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5. 4. 17:23

 

투표권 '자가 박탈'의 변  

 

 

 

목하 대통령 선거운동이 진행 중이다. 며칠 남지 않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번에 나는 내 투표권을 스스로 박탈하기로 했고, 아내가 내 판단과 결정의 증인이 되기로 했다. 성년 이후 대통령 선거를 위한 투표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결과가 만족스러운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설사 당선되었다 해도 그 직책을 만족스럽게 수행하는 대통령이 없었다. 최근의 탄핵사건은 그 비극의 정점이었다. 그러니 투표장에서 붓 뚜껑을 들었던 내 손과 그 손을 움직인 내 판단력이나 탓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번엔 스스로에게 한시적 공민권 박탈의 실형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참 후보들에게 불만이 많다. 대통령이란 분명 도덕군자도, 박식한 학자도, 순발력 뛰어난 전장의 장수도, 능숙한 행정가도, 출중한 장사꾼도, 말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웅변가도, 글 솜씨로 사람을 움직이는 문필가도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이 모든 것을 합친 능력자를 대통령으로 뽑길 원한다. 나보다 나은 인격과 능력을 갖춘 인물을 뽑고 싶어 한다. 그런 인간만이 우리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기준이 뒤죽박죽으로 뒤엉겨 그냥 아무나뽑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하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 매일매일 어안이 벙벙해 하는어떤 나라처럼 되는 것 아닌가.

 

후보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행적을 뒤져보라. 얼마나 구린 구석들이 많은가. 뻔한 질문에 답변이 궁색하여 진땀 흘리는 모습들을 보라. 거칠 것 없는 나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가. 둔사(遁辭)를 농하며 상대가 파놓은 덫을 빠져 나가려는 가련한 몸짓들을 보라. 아무도 무언가를 추궁하지 않는 달달보살인 나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가.

 

그들도 대통령(후보)이란 허울을 벗겨 놓으면지극히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진실은 바로 거기에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대통령직을 수행하고자 하는 결기(決氣)만 있다면, 대통령으로서 충분하다. 내가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나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나서 나누는 정담(政談)’은 정치인 누구 못지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 후보들의 도덕과 상식 수준보다 이들이 훨씬 우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친구들 중의 하나에게 대통령의 허울을 씌워서 청와대에 들여보내는 상상 유희를 즐기곤 한다. 그들 중의 누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아도 탄핵으로 쫓겨난 그녀나 지금 그 대통령직을 차지하기 위해 부나방처럼 달려든 15명보다야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이번에도 어느 사기꾼이 대통령으로 뽑히나’, ‘국민을 얼마나 괴롭게 할 것인가라는 불안감 때문에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는 속담만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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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 11. 30. 20:42

블로그의 빗장을 다시 열며

 

 

 

연구실의 오후. 나른함을 느끼는 찰나, 옛 제자로부터 까톡!’이 왔다. ‘이제 블로그에 글을 안 올리시느냐는 항의성 채근이었다. ,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구나!

 

한동안 의욕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대통령의 어이없는 비정(秕政)이 만인의 공분(公憤)을 불러왔고, 촛불의 행렬이 거리를 메우는 나날이다. 촛불을 들고 나가든, 촛불 대신 글을 적든, 무언가를 하는 게 옳았으리라. 그러나 저 휩쓸리는 인파 속에서 내 몸을 곧추세울 자신이 없고, 가슴 속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토해내려 책상에 앉아본들, 큰창자 저 밑에 똬리 튼 토사물을 끌어올릴 자신이 없는 게 요즈음이다.

 

미개구착(未開口錯)!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해봐야 부질없음만 절감할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이니, 얼마나 지났을까. 제법 큰 신문들을 통해 어쭙잖은 글 나부랭이들을 써내곤 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나 같은 흙수저에겐 그의 등장 자체가 희망이었다. 그가 기득권층을 다독이며 이 땅 흙수저들의 입지를 다져 나가길 맘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나치게 말을 잘했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가끔은 할 말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거나 조용히 다른 쪽의 진영을 미소로만 대했어도, 그런 일은 피해갈 수 있었으리라. 아쉬웠다. 그러나 더 후회스러운 것은 나였다. 좀 더 진득하게 애정을 갖고 지둘려야했었다. 깊은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할 말 못할 말을 쏟아내며,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대는 데 일조를 보태고 만 나였다.

