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7. 29. 00:41

 

 


공항에서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에 도착하여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 앞마당에 설치된 조각상

 

 


천진외대 국제교류처에 걸린 국제학술회의 보도처 표지판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로비에서 안내하는 학생들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방에서 내다 본 천진시가지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방에서 내다 보이는 롯데백화점

 

 


천진시가지에서 흔히 보이는 높은 빌딩들

 

 

 

영욕이 퇴적된, 미래 지향의 역사 도시 천진(天津)을 찾아(1)

 

 

 

 

 

3월 초. 천진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있으니 발표를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국제학술회의라 해봐야 중국에서 열리는 만큼 수준이 뻔할 뻔자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천진이 탐났다. 뿐만 아니라 천진에서 학술회의를 마치는 다음 날 열하(熱河)로 이동하는 일정도 들어 있었다. 이미 열하를 다녀온 나로선 흥미가 반감되긴 했으나, 13년의 세월 동안 변했을 열하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으며 연암 박지원의 정신세계를 흠모해 온 게 대부분의 국문학도들일 것이니, 열하는 이번 여행에서 일종의 미끼상품’(?)인 셈이었다. 주최 측이 열하를 끼워 넣은 것도 그 점을 노렸기 때문이리라.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 일당에게 납치된 대원군이 3년 간 감금의 수모를 당한 곳.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강제 조차(租借)로 입은 상처가 도시의 핵심부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발해 만에서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 등등. 천진은 적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곳이라 언제고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지금껏 미답(未踏)으로 남겨둔 곳이었으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참여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아편전쟁(1840~1842)이 일어난 곳이었다. 영국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하고, 중일전쟁에서도 패함으로써 완벽하게 주권을 상실하게 된 중국이었다. 오랜 세월 중화주의와 동아시아 중세보편주의의 핵심 공간으로 군림해오던 중국이 아차하는 순간에 역사의 진운(進運)을 놓침으로써 국제사회의 동네북으로 전락된 역사적 비운의 생생한 현장이 바로 천진이었다. 그러면서도 열강 침탈의 역사를 근대화의 역사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어떤 나라처럼 치욕의 현장을 쓸어버리지 않고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대인배(大人輩)의 지혜와 금도를 보여 준 미래 지향의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머물게 될 이틀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 도시를 일별이라도 해야겠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서울 출발 전날 냉방병에 걸려 골골하면서도 장도에 오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050분 출발 예정이던 아시아나 항공은 무슨 이유인지 30분 가까이 연발했고,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천진 공항에 도착했다. 도시는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다. 공항에서 버스에 오른 가이드는 천진이란 말의 유래부터 설명했다. 그 중 천자의 나루터란 설명이 가장 타당한 듯 했다. 즉 명 태조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영락(永樂)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 남경 홍무(洪武)제의 손자이자 태조의 후계자인 주윤문(朱允炆)에 대항하는 싸움을 시작했는데, 그가 떠난 곳이 바로 이곳의 고강(沽江)으로서 즉위에 성공한 다음 자신이 떠난 곳에 천진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발해로 흘러 들어가 양자강과 황하를 만나는 하이강[The Hai River; 海河]이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물이 많은 도시였다.

 

 

숙소인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3시가 넘어서야 천진박물관에 들렀다. 하서구(河西區) 은하(銀河) 광장에 있는 천진박물관은 백조가 두 날개를 편 듯한 건축 양식도 일품이었지만, 소장품의 양과 질은 더욱 엄청났다. 50,000의 넓이. 우리 개념으로 15,151평이 넘는 규모에 방대한 중국 전역의 고대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서예, 그림, 청동기, 도자기, 옥 공예품, 인장, 벼루, 상나라 때의 갑골문, 동전, 고문서, 근대의 각종 유물 등 20만 점이 넘는 미술품들과 역사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외형이나 소장품의 규모로는 일개 시립박물관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천진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대단했던 만큼 서구 열강들과의 갈등, 전쟁, 식민화 등의 우여곡절과 그 산물인 조계(租界)에 관련된 각종 유물이나 문서, 인물들이 복잡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박물관은 매우 넓었다. 세계의 유명 박물관을 두루 돌아본 경험에 미루어, 천진박물관을 대강이라도 섭렵하려면 짧게 잡아도 꼬박 이틀은 필요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고작 두어 시간으로 장강대하 같은 중국사의 유물들을 둘러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5시가 땡 치자 복무원들은 가차 없이 우리를 쫓아내기 시작했다. 위층엔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그러지 않아도 주마간산으로 시작한 박물관 투어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오니 기념물 같은 주변의 고층건물들 사이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천진에서의 귀하디귀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천진박물관 입구

