 짧으면 한 주, 길면 두 주 정도에 한 번씩 녀석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 사실은 매일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세 음절짜리 단어들을 흉내 내어 구사하기 시작했고, 문장 단위의 말을 내뱉으려 할 땐 , 하고 소리치며 손짓을 하기에 이르렀다. 말 뿐 아니라, 행동거지도 제 부모와 우리를 흉내 내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따라쟁이라는 애칭으로 놀리기도 하는데, 바로 그 점에 언어 학습의 요체가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한 이래 말이란 그렇게 전승되어 온 것이다. 젖을 먹을 때 엄마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마더 텅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다중언어 구사자(multilingual speaker)’라면, 말에 따라 순위는 생기겠지만, 그 언어들이 그대로 아기에게 전수되지 않겠는가. 바이링궐(bilingual), 트라이링궐(trilingual) 등 흔한 다중언어 구사 엄마들이야 기분 내키는 대로 자유자재로 여러 언어들을 갖고 아기와 소통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엄마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이미 다중언어 구사자가 될 소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의 실상을 보자. ‘단일 언어를 쓰는 단일민족이란 말을 자랑처럼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말을 쓰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소통 또한 더 잘 되겠지.’라는 우리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세계화의 시대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같은 말을 쓰는동족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으르렁거리는 곳이 바로 한반도다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좌파와 우파 간에 툭하면 같은 말을 무기로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벌이는 곳이 바로 이 나라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벌이는 데, 대체 단일어를 쓰는 단일민족이 무슨 자랑거리란 말인가.

 

눈만 뜨면, 베트남에서 필리핀에서 시집 온 새댁들을 무시하고 구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들이 한국어를 잘 몰라서 말이 안 통하니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우리말을 모르는 것을 차이 아닌 차별의 근거로 내세우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더 고약한 것은 우리말을 모르는 백인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우리말을 모르는 유색인들은 매몰차게 무시하려 드는 일이다바로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못난 식민주의 근성 때문이다.

 

그들이 한국어를 잘 모르면 우리가 먼저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필리핀어를 배우면 안 되나? 우리 자식들에게 시집와서 손자 손녀들을 낳아주는 베트남 필리핀 며느리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그러니 외국인 며느리들은 구박의 대상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떠받들어야 할 보배들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낳아 이중언어 구사자로 키워줄 훌륭한 어머니요 선생님들 아닌가. 아이를 낳아 젖 먹여 키우는 과정에서 우리말과 베트남 말을 '마더 텅'으로 동시에 전해준다면, 나중에 그들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우수한 국제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과 나라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우린 그들을 소중하게 대접해야 한다. 그들이 당장 우리말을 못하고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가 먼저 그들의 말을 배워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잡아두고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그들이 우리보다 좀 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우리말에 서툴다는 이유 때문일 텐데, 그들 역시 우리에겐 소중한 보배들이다. 우리가 마다하는 궂은 일들을 달게 맡아하는 그들. 생각하기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참 못 말릴 정도로 무지하고 거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한국인들이다. 인종의 전시장인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나가서는 입도 뻥긋 못하면서, 좁디좁은 내 땅에만 들어오면 안방 호랑이 노릇을 잘도 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성이 바로 언어능력 콤플렉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인데, 이런 판단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 있으면 말씀들 좀 해 보소서!

 

 


벨라루스 국립대학에서 유리 김, 샤두르스키 학장과 함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밥을 받아먹는 YB

 

 


엄마를 흉내내는 YB

 

 

YB and her Mom walking on the road by the Han River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7. 28. 15:00

 

                      

<민스크의 벨라루스 오페라 극장>

 

‘저녁이 있는 삶’

                                                                                                                                                          백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각다귀 떼 날아다니듯’ 지금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것도 그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영혼이 지워진, 공허한 말들이 귓전을 때리고 사라지는 가운데, 얼마 전부터 우연히 내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한 마디가 있다.

   ‘저녁이 있는 삶’!