 

허탈함이 컸다. 말의 부질없음에서 오는 회한일 것이다. 적어도 밖을 향해서는 한동안 묵언(默言)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한두 달 사이의 일도 내겐 그와 같은 의미의 사건일 뿐이다. ‘말을 매우 잘함말을 되게 못함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두 사람.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구설(口舌)은 화환지문(禍患之門)’이라는 옛말을 입증하는 사례들일 뿐이다. 노 대통령은 말을 너무 잘해서, 박 대통령은 말을 너무 못해서 모두 화를 자초했다고 한다면, 현상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일까. 내 느낌에 노 대통령은 어느 경우에도 막힘이 없었다. 독서량도 많았다지만, 구변이 청산유수였다. 만약 그 구변의 70%만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반면에 박 대통령은 참 눌변(訥辯)이다. 오죽하면 별로 호감이 안가는 언론인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으로부터 베이비토크(baby talk)’란 비아냥조의 놀림마저 받았겠는가. 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펑퍼짐한 강남아줌마를 비선(秘線)의 스피치라이터로 쓰고 있던 일만 보아도 말을 못하는 데서 오는 콤플렉스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촛불의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대통령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그 결과 또한 스스로 감당해야 할 터. 애시당초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 자신을 망치고 국민을 힘들게 하며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니, 모두를 기만한 그 죄가 매우 크고 무겁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구약성서󰡕 잠언2813)는 성서의 구절. 그가 향해야 할 회개의 광야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는가. 둔사(遁辭)와 은폐의 덫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더 이상 만인을 부끄럽고 참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닫아걸었던 블로그의 빗장을 열고, 세상과 소통을 재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 버리고자 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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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 3. 19. 15:53

 

'Giral'[각주:1]떠는 친박도배(徒輩)

 

 

 

특정 정치이념으로 뭉친 결사체가 정당이라면, 한국의 정치 결사체들을 정당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그 안에 수많은 소그룹들이 있어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데,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모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양한 규모의 도당(徒黨)들끼리 치고받는 싸움들을 통해 결사체의 헤게모니를 잡아가는 것이 현재 한국 정당들의 모습이니, 그런 결사체들을 붕당(朋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리라.

 

새누리(붕)당에는 크게 친박과 비박이란 소그룹이, ‘더불어민주(붕)당에는 친노와 비노란 소그룹이 각각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억지스러움에서 난형난제이긴 하나, 새로운 수장 아래 별 잡음 없이 총선이란 전쟁터를 향하고 있는  친노에 비해 친박은 훨씬 더 밉상이다.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여당으로서 온갖 꼼수를 부리며 패권을 잡으려는, 그 유치찬란하고 미련스러운 작태는 구토를 참기 어려울 만큼 혐오스러운 게 사실이다.

 

공관위인지 공천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위원장의 완장을 차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빨 빠진 개작두를 둘러멘 이 모 의원을 보노라면, 한 줌 권력이 무언지 참으로 딱하기만 하다. 온갖 영화로운 작위(爵位)를 거친 그 나이의 인물이라면, 단 한 낱의 덕망이라도 표정에 나타나야 정상일 것이다. 툭하면 짜증스런 말투로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기만 하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니, 그는 지금껏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남을 평가하고 내치려면 공명정대한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평가의 공정성과 점수의 정확성에 평가자의 원만하고 따뜻한 인격이 포함될 때 비로소 공명정대함의 가치는 구현된다. 꼼수는 꼼수를 낳고, 둔사(遁辭)는 또 다른 둔사를 낳는다. 멀쩡한 사람에게 현미경을 들이대고 흠을 찾으려 하고, 흠투성이의 사람에게 망원경을 대고 눈까지 감으려는 꼼수 앞에 할 말을 잊는다. 최고 권부의 밀명(密命)을 받았다고 모두들 추측하는데, 본인만은 한사코 원칙대로 한다고 강변한다. 매에 쫓겨 도망가는 까투리가 부리만 땅에 박으면 안전한 줄 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도당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데, 자신들만은 속내를 들키지 않았다고 희희낙락하는 꼴이다.