 

 


천진박물관 내부

 

 


천진박물관 소장-부두의 노동자들

 

 


천진박물관 소장 생활사 자료-약방

 

 


천진박물관 소장-상나라 시대의 갑골문

 

 


천진박물관 소장품-신석기 시대 홍산문화에서 황옥으로 만든 pig-dragon

 

 


천진박물관 소장품-원나라 때 옥날개 용무늬의 두 귀를 가진 병

 

 


천진박물관 소장품-명나라 때 황남도인이 제작한 익번왕금

 

 


천진박물관 소장품-명나라 때 물고기와 연꽃 모양을 朱砂로 새긴 벼루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청동으로 만들어진 달라이라마 상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에나멜로 서양인들이 그려진 비연호(鼻烟壺)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바위 모양의 壽山 돌도장
[남산지수(南山之壽: 남산처럼 장수하라)가 새겨져 있음]

 

 


천진박물관 소장품-19세기 초중반 아편을 탐닉하던 중국인들

 

 


천진박물관 소장-9개국 조계 분포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 일본,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천진박물관 소장-북양대신 이홍장과 대화를 나누는
미국 18 대 대통령 그란트(Ulysses Simpson Grant)

 

 


천진박물관 소장-중국의 국부 손문상

 

 


이른 아침 공원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중국인들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8. 9. 9. 19:53

“오직 공도(公道)만을 지켜 신명(神命)을 믿노라”

-민족적 수치와 교훈의 서사미학 : 이덕형의『죽천조천록』-

 

 

노구의 정사, 끔찍한 해로사행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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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초상>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대신하여 새 왕에 추대된 능양군 이종(李倧). 그가 바로 서인들에 의해 옹립된 인조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현실적인 외교로 전쟁을 피하고 실리를 추구해왔으나, 서인세력은 그들의 지론인 ‘친명사대(親明事大)’를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중원에서 승승장구하는 후금을 적대시하고 바야흐로 꺼져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서인들에게 나라의 형편이나 전쟁으로 죽어나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명나라의 승인을 통해 자신들이 거머쥐어야 할 정치권력만이 그들의 관심대상이었다. 망해가던 명나라로부터 인조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에 절대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59세의 죽천 이덕형(李德泂,1566~1645)을 주청사의 정사로 명나라 조정에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이덕형은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었고,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으며, 반정 후에도 광해군을 죽이지 말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었다.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온 뒤 조정 대신들의 모함으로 고초를 겪은 것도 서인정권과의 거리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말년까지 비교적 순탄한 환로(宦路)를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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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떠날 차비를 하는 사신들과 전별을 나온 사람들>

인조 즉위 2년(1624) 6월 20일 한양을 떠나 10월 13일 북경 회동관에 숙소를 정했고, 이듬해 2월 25일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5일 복명했으니, 장장 10개월에 걸친 장도였다. 요동은 이미 누르하치가 점령하여 육로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평안도 선사포에서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해로가 유일한 통로였다. 이미 우참찬 유간, 이조참판 박이서, 정언 정응두 등 광해 조 때 진위사 일행이 풍랑으로 몰사한 그 길이었다. 장산도와 광록도 사이에서 만난 풍랑은 그들이 겪은 난관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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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산도와 석성도 사이에서 만난 풍랑>

잠깐 사이에 음산한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 하늘색은 새까맣게 변하고 모진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큰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비록 옮겨 정박하고자 하나 손을 쓸 수 없어 배는 거대한 물결에 내맡겨진 바가 되었다. 백 척의 거품 끝에 곧바로 올랐다가 만 길의 심연으로 돌아 떨어지니 배 안에서 사람들은 낯빛을 잃고 서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부사의 배가 잘못 정박하여 머문 곳에서 순식간에 널빤지가 부러져 물이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었으나 다행히 바람이 자서 전복을 면할 수 있었다.

 

깐깐한 유학자들이 천비낭랑, 용왕신, 소성신 등에게 제를 올려 뱃길의 안위를 기원할 정도로 발해만의 파도는 높고도 험했다. 어쩌면 그것은 중국에 들어가 수행할 사명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전조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바닷길을 건너고 육로를 걸어 북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말기 관료들의 부패상에 진저리를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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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사신들의 모습>

수행원 누군가에 의해 메모가 작성되었고, 귀국한 이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완성된 『죽천조천록』. 사행길의 견문들을 세세히 기록하지 않고, 황제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내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실이 여타 사행록들과 다르다. 말하자면 다른 사행록들이 서술적이거나 묘사적이라면 『죽천조천록』만은 서사적(敍事的)이라는 것이다. 핵심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이 기록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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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 자금성의 모습>