 알고 보니 통합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손학규 선생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가 드물게도 정치인들 가운데 내가 호감을 갖고 있던 인사라서 그랬을까. 그 말을 듣는 처음부터 무턱대고 콧방귀를 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의 정치권’. 바닥이 바닥인지라 처음엔 그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 말이 내 마음에 일으킨 파문은 파도로 커져갔다. 그러다가 결국 가수 이태원이 세상 사람들에게 넌지시 타이르듯 불러주던 <솔개>의 삶을 동경해온 내게 ‘저녁이 있는 삶’이란 이 말은 참선 수행장(修行場)에서 고승이 질러대던 일종의 ‘할(喝)’*로 바뀌고 만 것이다.
최근 그의 말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사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현학적 허세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감옥’에 갇힐 것 아닌가. KS로 호칭되는 국내 최고의 중⋅고⋅대학을 거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가끔 대중 스피치에서 그 점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그가 책에 풀어 놓았을 현학의 덫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수라장 대선 판에서 모처럼 쓸모 있는 말 한 마디를 건졌는데, ‘현학의 수사(修辭)’로 망칠 일이 있겠는가.  
   ***
 몇 년 전 러시아 생뜨 뻬쩨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입장료가 비싼 극장이었는데,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반반이었다. 저녁 무렵 정장차림으로 좌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인상적이었고, 장면 장면 ‘브라바!’를 외치는 그들이 신기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잘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  
 얼마 전 다녀 온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 저녁시간에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를 찾았다. 컴컴한 시 외곽지역에 환하게 불을 밝힌 원통형의 그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더 놀란 것은 혹시 빈자리가 날까 기대하며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무대 위의 공연에 몰두하던 어떤 할머니는 뒷좌석에서 소곤대던 여학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참으로 품위 있어 부러운 그들의 ‘저녁 시간’이었다.
 대조적으로 미국의 도시들은 ‘알 수 없는’ 저녁시간들을 보내는 것 같았다. 6시쯤 되자 도시들의 다운타운은 약속이나 한 듯 텅 비어 버리는 것이었다. 텁텁한 고요와 노숙자들의 활보만이 그 공간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저녁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지금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
 몇 번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종로와 명동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다. 그곳에 생생한 ‘한국의 저녁’이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술집들, 해장국집들, 음침한 간판의 룸살롱들, 모텔들... 비틀거리는 취객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한 복판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사람들, 빵빵거리는 승용차와 택시들이 뒤엉긴 채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어떻게든 낮 시간을 보냈을 그들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찬란한 저녁[혹은 밤] 시간’을 보내는지 같은 한국인인 나도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최근에서야 저녁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비뚤어진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결같이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다정한 저녁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언론매체들의 보도를 접하고 나서였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연구실에서 불을 밝혀야 하는 것’이 교수직이라고 생각해오던 내게 일종의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아, 나는 출처불명의 그런 말 한 마디에 매여 지금까지 내 가족으로부터 ‘저녁시간’을 빼앗았구나! 나는 ‘나 혼자만의 저녁’을 위해 ‘우리 모두의 저녁’을 희생시켰구나!
 때늦은 후회였다.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나름대로의 세계를 가꾸고 있고, 아내는 그런 나를 체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닭장을 벗어난 병아리들을 모이로 유인하여 불러들이듯, 새삼 그들을 우리 안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 올 수도 없는 현실. 미물로서 어찌 해볼 수 없는 게 위대한 시간의 작위(作爲)인데, 나는 지금 시간의 준엄한 일갈(一喝) 앞에 무슨 같잖은 저항이라도 해볼 심산이란 말인가. 어쩌면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후회와 함께 밀려들었다. 그 구멍을 지금 와서 어떻게 메운단 말인가. 내 알량한 저서와 논문 한두 편이 역사와 사회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장래를 비춰주는 것도 아닌데, 좁좁한 연구실에 갇혀 젊은 날의 찬란한 저녁시간들을 불태우고 말았으니, 이 미련한 처사를 어떻게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
 손학규 선생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든 그렇지 않든, 아니 대통령으로 선출되든 그렇지 않든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껏 대한민국 국민들이 잊고 있던 소중한 삶의 지표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 표어를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정치를 펴야 할 것이다. 이 표어를 대선의 국면에서 벗어났다고 쓰레기통에 쳐 박아서는 안 된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 표어를 소중히 갖고 있다가 당선되는 순간 새 정부의 국정지표 맨 위쪽에 놓아야 할 것이다. <2012. 7. 28.>  


*불교 선종(禪宗)에서 고승이 참선하는 학승들이나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질타하는 일종의 고함소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발하는 것. 즉 말⋅글⋅행동 대신 드러내는, 깨달은 자의 소리를 말함.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2. 24. 17:18