 

멀쩡하다 못해 훌륭하기까지 한 인물들을 공천에서 배제해 놓고, 배제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 ‘최고 권부의 미움을 샀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붕당의 정체성 운운으로 둘러대려 한다. ‘붕당에 무슨 정체성이 있을 것이며, 정체성이 있다한들 붕당의 정체성정당의 대의명분과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판관(判官)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때의 자격이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다. 거기에 더하여 최고 권부가 가당찮은 압력을 가할 때 바른 소리로 깨우치려는 용기와 지혜까지 갖추면 금상첨화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바로 선거(選擧)’. 지금 여당이라고 자처하는 새누리붕당이 보여주는 작태는 골목 깡패들의 행태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북한의 김정은이는 핵을 만들어 우리의 심장에 쏘려 하고, 중국과 미국은 패권을 다투는 중이며, 간사한 일본은 식민시대의 영화를 못 잊어 발광하는 중이다. 그 뿐인가. 우리의 아들딸들은 직장을 못 찾아 좌절하며 헤매고 있다국민들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떨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형국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이 시대의 과제가 무엇이며, 무슨 아젠다(agenda)’를 가져야 하는지 등을 알지도 못하면서 권력의 단맛만 추구하고, 최고 권부에 아부나 하려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명하노니,

그대들은 이제 향리로 물러가 부디 자숙하며 수양하기 바라노라.

 

 

 

 

 

  1. 본의 아니게 뒷골목의 비속어를 쓰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백규서옥 주인 드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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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 1. 22. 17:09

김무성 대표와 정의화 의장의 경우

-‘말의 힘아니면 말의 덫’-

 

 

 

인간의 행동 가운데 정치적이지 않은 게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단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정치적인 계산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 간에도 정치적 긴장이 존재함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러니 가정과 직장, 각종 모임 등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회인들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실패로 돌아갔지만, 내가 탈정치의 삶을 실천해보려 한 것도 그 이유다. 처음엔 현실 정치인들과 그들의 말을 무대 위에서 펼치는 배우들의 대사(臺詞)와 연기(演技)’로 받아들이곤 했었다. 매체를 통할 수밖에 없으니 비평가들의 비평안을 거친 연극을 보아온 셈인데, 가끔은 엉성하고 약삭빠른 기자들이나 시사평론가들의 눈이 한심할 때도 적지 않다. 그들이 던져주는 설명들의 행간에서 정치인들의 마음을 읽고자 나름대로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눈여겨 본 두 인물이 김무성 대표와 정의화 의장이다. 두 사람을 보며 과 같은 말의 힘을 발견한다. 애당초 김 대표는 전략공천은 없다고 단언했고, 정 의장은 원칙에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대표의 이른바 오픈 프라이머리가 지금은 상향식 공천으로 바뀌었고 인재 영입은 없다는 부대설명이 붙긴 했지만, ‘상향식 공천에 의한 선거 혁명의 소신은 분명한 것 같다. 국회법에 없는 직권상정은 할 수 없다는 정 의장의 말도 어쩌면 그의 소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원이 되겠다고 찾아온 젊은 인재들을 소개하면서 구차하게 이들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김 대표의 구차한 추가멘트나, 시종일관 대통령과 여당의원들의 요구를 강하게 받아치면서 국민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정 의장을 보면서 처음에 내뱉은 말에 꽁꽁 묶여 있는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정의장의 그런 모습이 '정치인의 신념' 아닌 '필부의 옹고집'으로 보이는 건 혹시 나의 편견일까.  그들이 내세운 이런 말들이 과연 자신들의 철학이나 신념에서 나온 것일까.

 

