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8. 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Posted by kicho
알림2013. 8. 2. 16:47

 

 

전공 분야의 우물 깊은 곳에서 만난 새로운 영역들 … “작은 것에도 의미가 있죠”

-박태일·조규익·박정규 교수의 어떤 시도들-

                         

                                                              

                                                                                                                                    윤상민 기자 <교수신문>    

 

 

시 전공자의 지역 문학 연구, 고전문학 전공자의 고려인 한글문학 연구, 신문방송 전공자의 시 전집 편역…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종래의 국문학 연구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소년소설육인집』(도서출판 경진 刊)을 발간한 박태일 경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 『CIS 지역 고려인 사회-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刊)를 상재한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단재 신채호 시전집』(기별미디어 刊)를 내놓은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그 주인공이다. 자신의 주 전공 분야를 가로질러 새로운 분야에 발을 딛는 이들의 작업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3, 5월에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소년소설육인집』을 발간한 박태일 교수의 작업은 지역문학총서 시리즈 15, 16권이다. 말하자면 지역문학연구의 일환으로 시작한 셈이다.

 

박 교수는 오랫동안 계속됐던 일국주의 문학연구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로 지역문화연구를 시작했다. 기존의 국가주의 체제에서 소외됐거나 도태됐던 중견 작가나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우리의 민족문학이라는 큰 전통 속에 남기고 복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국가주의 체제에서 소외됐던 지역작가 발굴 사실 박 교수의 지역문화 연구는 이미 1990년대 후반에 경남·부산 지역을 연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역문학연구>라는 학술지를 14집까지 낼 만큼 열정적으로 매달렸지만, 학술진흥재단의 변화로 원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중단됐었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지역문학회(회장 김동근 전남대)를 창립하면서 그의 연구는 오히려 전국권으로 확대됐다. 제주, 전남, 충청, 인천에서 뜻을 같이 하는 교수들이 뭉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로 <한국지역문학연구> 총서를 2권까지 발간했다.

 

그렇다고 경남, 부산지역의 연구가 미진해진 것은 아니다. 이번에 출간된 15, 16권에 이어 그의 예전 작업들의 결실이 계속해서 총서로 출간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과 그 과정 속에서 뜻을 공유한 이들의 활동은 이렇게 한국지역문화연구의 풍성한 열매로 맺히고 있다.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박 교수는 “지역 문학을 연구하면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작품의 상업성이 떨어져서 출판이 매우 어렵다. 입력부터 편집, 교정까지 주변 지인과 제자들과 함께 알음알음 하고 있고, 출판에 따른 모든 부담도 편역자 본인이 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HK사업이니 BK사업은 그들의 작업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번에 출간한 『근포 조순규 시조 전집 무궁화』에 그가 부여하는 의미는 뭘까. 경남 지역의 중요한 작가의 발굴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美文主義의 전통을 가진 한국 시조의 전통과는 다른 사회학적인 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엮어낸 『소년소설육인집』 은 1920년 자생적 계급주의 문학을 몇몇 문학가가 독점했다는 국문학계의 통념의 반대편에 서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아동문학, 지역문학가의 저변을 찾아냄으로써 계급주의 문학에 대한 반성을 시도했다. 올해 출간될 총서 17권은 1950년 이전까지 부산지역에서 나왔던 동인지에 대한 연구다. 잊힌 혹은 뭍힌 매체를 발굴해내기 위해 오늘도 연구실 불을 밝히는 박 교수는 말한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인 1, 2 세대의 한글문학은?

 

해군사관학교, 경남대를 거쳐 현재 숭실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규익 교수. 그는 지난달 『CIS 지역 고려인 사회-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펴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고려인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했다.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돼야 한다’는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 오랜 디아스포라의 고됨으로 우리 말과 문학과 역사를 잃은 고려인 2, 3세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그는 이 책에서 풀어놨다.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었다.

