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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3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2. 2007.04.10 스승의 날 유감
글 - 칼럼/단상2015. 1. 23. 12:30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나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論語>> <里仁>]는 공자의 말이 있다. 군자라면 ‘말수가 적고 좀 느려도 행동만큼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말했으면, 반드시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 쏘면서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달변가들을 꾸짖은 말씀이었을 텐데, 공자 시대의 그런 사정이 오히려 심화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누가 보아도 달변가는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 내뱉는 데도 그렇게 힘이 든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쩌면 대통령이 소통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변가인 참모들과 정치인들, 기자들을 대하는 일이 끔찍하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석학 할아비'라 한들 말로 해서야 누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언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말 실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말이 있다. 대개 앞에 인용한 공자의 말을 보거나 ‘말과 실천’을 결부시켜 온 동양적 사고를 생각해 보아도 ‘말 잘하는 것’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깡촌’의 흙 속에서 꼬물거리던 내 코흘리개 시절, 그 때까지 본 적 없는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우리 마을에 내려와  ‘말끔한 달변의 서울말’로 사기 치던 토지 브로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기꾼에게 넘어가 몇 십 년을 고생하시던 농사꾼 내 부모의 한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속엔 다른 세대가 쉽게 이해 못하는 그런 공감영역이 있다.

 

자라면서 ‘말만 말끔하게 잘 하는 인간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기꾼들이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판들을 여러 번 접해오는 중이다. 참, 말 잘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최근 10년 이내 두 번의 선거판을 말로만 본다면 ‘눌변 : 달변’으로 요약된다. 지금의 50대들이 누구인가?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아 이제 은퇴기에 도달한 연령대다. 전통 교육 속에서 자라나 ‘농경사회→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지식기반 고도정보화사회’의 고비들을 용케도 탈 없이 거쳐 온 사람들이다. 어쩜 비슷하게 고단한 환경과 의식 속에 성장했다는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국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달변가도 보았다. 당시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달변이 이른바 ‘종북’이나 ‘극좌’와 합쳐지면 나라로서는 재앙이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를 위해서 천행이었다.

***

지금 50대의 민심이 대통령으로부터 이반(離反)되고 있다고 북악산 언저리에 수심이 가득하다. 5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그 50대가 민심이반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니, 당하는 심정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늘 아침 인적 쇄신책이라고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격화소양[隔靴搔癢: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의 미봉책일 뿐이다. 참,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신의 신조나 철학으로 주변의 개인들을 신뢰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갖는 신뢰와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공인이지 개인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을 상대로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정치 논리’다. 하물며 5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상대로 하면서 정치논리를 도외시하고, 어찌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댄단 말인가?

 

인사를 말끔히 쇄신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있다면, 그간 쓰고 있던 개인의 안경을 국민의 안경으로 즉각 바꿔 써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개인의 안경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공자가 말한 군자의 ‘눌변’ 차원이 아니라 김 모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던 ‘칠푼이’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다. 누가 보아도, 비서실장이나 ‘문고리 3인방’은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누가 쫓아내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게 맞다. 누구 말대로 ‘인간적 신뢰를 지킨답시고’ 그들을 껴안고 간다면,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강호의 현사들을 등용한다 한들 그게 어찌 ‘쇄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특히 50대들은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의 입을 쳐다보기에도 지쳐 있는데, 행동마저 이리 굼뜨다면 참으로 절망이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북핵, 경제, 안전’의 불안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있다. 판단력이 흐리고 굼뜬 조타수에게 어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즉각 비서실장과 3인방을 내치시라. 팔팔하고 번뜩이는 감각의 30~50대 초반의 명망가들이 강호에는 넘치고 넘친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그들을 모신 뒤, 만기친람하려 들지 마시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시라.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그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면 대통령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이 민족에게 재앙을 안겨 주게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7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5월. 달력을 본다. ‘5월 15일’, 붉은 색이 선명하다. 아, 살았다! 선홍색 카네이션 한 송이 받아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스승의 은혜>를 들어야 하는 고문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건만, 놀랍게도 스승의 날만큼은 챙겨야 한다는 믿음(?)들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나마 스승의 날이라도 있어서 ‘선생 할 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대접 받아도 좋을 만큼 제대로 교육을 시킨다고 자부하는 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육의 현장에 있으면서 ‘스승 노릇’ 하기 쉽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없는’ 기자들은 고등학교에서 내신이 강화된다는 신문기사를 쓰면서, 극성스런 ‘치맛바람’이 걱정된다고, 없어도 그만일 사족을 꼭 끼워 넣는다. 치맛바람이란 무엇인가. 그 속엔 ‘제 자식에 대한 불합리한 편애의 강요’와 촌지문화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학기가 시작될 즈음이나 스승의 날 전후, 촌지의 지저분한 소식들이 언론매체들을 장식하기 시작하면 내 일이 아니면서도 곤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촌지 교사의 집을 급습하여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싸여있는 각종 명품들을 TV 화면에 비춰댈 땐 같은 선생으로서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첫 발령을 받은 시골 고등학교에서의 일이다. 말썽꾸러기 영수(가명)의 어머니가 찾아온 날이었다. 까맣게 탄 얼굴로 시종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나 또한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작별 인사차 밖으로 나간 내게 그 어머니는 계단 밑에 숨겨둔 콜라 두 병을 건네곤 도망치듯 내빼는 것이었다. 그 콜라는 유독 달고 맛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촌지’였다.
 
그러나 대학에는 학부모가 찾아 올 일도, 학부모를 부를 일도 없다. 그래서 촌지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대학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곤혹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교수들을 세워놓고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런데 부르는 학생들도 듣는 교수들도 참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물론 노래를 통해 당위나 이상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노래에 표현된 ‘스승’과 나 자신을 비교해보면서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은 것은 왜일까?
 
오늘날의 대학이 ‘완성된 인간’을 기르는 수양의 공간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기능적 일꾼들’을 길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 시대의 대학교수들이 스승을 자처하기란 좀 계면쩍은 일일 수밖에 없다. ‘의식(衣食)이 족한 뒤에야 예절을 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더욱이 물질이 정신을 확실하게 지배한다고 믿는 요즈음, 정신적 양식만으로 현실적인 허기를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학이란 직업 양성소가 아니라고 제 아무리 ‘고담준론’을 펴 보아도, 현실을 외면할 도리는 없다. 스승의 날을 목전에 둔 지금, 4년간 기른 제자들이 학교 울타리 밖에서 할 일 없이 서성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대부분의 교수들은 ‘좌불안석’이다. 죄인이 따로 없다. 그러니 무슨 기분으로 <스승의 은혜>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요일인 5월 15일’이 고맙고도 고마울 뿐이다. <2005. 5. 9.>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