매체들이 보도하는 것처럼, 김 대표는 전략공천에 관한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통령의 공천 개입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대권의 꿈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의회권력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자신을 경계하는 대통령의 보이지 않는 한 수가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첫판부터 전략공천은 없다단언(斷言)’으로 못을 박았으리라. 또 다른 입장에서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정 의장은 매체들의 표현대로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원칙대로 한다는 말만큼은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첫말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 비슷한 것이다. 정 의장 자신의 고집을 통해 이익을 얻는 야당이나 일부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권으로 가는 수레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분석하는 일부 매체들도 있는데,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초시간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육체도 심리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며, 따라서 초시간적인 실체로서의 동일성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 있다면, '오늘의 나'는 벌써 '내일의 나'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 동일성이 없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약속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약속을 하고 지키고 그 약속을 믿곤 한다. 이것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없는 초시간적인 실체를, 약속을 지키고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책임을 지는 윤리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속의 말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상태의 필연적인 흐름을 초월한 불변의 실체를 이룩하고 그의 윤리적인 인격의 동일성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규호 선생의 저서 <<말의 힘>>에 설명된 말의 힘이다. ‘남자가 말을 한 번 내뱉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한다는 것은 그가 내 뱉은 말의 순수성, 정당성 혹은 윤리성이 담보되는 경우다. 어떤 불순한 목적이 전제되었을 경우 그 말은 불순할 수밖에 없으며, 불순한 말을 지키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은 공동체의 재앙이다. 말이 진정한 힘을 지니려면 일종의 초월적 윤리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이규호 선생의 설명이다.

 

김 대표나 정 의장의 말이나 고집이 과연 순수하고 정당하며 선한 윤리의식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두 사람에게 과연 불변의 실체를 담보하며 윤리적 인격의 동일성을 지키는 보루일 수 있는가. 지금 두 사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찰이 왜 이렇게 부정적이고 회의적인가. 차라리 애당초 내뱉은 말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는 즉시 잘못 되었음을 시인하는 게 정답이다. 명분 없이, 혹은 어떤 의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첫말을 지키려 한다면, 필연코 둔사(遁思)와 꼼수를 쓸 수밖에 없다. 둔사와 꼼수를 반복하다간 필연코 퇴로 없는 덫을 만나,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두 분은 이쯤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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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3. 5. 15. 01:21

, 윤창중!

 

                                                                                                                                                             백규

 

세상의 불의에 불끈거리며 서툰 언설(言說)들이나마 농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언사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 이후로 얼마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특정인을 정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도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유탄에 희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복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스스로는 그것을 힘들게 얻은 지혜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간 얻은 알량한 지혜를 도로아미타불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평범한 한국인들, 그 가운데 나를 포함한 50대 후반의 남자들을 대신하여 장작불 위로 던져진 한 마리의 미련하고 가련한 희생양을 조상(弔喪)하지 않는다면,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부끄러움을 어떻게 삭여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불자(佛子)는 아니로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에 빠져 허우적대는 저 인간의 표정에 비쳐 보이는 내 어리석음의 진면목을 어찌 남의 일인 듯 뻔뻔하게 구경만 할 수 있단 말인가.

     ***

천하의 이목이 쏠려 있는 미국의 중심부에서 윤창중이 일을 저지르고 도망쳐 온 이래, 나라 전체가 벌집 쑤신 형국이다. 멀끔한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은 대중매체들이 깔아놓은 멍석에 둘러 앉아 고담준론으로 성토하고, 인터넷에서는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백발노인에 이르기까지 몰려들어 몽둥이찜을 안기고 있다. 그의 등짝에 모진 매질을 하면서 흡사 우리는 그와 다른 범주의 인간들임을 주문(呪文)처럼 되 뇌이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미련하고 눈치 없이 굴다가 천하의 이목에 걸려 버린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요행히 그런 덫에 걸리지 않은 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일갈하신 예수의 꾸지람을 새삼 이 자리에서 들먹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윤창중이 무슨 달나라에서 온 외계인도 아닐 것이며, DNA나 대뇌에 특이한 돌연변이를 경험한 존재도 아닐 것이다. 그냥 우리 이웃의 평범한 인총(人叢)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자고나면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이 밥 먹듯 일어나는 이 나라의 허전하고 찌질한 50가 그 본색을 감추지 못한 결과일 따름이다. 지폐 몇 장 든 지갑을 흔들며, 생활비나 벌어보겠다고 나선 젊은 여인들을 희롱하는 우리네 룸살롱의 추태를 세계무대에 유감없이 보여준 이벤트에 불과하며, 나를 포함한 무수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 가운데 참으로 자제력 없고 유치한 하등 인물하나가 남의 동네에 가서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폭거(暴擧)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도 샌다는 평범한 이치를 고지식하게 실천한 그의 무모함이 놀라울 뿐이고, 그런 평범함을 교묘하게 감추고 국가경영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그의 교활함이 가소로울 뿐이다.