 <1945년 김병화 농장의 김남견과 레 베라 드미트로브나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는 소인예술단(취주악단)>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 막달레나>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아 제법 부지런히 돌아다닌 몇 년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벨라루스 등 쉽게 갈 수 없는 나라들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들은 없다!’는 것이 오랜 방랑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빛바랜 사진 몇 장과 실실 부서지는 몇 권의 책자들에서나 그들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 온 고려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주 앉아 보아도 모습만 같을 뿐, ‘소통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엄혹했던 구소련 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절망에 갇힌 민족의 탈출구를 공산주의에서 찾고자 그 이념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조명희. 그를 추앙하여 문학에 빠져들었다가 22년 간 북극 유형 및 강제노동의 쓰라림과 후유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강태수. 그들은 원동으로부터 가축이나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의 황당한 집단체험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오직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속히 귀여운 아기들의
어머니가 되며
남편의 던지는 웃음에
두터운 정으로 대답하며
또 우리에게만 부족되지 않던
그 무엇으로 보태면서
무한히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죄인”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기를!
이곳은 모두다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줄 알어라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네철 내내 비가 내리겠는가.
사납던 징기스한의 무덤은
오늘도 나지지 않으며
로마에 불지르고도
“오, 나의 사랑하는 로마여!” 하고
웨치던 네로의 혼은
이날도 저주의 무쇠 탈 쓰고
아마 지옥에서 헤매리라
악은 백 년 후에도 발각되며
선은 민중의 부르는 노래에
오래오래 담겨진다.

-강태수 <마음 속에 넣어 두었던 글> 중에서


고려시인 강태수는 북극유형이란 마지막 길을 떠나며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이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뿐, 자신은 죄인이 아님을 절규한다.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사계절 내내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징기스칸 및 네로의 악행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인물은 징기스칸이나 네로가 결코 아니다. 그가 이들을 통해 암시하고 싶었던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이주와 북극 유형을 통해 젊음과 사랑을 잃은 그였다. 그러니 그에게 스탈린보다 더 극악한 군주는 없었을 터. ‘저주의 무쇠탈을 쓰고 지옥에서 헤매리라’는 그 저주의 대상은 네로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야 시인은 자신이 몸담아 온 공간, 그간 생존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이런 저주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조명희나 강태수만 그러했을까.
***
1세대 고려인 한 분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아간 키르기즈스탄. 비쉬켁 국제공항에 도착해 연락하니 그 분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중이었다. 이처럼 어딜 가도 1세대 고려인을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기껏 2~3세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말을 잃으니 우리 역사를 잃게 되고, 우리 역사를 잃으니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피차 민족적 동질감을 공유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도 그저 이민족을 만나듯 서로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3~4세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급속히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 밖에 흩어져 살며 정체성을 상실한 한민족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을 보며 2천년의 지독한 디아스포라를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강고한 모습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겨우 1~2세기의 디아스포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 된 컴퓨터 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는 말과 정신의 씨앗을 움틔우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뒤통수에 와 닿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면서 이들 나라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혹시 우리 모두의 기억을 되살려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한 의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단계에서 당장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수명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의 수명은 영원하다!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 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나라들 사이에 이념의 장벽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개인들은 이해관계의 장벽을 나날이 공고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의 물결은 민족주의를 능가할 정도다. 우리의 과제는 소아(小我)를 넘어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발판으로 바람직한 내일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획은 그런 소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고려인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했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것들 가운데 1차적으로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발간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강호 제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고대한다.

                               2012. 1.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이 글은 최근에 펴낸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있었네!>>의 머리말입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0. 26. 18:29


 <플라니에타 호텔>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김마리아>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박비탈리>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박아나똘리>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고려인 협회 이기미 회장과 김유리 교수>

 <벨라루스 고려인 협회 이기미 회장>

<벨라루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과 함께>

 <벨라루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과 함께>

 <벨라루스대학교 국제관계학과 빅또르 샤두르스키 학장과 함께>

  <벨라루스대학교 한국학센터>

 <민스크 시내의 한 전통교회>

 <민스크 독립광장의 시몬과 헬렌 성당>

  <민스크 독립가도(Independence Avenue)>

  <민스크 시내 전통시장>

  <민스크 시의 오페라 극장>

 <점심으로 먹은 샤쉴릭>

 <민스크 시내에서 점심을-아리안과 함께> 

 <뎨르쥔스크 극장>

 <뎨르쥔스크 극장>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승무>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 중인 무용단>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이대 무용과  학생들과 관객들>