 

조 교수는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을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도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피해 이주한 고려인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됐고,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서조차도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구소련 해체 후, 각 공화국들이 독립될 때도 ‘새로운 주변인’일 뿐이었다. 꿈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지만, 이곳 역시 그들에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 조 교수는 3년의 긴 여정 끝에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해냈다.

 

학부에서는 정치외교학을, 대학원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지난 2월 펴낸 『단재 신채호 시전집』도 그의 광범위한 연구 이력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청주대 교협회장 당시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다 해직되기도 하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그의 연구 지평은 계속해서 확장돼 가고 있다. 당시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번역 1기생인 그는 박사과정에서 조선왕조시대의 신문을 연구했던 신문방송학자는 지역 언론, 한국신문학사 등의 연구 속에 1999년 신채호를 만났다. 단재가 지은 시가를 새롭게 발굴하고 기존에 발표됐던 국문시, 시조, 한시들을 정리해 『단재 신채호 시집』을 출간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신채호에 푹 빠져있다. 개화기 암울한 민족적 시련기에 활발한 언론활동과 독립운동, 아나키즘 운동에 매진했던 단재는 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그의 주옥같은 시들 역시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뒤켠으로 사라졌다. 박 전 교수는 신체시의 효시로 불리는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11)보다 훨씬 이전에 단재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적지 않은 시가를 발표했으며, 한시나 새로운 형식의 시가를 소개함으로써 전통 시가의 맥을 계승하고 이를 변용해 근대적인 시가를 모색해냈음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어쩌면 학문이란 이처럼 전공 분야의 우물을 깊게 파내려가며 만나는 수많은 학문의 뿌리들이 뒤엉켜 더불어 뻗어나가는 굵은 뿌리처럼, 결국 하나의 학문이란 이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다음 저서가 궁금하다. <교수신문 2013. 7. 29. 3면>

 

Posted by kicho
알림2013. 7. 13. 15:21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총서 42/태학사]이 출간되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즉 구소련 지역에 거주해 오는 고려인들의 한글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출간한 것이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다. 구소련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생산 및 소비 체제는 정부에서 관장하던 전문예술단(혹은 기관)과 함께 각 지역의 꼴호즈나 솝호스 등 생산단위 별 소인예술단들이 담당하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카자흐스탄 극성 꼴호즈의 ‘가야금 가무단’이나 뽈리뜨옫젤 꼴호즈의 ‘청춘 가무단’ 등 꼴호즈를 비롯한 생산현장이나 고려인 일반대중 사이에서 활동하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 소인예술단이며, 1932년 원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세워진 ‘원동변강 조선극장’을 모태로 여러 지역으로의 이전과 개명(改名)의 과정들을 거쳐 1968년 카자흐 공화국 내각 결정에 의해 알마틔로 옮겨져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 음악극 고려극장’으로 최종 정착된, 이른바 고려극장이 전문예술단(혹은 기관)이다. 이들 예술단에서 창작⋅공연한 한글 노래들과 드라마 등을 분석하여 주제의식과 문예미학 등을 찾아낸 것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총서: 고려인의 문예미학, 그 정맥을 찾아

 

제2부 소인예술단과 한글문학

 

제1장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적 지향

Ⅰ. 생산현장과 소인예술단

Ⅱ.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생산 및 향유방식

Ⅲ. 구소련의 미학과 국문노래들의 주제의식

Ⅳ. 민족적 형식과 대중미학

 

제2장 고려인 노래의 전통노래 수용

Ⅰ. 전통노래와 변이의 당위

Ⅱ. 고려인들의 전통 민요와 변이의 단서

Ⅲ. 지속과 변이, 그리고 문화접변 현상

Ⅳ. 문화접변과 보편정서

 

제3장 고려인의 한글노래와 디아스포라의 정서

Ⅰ.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당위

Ⅱ.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문학적 형상화

Ⅲ. 디아스포라 의식의 관습성

 