     ***

성범죄의 법리나 그의 행위가 초래한 현실적 문제들은 귀가 아프게 들었으니, 새삼 거기에 부실한 내 말까지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왔으면서도,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모면해 보려는 궁한 모습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인터넷 속의 무진장한 지식과 혜안으로 무장한 5천만이 밤낮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나라이거늘,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지언(知言)’ ‘(남의) 말을 알아차리는 것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치우친 말[피사(詖辭)]에 대해서는 그 가려진 바를 알아내고, 방탕한 말[음사(淫辭)]에 대해서는 함정이 되는 바를 알아내며, 사악한 말[사사(邪辭)]에 대해서는 괴리된 바를 알아내며, 숨기는 말[둔사(遁辭)]에 대해서는 그 궁한 바를 알아내는 것이 바로 지언(知言)’이라 했다. 윤창중은 미국에서 도망쳐 온 뒤 전 국민을 상대로 둔사를 농하며 궁지를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런 둔사를 농할수록 자꾸만 궁지로 빠져드는 초라하고 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 국민이 지언(知言)의 지혜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필부라 해도 지금이 살기를 도모할 때가 아님을 모를 수는 없다. 자신을 죽여도 모자랄 판에 궁한 둔사를 농하며 살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그를 보며, 비단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던 평원의 필부들로부터 기만 당해 온 지난 세월이 억울하게 생각되는 건 과연 나 혼자 뿐일까. 위압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우리들에게 군림하던 그 옛날의 고관대작들은 과연 윤창중보다 나은 존재들이었을까.

    ***

무엇보다 비판되어야 할 것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무사려(無思慮)함이다.  다시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내가 어찌 그가 재주가 모자란 지를 미리 알아 그런 자를 등용시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진 이를 등용함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해야 합니다. 장차 낮은 이로 하여금 높은 자리를 뛰어넘게 하거나 관계가 먼 자를 가까운 친척보다 앞세워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좌우가 모두 ‘(그가) 어집니다라고 평해도 그대로 해서는 안 되며, 여러 대부들이 모두 ‘(그가) 어집니다해도 아직 안 됩니다. 나라 사람 모두가 어집니다라고 한 연후에 이를 관찰하여 그 어짊을 드러나 보이게 한 뒤에야 그를 등용하는 것입니다. 또 좌우가 모두 안 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가 모두 안 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며, 나라 사람 모두가 안 됩니다하고 나서야 이를 살펴 불가함이 드러난 뒤에야 그를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좌우가 모두 죽일만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죽일만합니다라고 해도 듣지 말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일만합니다라고 한 다음에야 이를 살펴보고, 가히 죽일만함이 드러난 뒤에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 사람이 죽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라야 가히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대화다. 기원전 4세기의 맹자가 어떻게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일을 예견하고 이런 말을 주고받았단 말인가. 윤창중에게 무거운 직을 부여하던 당시 주변의 사람들이나 대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했으며, 대부분의 국민들도 납득하지 못했으나,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그런데, 그가 죽을죄를 진 지금과연 대통령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외치던 당시 국민들의 뜻을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7. 14:16
 