  <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에서 사진을 찍는 신혼커플>

 <이반 비탈리 작 "푸쉬킨"-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작자미상의 "전쟁 후 돌아오는 사람들"-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미르성>

  <미르성 안에서>

  <미르성 조감도>

  <아름다운 벨라루스의 늪지대>

  <광야를 달리는 벨라루스의 들소들>

  <미르성에서 안톤, 올랴, 백규>

  <미르성의 우물 앞에서 안톤, 오교수, 올랴>

  <미르성의 식당에서 백규와 올랴>

  <미르성의 러시아 정교회 앞에서 오정혜 교수, 백규, 올랴>

  <미르성의 러시아 정교회>

  <민스크 시내 승리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

 <민스크 시내 전통시장에서>

 

<벨라루스 대학 관계자들, 왼쪽부터 김유리교수, 백규, 알리악스 동방학과장, 길경숙 교수>




아름다운 벨라루스, 그리고 여덟 가지 만남들

 

조규익

 

먼 길이었다. 루프트한자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을 떠난 시각이 19일 오후 1시 30분. 중간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건 정확히 12시간 후인 한국시각 20일 오전 1시 30분. 두 시간 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나 민스크에 도착하니 현지 시각 19일 밤 11시 45분이었다. 만 17시간을 날아온 셈. 호텔에 여장을 풀고 짐 정리를 마친 시각이 새벽 2시였다. 대충 자고 일어나 다음 날 오전 10시부터 이곳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샤갈의 고국, 제법 눈이라도 내릴 법한 쌀랑하고 음산한 날씨가 김춘수의 시를 떠오르게 했다.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에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1887년 7월 7일, 벨라루스 비텝스크 인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샤갈. 대상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춘 그의 화풍이 어쩌면 햇살의 세례를 마음껏 받지 못하는 듯한 벨라루스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는 생각이리라. 이 쌀랑한 추위, 어찌 3월뿐이랴. 한 여름에 내리는 눈도 볼 수 있을 것이니. 시인 김춘수의 감성이 새롭게 빚어낸 페이소스가 폐부에 깊숙이 스며드는 나라를 나는 찾아온 것이다.

 

#1 낙후된 시설, 그러나 반짝이는 학생들

 

10월 21일. 벨라루스대학교 국제관계학부 한국학센터의 사람들을 만났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 민스크 대학의 따찌아나 교수까지 참석했다. 특히 이 학과의 핵심 길경숙, 오정혜, 김유리 교수 등과 학생들은 똘똘 뭉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강연제목은 ‘한국문화의 특성과 세계화의 실상’이었지만, 학생들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준비해간 교과서적 논의는 사라지고, ‘한-벨라루스’ 두 민족의 공통점이나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 경험한 내 생애와 꿈을 바탕으로 벨라루스의 젊은이들이 가꾸어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

참으로 선량하고 순박하며 ‘똘똘한’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환상적인 것은 그들이 타고나다시피 한 어학 능력이었다. 구소련의 일부로서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 북쪽으로는 발트 3국,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벨라루스는 ‘대륙 속의 섬’이었다. 독립국가연합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이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다양한 민족들과 교류해온 증거는 이 젊은이들의 말과 피부, 그리고 눈동자에 살아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벨라루스어와 함께 러시아어를 어머니의 젖과 함께 먹고 자란 그들이었다. 부모나 조부모가 속한 민족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의 세례 속에서 이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영어나 불어 독일어 등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아버지가 이란인, 어머니가 벨라루스인이고, 지금 할머니가 테헤란에 살고 있는 다문화 출신의 청년 아리안.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영어, 이란어,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드디어 한국어까지 구사하게 된 수재였다. 이미 두 세 개의 언어를 막힘없이 구사하는 그들은 미지의 한국 교수에게 대단한 호기심을 표했다.

한국의 몇몇 대학들이나 국제교류재단 등에서 학비와 생활비의 지원을 받아 유학하게 된 상당수의 학생들은 장밋빛 코리안드림들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주어진 ‘한국행’을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마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꿈이 얼마나 현실화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그런 꿈들이 환상에 그치지 않도록 도와줄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벨라루스 대학 국제관계학부 샤두르스키 학장도 동양언어학과 알리악사놀리 학과장도 학생들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쉽진 않겠지만, 벨라루스대학이 현재의 정체(停滯)를 조만간 탈출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기로 했다.

대학의 건물은 낙후되어 성냥갑만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를 포기한 채 7층, 8층을 도보로 오르내리면서도 힘들어 하지 않고, 점심시간을 갖지 못할 만큼 강의실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들이 바로 벨라루스의 미래였다.