제3부 전문예술단[고려극장]의 한글문학

제1장 고려극장의 존재의미와 가치

Ⅰ. 고려극장과 고려인

Ⅱ. 고려극장의 발자취

Ⅲ. 공연된 연극의 내용과 흐름

Ⅳ. 민족의식, 연극, 고려극장

제2장 고려극장에서 불린 한국어 노래들의 의미

Ⅰ. 전문예술집단으로서의 고려극장

Ⅱ. 가창된 노래들의 텍스트 양상 및 갈래

Ⅲ. 주제의식의 양상

Ⅳ. 고려인 민족예술미학의 메카, 고려극장

 

제3장 고려극장 1세대 극작가 연성용의 희곡과 고전 수용 양상

Ⅰ. 고려극장의 개척자, 연성용

Ⅱ. 예술적 성과에 관한 평가

Ⅲ. 고전의 발견과 재해석 향상

Ⅳ. 고전의 재해석과 변용

 

제4장 극작가 태장춘의 희곡과 역사 수용양상

Ⅰ. 고려극장과 태장춘

Ⅱ. 작품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평가

Ⅲ. 텍스트의 성립과 내용적 짜임

Ⅳ. 작가의식 및 주제

Ⅴ. 연극 미학적 해석의 모범적 선례

 

제5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새 고려인’으로서의 한진

Ⅱ. 언어와 민족문학, 고려인 문단에 대한 관점

Ⅲ. 주제적 관심과 미학적 성취

Ⅳ. 새로운 연극미학의 수립

 

제6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고전을 통한 현실의 해석

Ⅱ.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를 통한 봉건체제 비판

Ⅲ. 봉건 착취에 대한 비판과 디아스포라의 정서

Ⅳ. 두 작품의 공시적⋅통시적 위상

Ⅴ. 고전의 해석과 연극미학의 수립

 

제4부 총결: 민족 문예미학으로 피어난 디아스포라의 역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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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2. 24. 17:18

 <1945년 김병화 농장의 김남견과 레 베라 드미트로브나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는 소인예술단(취주악단)>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 막달레나>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아 제법 부지런히 돌아다닌 몇 년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벨라루스 등 쉽게 갈 수 없는 나라들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들은 없다!’는 것이 오랜 방랑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빛바랜 사진 몇 장과 실실 부서지는 몇 권의 책자들에서나 그들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 온 고려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주 앉아 보아도 모습만 같을 뿐, ‘소통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엄혹했던 구소련 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절망에 갇힌 민족의 탈출구를 공산주의에서 찾고자 그 이념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조명희. 그를 추앙하여 문학에 빠져들었다가 22년 간 북극 유형 및 강제노동의 쓰라림과 후유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강태수. 그들은 원동으로부터 가축이나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의 황당한 집단체험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오직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속히 귀여운 아기들의
어머니가 되며
남편의 던지는 웃음에
두터운 정으로 대답하며
또 우리에게만 부족되지 않던
그 무엇으로 보태면서
무한히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죄인”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기를!
이곳은 모두다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줄 알어라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네철 내내 비가 내리겠는가.
사납던 징기스한의 무덤은
오늘도 나지지 않으며
로마에 불지르고도
“오, 나의 사랑하는 로마여!” 하고
웨치던 네로의 혼은
이날도 저주의 무쇠 탈 쓰고
아마 지옥에서 헤매리라
악은 백 년 후에도 발각되며
선은 민중의 부르는 노래에
오래오래 담겨진다.

