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7. 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5. 7. 3. 11:59

 

 

 

 

 

 

 

 

지난 몇 년 간 악장문학과 해외 한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틈틈이 북한에서 나온 문학사들을 읽어 왔습니다. 그리고 간간이 그에 관한 제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고전시가들을 중심으로 몇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북한사람들 특히 학자들의 생각이 너무나 경직되어 가뭄에 실개천 마르듯문학작품의 분석이나 해석에서는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나 주체적 사실주의만으로 무궁무진한 문학작품의 이면적 의미를 퍼 올리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 사유(思惟)의 정형성은 침대에 키를 맞추어 발을 잘라내던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몇 종 되지도 않지만, 그들의 문학사를 다 읽고 더 많은 글을 쓰다가는 수많은 동어반복(同語反覆)’의 함정에 빠질지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에, 당분간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제 사유의 또 다른 틀이 생성되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그들 문학사의 이면적 의미들이 보일 때쯤 다시 쟁기를 들고 나설 생각입니다.

 

여기에 이 책의 머리말을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머리말

 

남북한은 말과 글자, 그리고 역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이 땅의 단일민족은 역사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단과 이질화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역사 또한 양분되고 말았다. 민족에게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은 하나이되, 그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남북한 역사 이질화의 근원은 이념이다. 처음에 통치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북한은 한 발 더 나아가 주체사상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역사의 이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북한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나 주체적 사실주의의 잣대는 그런 것들이 없던 시기의 옛 문학이나 지금의 창작문학에 가리지 않고 적용되었다. 옛 문학에 대해서는 해석의 도구로, 지금의 문학에 대해서는 창작과 비평의 원리로! ‘김일성의 교시’, ‘김정일의 지적과 함께 제시된 것이 강령으로서의 사회주의 미학 혹은 주체미학이었다. 문학작품이든 문학사이든 획일화의 감옥에 가둬버린 것이다.

 

우리 고전시가를 통해 그 실상의 일부나마 확인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이 글이고, 일부 학자들이 고창해 온 통일문학사의 서술이 허구라는 점도 이 공부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북한의 문학사()를 이 땅의 다수 문학사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주면 될 일이지, 다양성을 추구해온 남한의 문학사들까지 굳이 주체미학의 형틀에 묶인 북한식 문학사로 획일화시킬 필요야 있겠는가.

 

문학사에도 시대의 소임이 주어진다. 시대정신이나 미학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문학사라는 뜻이다. 각자 자기 시대의 목소리로 해석한 문학사를 읽으려 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문학사 아카이브에는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남한의 문학사들과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의 문학사()가 그들먹하게 들어차겠지만, ‘문학사 서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극소수의 학자들이나 그것들을 찾게 될 것이다.

 

책을 멋지게 만들어주신 보고사 김흥국 사장님과 편집부 이순민 선생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해외에서 학업을 마치고 패기 넘치는 교수로 뉴욕대학(New York University)에 입성한 큰 아이(경현)와 현대건설에서 훌륭한 기업인의 꿈을 키우고 있는 작은 아이(원정)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을 건넨다.

 

을미년 한여름

백규서옥 주인

조규익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문학사>>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문학사>>

 

 

 


북한에서 발간된 고전 작품들

 

 

 


북한에서 발간된 고전 작품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 9. 18:31
 

스물일곱의 김정은을 보며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스물일곱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중위 계급에 전임강사로 있던 사관학교에서 전역, 곧바로 대학으로 옮겨 간 것이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학과 교수들 가운데 최 연장자는 48세의 수필가 신상철 선생이었다. 그 분은 첫 대면의 자리에서부터 불안한 눈빛과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48세가 27세를 바라보는 노파심이었을 거라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살짝 불쾌했다. 30 전후의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40이 넘은 학생들도 여럿 되던 당시였다. 학생지도가 교수 업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던 당시 대학의 시니어 교수로서 새파란 내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래도 당시 나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이치를 다 꿰고 있다는 듯, 마음속에서는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사회와 선배들에 대한 불만이 늘 부글거렸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정치와 시국에 대하여 목청을 높이기 일쑤였으며, 사관생도들이나 학생들을 만나서는 도사처럼 인생을 논하곤 했으니, 어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고 한심하여 저절로 낯이 붉어질 따름이다. 내가 보낸 치기(稚氣) 만만한 젊음을 다 늙어 철 든 지금 생각할 때마다 괜스레 겸연쩍어지곤 하는 것도 당연하다. 당시의 신상철 선생보다 더 나이 든 지금, 30대 초⋅중반의 신임교수들을 보며 부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세상 이치를 모두 꿰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해 하는 그들의 언행에 슬그머니 미소가 머금어지곤 한다. 어쩌면 그 옛날의 내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리라. 당시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니, 교수로도 남편으로도 아빠로도 상당 기간 내 트레이드마크는 ‘젊음’이었다. 허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철없던 시절이었다. 허둥허둥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발을 붙인 현실에 대해서는 ‘무대책’의 ‘어린애’에 불과했다. 대학이나 사회에 대하여 약간의 깨달음이 생긴 지금에서야 불끈거리는 '패기’만으로 흘려보낸 세월이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