 

#2 수줍고 조용한 고려인들

 

민스크 체류 둘째 날. 벨라루스 방문의 주목적인 고려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고려인협회 이기미 회장의 주선으로 고려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중년의 남녀들과 만날 수 있었다. 러시아어권의 고려인들을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몇 마디 고려 말이나마 꺼내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몇 번이고 채근해야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몇 마디 고려 말들을 꺼내는 그들이었다.

왜 그럴까? 사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의 그늘에 살아오면서 동족을 만나는 일과 조상들의 말을 함께 나눌 상대를 만나는 일이 그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일까.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쭈뼛거렸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말을 못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가혹한 동화정책으로 인해 고려 말을 잊어버린[아니, 잃어버린] 상처로부터 생겨나는 강박관념이 그 두 번 째 이유이리라. 가끔 반죽 좋은 고려인 아줌마들의 경우 고려 말을 하려고 애쓰는 수가 있긴 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으레 “고려 말이 틀릴까봐 겁이 납지비!” 하며 꽁무니를 빼곤 했다.

우리가 흔히 외국인 앞에서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은 혹시나 ‘말이 틀릴까봐서’이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을 쓰면 어쩌나,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나’ 등 이런저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늘 ‘틀려도 좋으니 과감하게 입을 벌려 말하라’ 고들 하지만, 인간의 자존심과 수치심은 그런 용기를 억누르기 일쑤다. 말하자면 고려인들이 동족을 만나면서도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는 것은 그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용기를 내어 입을 떼는 고려인들도 대부분 어미(語尾) 부분은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 억양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제 부모나 조부모가 당했던 강제이주의 트라우마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워진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데서 느낄 수밖에 없을 긴장이나 조심성은 대단한 듯 했다.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박비탈리, 박무사, 이기미, 김유리엔나, 김엘비라, 박아나똘리 등 고려인 어른들. 이 중 회장인 이기미 선생만 뺀 다른 사람들은 대개 고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고려 말 쓰는 것을 어려워했다. 부모 대에서 한 번의 혼혈이 이루어진 젊은 고려인 김유리가 어린 사람들에게 고려 말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인 것은 젊은 혈기와 자신감 덕분이리라. 대부분 구소련의 정책에 순응하여 살아남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의 처지에서 자식들에게 고려 말을 강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고려 말을 빨리 버릴수록 그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길이었을 것이고, 그 방법만이 자신들의 살길이었음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내 눈 앞에 나타난 고려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분명한 결과였다.

 

#3 오페라 극장에서 만난 벨라루스의 예술혼

 

10월 21일 밤. 벨라루스 대학교 국제관계학과의 몇몇 교수와 학생들 덕분에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카르멘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멋지게 세운 하얀색의 오페라 극장에 도착하니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밀려드는 인파가 인상적이었다.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늘상 해온 방식이라는 듯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급한 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를 싼 값에 인수하기도 했다.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나 같은 문외한이 듣기에도 정상급임을 느낄 수 있었다. 벨라루스의 오페라나 발레 수준이 유럽에서 정상급이라고 자랑하는 인나 양의 말이 허언(虛言)은 아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발레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할 뿐 아니라, 인근의 국가들에서도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한 주일의 일과가 끝나는 금요일 밤, 이곳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며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민스크 시민들의 삶의 단편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허리 구부정한 노인들까지 좌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소리를 감상하는 데 방해된다는 노기(怒氣)의 표현인 듯, 소곤대는 뒷좌석의 초등학생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경고하는 한 노파의 거동, 막이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로 출연자들을 격려하는 관람객들의 적극적 참여 등이 이들의 문화적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민스크 시민들의 예술적 안목이 빛을 발하는 현장이었다.

 

#4 깨끗하고 기품 있는 도시미학

 

건물과 도로,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 구성의 3요소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건물이란 공간이 필요하며, 물류나 이동을 위해 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들의 질서의식 혹은 매너다.

‘백색의 깨끗함’으로 빚어낸 도시미학의 정점이라는 것이 벨라루스 특히 민스크의 첫 인상이었다.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껏 상당수의 나라들과 도시들을 구경했다. 구소련권의 국가들 대부분은 무겁고 침침하며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유럽의 도시들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칙칙함과 무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에 비해 밝고 단정하면서도 역사성까지 갖춘 것이 민스크였다. 민스크는 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대부분 파괴된 터전 위에서 새롭게 계획된 도시다. 그래서인지 도시 전체에서 분명한 계획성이 느껴졌다.