북경에 도착하여 4개월여 동안 부패한 명나라 관료들의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낸 죽천은 서사체『죽천조천록』의 프로타고니스트요, 명나라의 관료들은 안타고니스트였다. 이처럼 선악의 갈등과 대립으로 압축되는 것이 그 서사체의 구도이다. 선의 입장에 서 있던 죽천은 어떻게든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 조선의 반정에 명분을 부여하고 현실정치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충(忠)’의 구체적 실천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물을 탐하여 그런 충의 실천을 가로막는 명나라 관료들은 부패와 악의 전형이었다. 단계마다 뇌물이 필요했고, 뇌물의 공여를 전후하여 갈등은 조성되었다. 기록자는 뇌물이 횡행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옥하관에 돌아와 예부 복계를 주야로 기다리되 금일 명일 하여 동짓달이 반이 지나도 국가 대사를 이룰 기약이 없어 민망으로 지내니 각 마을 서리 이르되 “너희 나라 이 대사를 이루려 하면 인삼과 금은을 상서와 시랑에게 많이 봉송하여야 일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옥하관에 십년을 있어도 일을 이룰 기약이 없으리라” 하니 대저 천조(天朝) 인심이 말세 되어 탐풍(貪風)이 대작하니 대소 관원이 회뢰(賄賂)를 들이지 않는 이가 없어 대소 정사를 재리(財利)로 이루어내고 염치를 알지 못하여 봉책으로 기화를 삼아 날마다 하배로 하여금 관에 와 토물을 구하니 인삼과 은이 아니면 달피(獺皮)와 표피(豹皮)와 종이와 모시와 베와 무명이라. 아침에 수응하면 저녁에 또 달라 하여 말하기를 만일 일을 수이 이루어 주면 고기 낚을 데가 없다 하여 천연세월하여 달라기를 마지아니하고...

 

바리바리 마소에 등짐을 지우거나 꼬박꼬박 봇짐으로 지고 간 토산품들이 명나라 관리들에게 회뢰의 자료로 탕진되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일이 이루어지는 단계마다 이런 뇌물이 오고갔으며, 뇌물의 유무나 많고 적음에 따라 적지 않은 갈등도 생겨났다. 상대하던 명나라의 관리들이 때로는 방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조력자가 되기도 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죽천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사명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이 요동에 출병하여 누르하치를 쳐주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 명나라의 공식적인 제의였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새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명나라의 관리들은 그런 약점을 지렛대 삼아 더욱 많은 물자를 뇌물로 요구한 것이었다.

 

무수한 수모 끝에 사명을 이루다

 

『죽천조천록』의 프로타고니스트 죽천 이덕형. 그가 당시 부패의 천국 명나라 관리들에게 비교적 좋은 인상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인상을 줌으로써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인간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수모를 무수히 겪은 것도 사실이다. 수시로 바뀌는 상서와 시랑 등을 상대하며 뇌물로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일이 북경에서의 일상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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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 자금성의 또 다른 모습>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 각로들이 출근할 때 길거리에 서서 읍하는 자세로 그들과 접촉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고, 도찰원으로 오라는 말만 듣고 찾아갔다가 “드러 내치라”는 육각로의 대갈(大喝)에 “대조(大朝)의 노야(老爺) 대인들은 적선(積善)하시라”고 사정하며 섬돌을 붙든 채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뇌물 공여와 함께 이런 일들이 거듭되면서 명나라 관리들의 마음은 움직였고, 결국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면복 아닌 엉뚱한 옷을 내줌으로써 한 번 더 죽천을 희롱하기도 했다. 즉 그들이 내준 웃옷에 호문(虎紋)과 봉문(鳳紋)이 있을 뿐 용문(龍紋)과 일월(日月)이 없음을 보고 죽천이 문제를 제기하자, 한참동안 죽천을 희롱하다가 그들 가운데 허각로란 자가 “이는 희롱함이라”하고 용포를 내어준 사건이었다. 학식과 경륜을 갖춘 59세의 정사 죽천을 상대로 그들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희롱한 것이었다.

***

사명을 수행하고 난 뒤 사람들이 용하다는 관상쟁이 장전천(張前川)을 데리고 오자 “인간만사를 처음 태어난 날 부여받았나니/영화와 욕을 그대와 더불어 의논할 마음이 없노라/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이제 머리가 희어졌으니/오직 공도만을 지켜 신명을 믿노라”고 시를 지어 대꾸한 죽천. 과연 그는 그 순간에도 조선 선비로서의 꼿꼿한 기개를 잃지 않았던 것일까.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