북에서 김정일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은이 ‘즉위’했다고 난리를 피우는 중이다.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본다면, ‘천둥벌거숭이의 나이’가 바로 스물일곱이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란 말은 참으로 희한하다. 국어사전을 펴 보면 ‘두려운 줄 모르고 철없이 덤벙거리거나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말뜻치고 이보다 더 정확하고 재미있을 수는 없다. 글쎄, 한 고을의 이장을 하려 해도 많은 관록과 나이가 필요할 텐데. 아무리 찌그러져 가는 북한사회라 해도 겉모습은 분명 ‘나라’인데, 괜찮을까. 요즘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며, 새삼 내 ‘스물일곱 시절’을 반추해보곤 한다. 김일성, 김정일을 거쳐 오면서 그 기세 높던 ‘북조선 사람들’의 기를 송두리째 죽여 놓았으니, 누구라서 찍소리 한 마디라도 내뱉겠는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어찌 능구렁이, 살모사, 고슴도치 들은 없을 것이며,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인들 어찌 없으리. 과연 ‘그 어린 것’이 그 험한 계곡과 능선들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내가 그 때 그래 왔듯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 뛰다가, 게도 구럭도 모두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팔자’라고,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북쪽에서 새로 즉위한 ‘어린 왕’을 걱정하는 내 꼴이 가관은 가관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를 고스란히 우리가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게 심히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

그래도 내 스물일곱 시절엔 너그럽게 훈수해주던 선배들이 있었고, ‘절에 간 새댁’처럼 그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편했다. 가끔씩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자존심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와해될 일은 없었다. 그런데, 북쪽의 ‘스물일곱’이 팩 돌아서 어느 순간 ‘핵단추’라도 누른다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야 고작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가 200여명 남짓의 학생들을 상대하던 보잘 것 없는 교수였지만, 그 친구는 무시무시한 ‘대장’ 계급에 북조선 인민들의 생살여탈권까지 거머쥐게 되었으니, 분명 그와 내가 같은 급의 천둥벌거숭이는 아니렷다? 그러니 우리 모두 휘발유통 안고 장작불 앞에 앉은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실 김정일은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을까. 그곳이 아무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지만, 스물일곱이 갖는 의미를 모를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아버지의 입장에 서면, 가업을 물려 줄 자식이 오십 줄에 들어서 있은들 마음이 놓일 일은 아니리라. 하물며 삼십도 못 된 자식에게 기울어가는 가산을 맡기고 떠나는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래서 더욱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 상황이 가련하고 딱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과거 ‘스물일곱의 아프면서도 영광스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내 판단이다. 그동안 바짝 조였던 정신을 좀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유유자적하고 싶었는데, 다 늙은 지금 새삼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슬퍼짐을 금할 수 없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6. 25. 05:32


2009년 6월 25일. 타고난 반공주의자(?) 백규의 출현을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모스크바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6·25의 원흉 구소련은 러시아로 이름을 바꾼 채 목하(目下) 자본주의의 실험을 펼치고 있는 중인데, 백규 일행은 그 심장부 모스크바에서 과거를 발판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탐지하고자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

오전엔 전쟁기념관을 찾아 러시아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의 질곡들과 만났고, 오후에는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찾아 러시아 미술의 진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저녁에 ‘최후의 고려인’ 정상진 선생과 열망하던 만남을 갖게 되었다. 6·25날에 그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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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택에서 정상진 선생과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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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살고 있는 따님과 정선생, 그리고 사위>

모스크바 외곽의 울리쨔에 있는 그 분의 아파트로 찾아간 시각이 오후 5시쯤. 함께 살고 있는 사위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반색을 하며 맞아주시는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족, 이념, 문학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들이 그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고려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거울삼아 한민족 공동체가 꾸려나가야 할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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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문화선전성 차관을 지냈고, 6·25에 참전했던 그 분이 김일성으로부터 숙청을 당하여 소련으로 귀환한 뒤, 카자흐스탄 인으로 살아온 세월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몸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사실 그는 2세 고려인으로서 고려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1인으로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20여 년 간 수십 차례 한국을 왕래하며 한국의 지식인들과 교유해오고 있는 선생임에도 당신의 거처로 찾아온 한국의 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은 듯 했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본 사람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그 분의 말씀은 역으로 공산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이른바 ‘관념적·이상적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대들을 만난 오늘이 내 명절이야!’를 반복하시는 90 노구의 지식인으로부터 비로소 ‘탈이념의 민족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정수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고려 말을 하는 고려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고려 정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바로 지금부터 고민해야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꿈을 키우기 위해 북으로 왔다가 시련을 당한 많은 문인, 예술인들의 삶을 통해 그 체제가 갖고 있던 허위와 기만,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고발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누리는 무한한 자유와 민주의 즐거움을 부러워하며, 그것만큼은 소중하게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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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2005년에 펴낸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를 통해 해방공간과 6·25, 대규모 숙청사건에 이르는 북한사회의 이면사를 보여준 바 있다. 선생은 조만간 그 책의 수정·보완판을 내고자 한다 했다. 매우 절제된 구술을 통해 이미 보여준 그 시절의 이면사에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많은 것일까. 아마 ‘덧붙임’ 자체도 극도의 절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정확하지 않은 말’은 모두 잘라버리는 선생의 결벽증으로 미루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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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老少) 간에 왕래하는 정담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슴을 훑어 내리는 보드카의 주향(酒香)만이 지성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백야(白夜)의 한밤이었다.

2009. 6. 25.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