우선 색깔이다. ‘벨라루스’란 말이 ‘하얀 루시[Белая Русь 벨라야 루시]’에서 유래된 것처럼 이 나라 사람들이 흰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도시의 배색(配色)에서 알 수 있었다. 대부분 하얀 피부를 갖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특히 여성들]은 흰옷을 좋아하고 주택의 벽도 희게 칠하는 듯 했다.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대충 지은 경우가 없었다. 특이한 디자인과 채색으로 한껏 멋을 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 집만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드러지면서도 다른 건물들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청과 벨라루스대학 본부, 민스크 호텔, 시몬과 헬렌 성당 등이 둘러싸고 만들어진 독립광장으로부터 독립가도[獨立街道 ; Independence Avenue]는 시작된다. 유럽을 통틀어 가장 긴 가도라 하는데, 길을 경계로 양 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베이지색을 바탕으로 한 흰색 위주의 배색이었다. 건물들은 높아야 3~4층. 주변 건물들과의 밸런스를 해칠 만큼 두드러지게 높은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균형 잡힌, 이른바 절제의 미학이었다. 절제의 미학을 완결시키는 요소가 바로 기껏 베이지 톤을 넘지 않는 흰색의 바탕의 건물들이었다. 주황색의 시몬과 헬렌 성당이 오히려 이색적으로 보일 만큼 민스크 시내의 색채미학은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백색의 조화로부터 구현되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도시의 야경(夜景). 높고 낮은 건물들에 일일이 조명등이 설치되어 도시 전체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는 사실이었다. 흡사 어둡고 칙칙한 것을 혐오라도 한다는 듯, 백색과 은은하게 어울리는 음영(陰影)의 조화가 도시를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도시의 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나 아닐까.

 

#5 벨라루스의 미술을 훔쳐보고, 한국 전통예술의 전도사들과 만나다

 

10월 22일. 고려인협회의 이 회장과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오 교수의 권유로 오후 4시 뎨르쥔스크 시에서 열리는 고려 춤 공연을 참관하기로 하고, 비는 짬을 이용하여 오전 10시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학생 아리안의 안내로 벨라루스 국립 예술박물관을 찾았다. 큰 규모의 건물에 다양한 시기와 다양한 민족 및 국가들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를 비롯, 브론즈 상, 목각, 도자기, 이꼰 등 각 시대의 생활ㆍ종교미술부터 파인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과 성향의 예술작품들이 하나의 공간에 배치됨으로써 드러나는 조화와 융합이 감동적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엄청난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을 두루 보아온 입장이지만, 벨라루스 역시 유럽 권 국가의 예외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의 창조 못지않게 보존과 전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보아야 할 예술은 많고 그것을 향유할 시간은 턱 없이 짧음을 한탄하며 벨라루스 미학의 호수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립예술박물관의 관람을 중도에 포기하고, 이 회장의 차에 편승하여 1시간 남짓 달려간 곳이 작은 시골 도시 뎨르쥔스크였다. 그곳 공연장은 썰렁했으나, 곧바로 주민들이 들어차면서 온기가 돌았다. 앙증맞게 꾸민 무대 위로 우리의 전통무원들이 등장했다. 우리 전통문화 전파의 사명을 지고 이곳에 파견되어 온 5명의 이화여대 무용과 학생들[윤서희, 김아람, 김민지, 김수지, 최윤선]이었다. 태평무, 승무, 부채춤, 장고춤, 검무, 북춤, 사물놀이 등 기억하기에도 벅찬 레퍼토리들이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곳에 파견되어 우리 전통예술의 보급 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과 함께 등장한 고려인, 벨라루스인, 한인 소년ㆍ소녀 등이 하모니를 이루어 펼치는 춤사위는 썰렁하던 공연장의 냉기를 녹여주었다. 객석은 주로 벨라루스인들이 채웠고, 손님으로 초대 받은 우리들과,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고려인들 몇몇도 섞여 있었다. 프로급인 이화여대 학생들에 비해 나머지 요원들은 약간 어설펐으나, 감동으로 말을 잃은 채 주시하는 벨라루스 주민들[특히 어린이들]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천상의 요정들로 비쳤을 것이다.