-강태수 <마음 속에 넣어 두었던 글> 중에서


고려시인 강태수는 북극유형이란 마지막 길을 떠나며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이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뿐, 자신은 죄인이 아님을 절규한다.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사계절 내내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징기스칸 및 네로의 악행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인물은 징기스칸이나 네로가 결코 아니다. 그가 이들을 통해 암시하고 싶었던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이주와 북극 유형을 통해 젊음과 사랑을 잃은 그였다. 그러니 그에게 스탈린보다 더 극악한 군주는 없었을 터. ‘저주의 무쇠탈을 쓰고 지옥에서 헤매리라’는 그 저주의 대상은 네로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야 시인은 자신이 몸담아 온 공간, 그간 생존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이런 저주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조명희나 강태수만 그러했을까.
***
1세대 고려인 한 분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아간 키르기즈스탄. 비쉬켁 국제공항에 도착해 연락하니 그 분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중이었다. 이처럼 어딜 가도 1세대 고려인을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기껏 2~3세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말을 잃으니 우리 역사를 잃게 되고, 우리 역사를 잃으니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피차 민족적 동질감을 공유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도 그저 이민족을 만나듯 서로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3~4세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급속히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 밖에 흩어져 살며 정체성을 상실한 한민족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을 보며 2천년의 지독한 디아스포라를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강고한 모습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겨우 1~2세기의 디아스포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 된 컴퓨터 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는 말과 정신의 씨앗을 움틔우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뒤통수에 와 닿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면서 이들 나라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혹시 우리 모두의 기억을 되살려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한 의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단계에서 당장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수명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의 수명은 영원하다!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 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나라들 사이에 이념의 장벽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개인들은 이해관계의 장벽을 나날이 공고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의 물결은 민족주의를 능가할 정도다. 우리의 과제는 소아(小我)를 넘어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발판으로 바람직한 내일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획은 그런 소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고려인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했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것들 가운데 1차적으로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발간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강호 제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고대한다.

                               2012. 1.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이 글은 최근에 펴낸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있었네!>>의 머리말입니다.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2. 2. 23. 17:30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삶에 관한 사진자료집 출간!!!

 

  <발간된 책>

  <우즈벡 지진허 마을의 백산옥 할머니(1909년생)>

  <우즈벡의 프라우다 농장 학교 교사들(1960년대)>

<평양에서.  오른쪽 첫번째가 최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오른쪽 네번째 인물이 김일성(1946년)>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 있었네!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
김 이그나트, 김 블라지미르, 조규익 엮음
도서출판 지식과교양, 2012. 3./ 15,000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지나온 세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자료집이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로 출간되었다. 숭실대 조규익 교수(한국문예연구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지식인 김 이그나트 및 김 블라지미르 등과 함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보통사람들로부터 유명인들까지]의 사진들을 수집하여 자료집으로 엮었다. 그동안 이 지역 고려인들에 관한 문서자료들은 꽤 출간되었지만, 두어 건의 작품사진집 이외의 사진자료집이 학술자료총서의 형태로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말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조규익
  1부 : 고려인들의 삶
  2부 : 가르침과 배움
  3부 : 일과 일터
  4부 : 고려인 가족
  5부 : 풍속[돌⋅결혼⋅회갑⋅장례]
  6부 : 나라 밖의 북한인들, 북한의 고려인들
  발문 : 우리는 돌아간다-김 블라지미르 씀/오두영 역


 1937년 강제이주 시기[몇몇 경우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자료도 있다]부터 최근까지 고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을 선별했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 관한 어떤 연구서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자료들을 통해 고려인 연구자들이나 그간 고려인들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들어왔던 일반인들은 고려인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편자들은 그간 몇 년 동안 현지의 고려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그간에 겪은 고초를 들었고, 그들의 선조와 자신들이 남긴 기록들을 수집했으며, 미래의 소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은 편자인 조규익 교수가 그간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자료정리 작업과 연구 작업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확보한 사진자료만 1천 건이 넘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나머지 사진들을 계속 출간하겠다는 것이 조 교수의 생각이다.


 구소련 체제 아래 우리와 단절의 역사를 지속해온 고려인이 우리 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그들을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닌 ‘고려인’으로 타자화(他者化)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야 하며,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들과 우리가 정신적으로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학술적 차원의 해석이나 연구보다 사진이나 기록물들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 교수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조 교수가 머리말에서 강조한 것처럼 ‘지워진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국민적 관심 속에 이런 작업들의 의미와 가치가 강조되어야 하리라 본다. 강호제현의 일독을 기대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