참회의 글


                                                    조규익


불교경전에 ‘개구즉착(開口卽錯)’ 또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오묘함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되씹어 보아야 하는 경구이지요. 스스로의 노력으로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려 하면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격이거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르친’ 격이라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의 선사(禪師)들이 흔히들 써온 이 말은 진리를 깨닫는데 말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큰 화를 낸 제가 정작 큰 일을 만나자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을 열자마자 그르친 일'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지요? 그 당시 제 가시 돋친 말의 대상이 되었던 분에게 비로소 미안한 마음을 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침 저는 ‘개구즉착’이란 성어에 빗대어 제 그러한 실수를 참회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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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쯤 전인가요? 저는 교육부총리로 임명된 김 아무개 교수에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습니다.(*그 글을 아래쪽에 첨부합니다)  당시 논문발표와 관련하여 그 분이 저질렀다고 보도된 일들이나 그에 관한 그 분의 해명이 너무나 궁하고 불쾌했던 저로서는 ‘욱’하는 성미를 참을 수 없었고, 급기야 글 한 쪽을 써서 일간지에 실었던 것이지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통쾌해 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분이 당시 인기 없던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함께 학문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외람된 사명감(?)에 저지른 일이었지요.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장관에 임명된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들의 ‘추한 모습’을 목격하며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행위에 비하면, 그 시절 그 분의 잘못이야말로 참으로 ‘애교스러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저를 몹시도 괴롭히는 요즈음입니다. 그 분의 잘못에 대하여 그런 글을 썼다면, 지금 문제된 분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글을 써야 형평이 맞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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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글을 표절하고, 한 논문을 십여 곳에 중복 게재했으며, 십여 년 가까이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발표하지 못했다면, 학자로서 더 이상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지요? 그것뿐인가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부동산 등에 투기해온 그들의 행위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교수들은 긴 방학을 즐길 수 있어서, 학문 하는 여가에 전국을 누비며 땅 투기에 전념할 수 있었노라고 ‘당당하게’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가 잘 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부동산 투기라도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요?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고뇌하는 제 주변의 교수들은 그럼 어떤 사람들일까요? 왜 새 정부에는 그런 사람들 뿐인가요? 이토록 그들에겐 ‘이런 사람도 있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단 한 사람’의 표본적 인물도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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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참여하신 문제 교수님들! 당장 거기서 내려오세요. 거긴 여러분께 분에 넘치는 자리입니다. 제가 강요할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투기로 벌어들인 부동산을 처분하여 제자들을 위한 장학금으로라도 내놓으시는 게 어떨지요? 그런 다음 그간 소홀히 했던 학문 연구에 매진하세요. 그렇게 하는 길만이 그나마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참담한 마음으로 제 실수를 참회하노니, 강호 제현께서는 부디 제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소서. 

 2008. 2. 27.


 백규 드림



*첨부(조선일보 2006년 7월 28일 오피니언 칼럼)


교육부총리, 안 되겠소

                                                         

신임 교육부 장관 관련 사건들과 이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이 갈수록 가관이다.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둔사(遁辭)’의 덫이란 것. ‘둔사 즉 도피하는 말은 논리가 궁하고 결국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는 맹자의 말씀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관 하마평이 나돌면서 자녀의 외고 편입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교육문제에 관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만큼 그의 답변은 시원치 못했다. 그러다가 제자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사회를 감염시킨 표절사건들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그 사건의 노출로 학계는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당사자는 ‘전혀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학계와 국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곧바로 ‘BK21 논문 중복 게재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던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실무자의 착오’라는 전제를 달아둠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표절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자인 신모씨의 논문이 통과된 것보다 자신의 논문 발표가 앞섰으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제자에게 설문조사나 데이터 작성을 시킨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괴한 것은 같은 데이터로 제자는 학위논문을, 자신은 일반논문을 작성했는데, 제목도 논조도 결론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시기를 따지면 장관의 논문 발표보다 학위논문 통과가 두어 달 뒤진다. 그러니 자신은 표절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모씨는 장관의 논문이 발간되고 나서야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박사학위논문에는 최소한 서너 번의 심사과정이 있다. 심사위원인 자신의 논문이 도용당했음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만능시대, 표절의 전성시대, ‘표절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학위논문 심사의 핵심’이라는 교수들의 한탄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은 요즈음이다. 하물며 직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이 제자의 학위논문에 도용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관이 한 마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이게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BK21 논문사건은 표절보다 더 큰 문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고등인력 양성’이란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쓴 잔을 마신 필자를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교수들이 몇 개월간 날밤을 새워가며 BK21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으나 선정된 인원은 소수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어 보겠노라는 국가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한때 고무되었던 우리다. 장관은 논문을 중복 투고했으면서도 연구비는 그대로 챙겼으리라. 그렇게 귀한 국가예산을 ‘눈먼 돈’ 쯤으로 여겼단 말인가. 그런 입장으로  어떻게 ‘표절하지 말라, 연구비 집행을 투명하게 하라, 학위논문의 부실을 막기 위해 철저히 심사하라,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편법을 쓰지 말라’는 영(令)을 내릴 수 있는가. 장관직 수행에 행정능력이나 기술이 중시된다지만, ‘교육인적자원부’만은 달라야 한다. 국가의 만년 대계를 책임 진 곳이 바로 교육부다.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인격이나 학자로서의 품위에 시비가 따르지 않을만한 인물을 발탁해야 하고, 스스로 ‘적재(適材)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고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강호에 묻건대, 과연 지금이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관직을 고수할 상황이란 말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