객석 앞자리에 앉아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벨라루스의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뿌린 씨앗이 싹터 미래의 어느 시기엔 그들 스스로 한국의 전통예술에 빠져 들 날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이들의 표정에서 읽었다.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이역만리 벨라루스로 날아와 그들에게 우리 전통예술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마음이 통하는 이웃으로 만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훌륭하도다, 이화여대 춤꾼들의 멋진 춤사위여!

 

#6 벨라루스 화폐와의 만남

 

외국에 나가는 경우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현지 화폐에 적응하는 일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더하다. 그런 나라들일수록 화폐의 가치가 턱없이 낮아 기준 화폐보다 액면가는 엄청나게 높은 반면 실질 교환가치는 아주 낮다. 말하자면 물가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한 두 해 전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미국 달러화를 갖고 있었으나, 가게에서 물 한 모금 살 수 없었다. 현지 화폐인 ‘숨’을 확보해야 하는데, 은행의 환율로는 큰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당시 그곳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실질적인 환전상(換錢商)들인 셈이었다. 자신들의 화폐가치는 믿을 수가 없으니, 기회 닿는 대로 달러를 사 모으는 것이 그들의 자구책이었다. 당시 암달러상이나 환전상들이 쳐 주던 환율은 미화 1달러에 15만숨 정도였다. 가뜩이나 표면이 큰 지폐로 15만숨은 커다란 다발로 묶이는 것이었다. 호주머니에 넣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서책들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도 없었다. 참으로 처치곤란이었는데,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내 스스로 부자가 된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보고 나서야 그 돈이 얼마나 형편없는 가치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밥 한 끼 먹기 위해서 몇 만 숨을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벨라루스의 현실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처음 호텔에 들어오던 날, 환전 코너에 적힌 환율은 미화 100달러에 800,000벨라루스 루블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그 환율은 820,000루블로 바뀌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들의 화폐가치가 그만큼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미화 100불을 바꾸면 82만 루블이란 현찰이 호주머니 속에 그득했다. 밥 한 끼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면 보통 10만, 20만 루블이 달아났다. 아무리 싼 음식을 먹어도 음료수나 맥주 한 컵을 곁들이면 그 액수는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는 것이었다. 밥값을 치르고 나면 100원, 500원, 1000원 등의 잔돈이 수북하게 되돌아 왔다. 돈 머릿수 따질 줄 모르는 나는 두툼한 현찰들의 무게와 두께 덕에 며칠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내 호주머니 속의 현찰들을 바라보곤, “그 쓰레기들은 뭣 하러 넣고 다니우?”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기도 했다. 경제가 어려운 나라의 화폐가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말았다. IMF 통치의 터널에서 신음해 온 우리가 아니던가? 우리는 장롱 속의 금을 모조리 끄집어 내 재빨리 고통과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감동적이고 대단한 집단 체험이었다. 그런데 지금 유럽 아니 세계의 경제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는 일부 국가들, 금을 모으기는커녕 자신들의 탐욕을 지속시키기 위해 시위로 날밤을 지새우는 이 나라들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웃나라들에게 자신들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을까?

 

#7 아름다운 벨라루스 여인들

 

‘여성은 아름다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잠재된 존재를 실현시키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는 역사가 긴 남성 중심의 언급일 것이고, 후자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의 언급일 것이다.

민스크에 들어서자 여성들의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 누구의 말대로 모두가 ‘미스 코리아 급’이오, 모두가 TV 탤런트이자 영화배우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 했다. 연기만 된다면 즉시 드라마에 투입해도 좋을 만한 미모들이 길거리에 그득했다. 얼굴 뿐 아니라 늘씬늘씬한 몸매들이 ‘벨라루시 여인들이 최고의 미인’이라는 속설을 입증하는 듯 했다. 벨라루스의 ‘벨라’는 백색이란 뜻이며, 백색은 벨라루스의 대표색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흰 눈이 많이 내리고, 여인들은 순백의 피부색을 갖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여자의 수준보다 못하다고들 하나, 사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슷하거나 낫다고 할 만큼 벨라루스 남녀들의 미모는 특출 난 데가 있었다.

첫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었고 셋째 날 미르성에서 가이드를 해 준 학생 안톤도 ‘벨라루스 남성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얼마간은 사실’이라고 애교 있게 대답할 정도였다. ‘얼마간’이란 그 친구의 말 속에서 모종의 뼈가 느껴졌는데, 아름다운 여인들의 남자 노릇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암시한 것이나 아닐까. 안톤과 함께 미르성을 따라나온 학생 올랴 역시 범상치 않은 미모를 보여주었다. 사실 벨라루스의 빼어난 자연[숲, 강, 호수, 평원]은 생활미학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인체미학에도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미학과 도시미학, 그리고 인체미학의 삼위일체를 벨라루스에서 발견한 셈이었다.

 

#8 벌판 위의 요새, 미르성

 

2011. 10. 23. 오전 11시.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학생 안톤의 차로 민스크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미르시의 미르성[벨라루스어 Мі́рскі за́мак/러시아어 Мирский замок]을 찾았다. 대개의 경우 성은 험고(險固)한 곳에 기대어 짓는 것이기 때문에, 가도 가도 산이 없는 평지의 벨라루스에서는 어떤 양식의 성이 세워져 있는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벨라루스 북서쪽 미르시에 위치한 고딕 양식으로 15세기 말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초 일니크 공작이 완성한 이 성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1568년 리투아니아의 라드빌라 공작(Duke Radvila)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가미되었고, 3층으로 이루어진 동북 방향의 궁성, 석회석의 화려한 문 장식, 발코니와 복도 등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성이다.

상당 기간 버려져 있다가 나폴레옹 1세 때 큰 피해를 입었고, 19세기 말엽에 복원되었으며, 도미니크 라지빌로부터 그의 딸 스테파니아와 그녀의 딸 마리아에게 계속하여 소유권이 넘어간 이 성은 2차 세계대전에 나찌군으로부터 전쟁의 참화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평원에 나무숲이 조성되어 있고, 평지의 한 복판에 도시를 건설한 벨라루스인들이었다. 넓은 구릉에 융단처럼 깔린 진녹색의 밀과 감자를 보며 벨라루스가 풍요로운 농경국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감자가 주식으로서 500여 가지의 감자 요리가 있다고 하는 이 나라다. 감자가 자랄 만한 평원 위에 성채는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가 막 지난 16세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성벽의 높이 13m, 둘레는 75m에 이르는 미르성은 전형적인 유럽 성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의 성들이 대부분 그렇듯 미르성 역시 ‘미학과 실용성’을 겸비한 건축물이었다. 그 옛날 이 성의 바깥에 백성들이 몰려 살았을 것이다. 성 안의 지배자와 성 밖의 백성들. 당연한 일이지만, 성 밖의 백성들은 외적의 침입을 1차적으로 막아내야 할 방패였다. 그 방패가 뚫리면 성 안에 웅거하고 있던 지배자들은 성을 의지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이른바 농성(籠城)이 바로 그것이다. 미르성은 밖에서 보는 아름다움 못지않게 내부도, 내부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경치 역시 특출했다.

성채 곁의 호수에서 수영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의 혼이 깃들어 있어, 누구든 수영을 하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슬픈 전설이었다. 그런 전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리 떼는 여유롭게 유영을 하고 있었으며, 제방에 심어진 키 큰 소나무들은 길게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었다.

 

***

 

고려인 프로젝트 관련 자료 수집과 벨라루스 대학에서의 특강. 그것들이 벨라루스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번쩍 번쩍 눈에 띄는 것들이 많았다. 벨라루스는 사실 한국에서 잘 들어보지 못하던 나라였다. 연해주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그 가운데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니, 대단한 역사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세 번의 디아스포라를 겪어 온 셈이다. 한반도로부터 연해주로 건너 간 할아버지 세대의 1차 디아스포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옮겨 간 2차 디아스포라, 중앙아시아에서 벨라루스로 옮겨 온 3차 디아스포라가 그것들이다. 그곳에 고려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이제 새롭게 우리의 문화영토 안으로 들어오려는 벨라루스 젊은이들도 있었다. 옛날의 고려인들을 우리 사람으로 되돌려놓고, 새롭게 들어오려는 고려인들을 우리 사람으로 껴안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지혜롭게 그들에게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돈만 퍼붓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벨라루스대학 한국어학과의 오정혜 교수가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다문화 시대의 교육은 벨라루스 현지의 한국어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길고 깊은 공부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간의 만남이 깨달음을 갖다 줄 수도 있다. 닷새 동안 벨라루스에 머물렀다. 물론 깨달음을 얻기엔 턱 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그러나 얼마가 되었든 그곳에서의 소득을 내 사업에 투자한 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결산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벨라루스 여행의 수확을 지금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그저 열심히 내가 얻어온 작은 기억들과 체험들을 열심히 발효시킬 뿐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