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3. 28. 22:57

갑작스런 시간여행

 

  

요즘 따라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진다.

잠들기 전에 마무리하려고 가져 온 원고를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잠들었을 때, 서재 어딘가에 있을 책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왔으면서도 늘 그러하듯 무책임하게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잠들었을 때, 더욱 그렇다.

 

새벽 3시나 넘었을 무렵. 서재로 넘어가 책장을 짚어가던 중, 웬 작고 허름한 책자 하나가 손에 잡혔다. “젊은 대지에 사색의 씨앗을 뿌리며...”라는 그럴싸한 제목과 철학과 92학번 일동 함께 씀/1992. 12. 1.”이 명기된 수제(手製) 소책자였다. 순간 25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되었다.

 

1992년은 숭실 부임 5년째인 병아리 교수 시절이었다. 필수 과목 교양국어와 작문을 국문과 교수와 강사들이 전담하던 당시였다. 그 해 2학기에 나는 철학과 1학년생들의 작문을 맡고 있었다. 참 해맑고 순수한 그들이 좋았다. 철학과 학생들이어서 그랬을까. 글쓰기의 요령도 척척 터득해 나갔다. 말을 걸어도 요즘 학생들처럼 쭈뼛거리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들의 삶과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였을까.

 

학기 내내 써온 글들을 발표하고 비평하게 하니, 그들의 글과 말이 일취월장했다. 전공과목보다도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한 발 더 나아가 수필 한 두 편씩을 쓰게 했다. 그 글들 또한 재미있었다.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워서 한데 묶었고, 한 부씩 나눠 가졌다. 그로부터 25년 동안 내 기억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가 지금 !’하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멋쩍은 일이지만, 내 과거에 대하여 감동한 건 처음이다. 그래서 종이 한 장 버리지 못할 때가 많다. 숨 쉬기 어려워질 때마다 몇 아름씩 내보내긴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자는 고맙게도 살아남아 있었다. 혹시 모르니, 내 머리말과 권두수필(<새해의 계획을 세우며...>)을 이곳에 옮겨 놓기로 한다.

 

 

책머리에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의 면소재지에 당시로서는 유일한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철학과에 다닌다고 하였다. 한 여름이 가깝도록 그는 오버코트 비스름하게 생긴, 검고 두툼한 옷을 입고 다녀서인지, 대체로 지저분한 몰골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늘 고개는 약간 삐뚜름하게 숙인 채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나는 그의 외모에 덮씌워진 그 분위기의 근원이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히 당시 그곳 사람들도 누구든 철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으레 현실과는 동떨어졌거나 약간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철학이 우주와 인간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고도로 정치(精緻)한 사고와 논리적 틀을 요구하는 학문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이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기도 했음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철학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대학에 진학하여 비로소 --을 두루 갖춘 인간 형 만이 지성인의 전형일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 세 분야가 합쳐져 형성하는 인문학이야말로 전통 학문의 중심임을 인식하고 난 뒤 비로소 나는 내가 배우고 있는 공부에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즈음 철학과, 국문과, 사학과에 진학하는 대학생들을 나는 국보(國寶)로 여긴다. 황금 만능, 실용적 기교 만능의 얄팍한 세태를 보라. 모두들 기를 쓰고 금방 돈 될 만한 것들만 찾아다니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래도 정신적인 것을 탐구하겠노라 문사철의 울타리에 들어오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아끼고 북돋워야 할 국보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들이 더욱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촘촘히 박힌 강의 시간들만 아니라면, 밀린 글 빚들만 아니라면, 거의 의무적으로 읽어야 할 전공서적들만 아니라면, 나는 이들과 늘상 어울리며 인생과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연히 이번 학기에 나는 애송이 철학도들과 작문이라는 과목을 통하여 만나게 되었다. 글이란 가슴과 머리 속에 파도치는 순정한 욕구의 흘러넘침이라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사실 작문의 그 짓는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들에게 문장을 만들고, 꾸미는재주나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학이라는 제도의 틀에 갇힌 이상 보고서를 내야하고 논문을 써야 할 것이며, 졸업 후에는 자기 소개서도 이력서도 써야 할 것이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보면 단순히 손재주에 불과하더라도 작문을 아니 가르칠 수 없는 터이렷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글 쓰는 기교만을 가르쳐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끝나기 2, 3주 전에 수필을 한두 편씩 써 오도록 하였다. 각자의 작품을 읽히고, 동료들로 하여금 비평하게 하였다. 비록 덜 다듬어지긴 하였으되, 나름대로 발랄하고 생기 있는 삶의 편린들이었으며 예리한 비평들이었다. 그냥 버릴 수 없었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아늑한 강의실에서 우리가 공감했던 작은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고 싶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이것을 읽는다면,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공감할 수 있으리라.

 

자주 싱겁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최지환이가 이 작업을 자원하였다. 그 깡마른 체구에 킥복싱이라는 엄청난 무기가 숨겨져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자진하여 맡는다는 것도 이해(利害)에 초연할 수 있는 철학도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단히 상쾌하고 즐거운 일이다.

 

임신년의 꼬리가 보이는 어느 날 밤 백규서옥(白圭書屋)에서

 

조규익 씀

 

***********************

 

새해의 계획을 세우며

 

섣달 그믐날 개밥 퍼 주듯 한다”, “섣달 그믐날 시루 얻으러 다닌다는 속담들이 있다. 시집도 못 가고 한 해를 또 넘기는 노처녀가 홧김에 개밥을 푹푹 퍼 준다는 데서 나온 말이 전자요, 어느 집이나 다 시루를 쓰는 섣달 그믐날에 남의 집에 시루를 얻으러 다닌다는 데서 나온 말이 후자다. 또한 대중없이 인심 쓰는 경우를 빗대는 말이 전자요, 되지도 않을 일을 공연히 벌여 놓는 것을 빗대어 놀리는 말이 후자다. 양자 모두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나 행동을 나타내는 절묘한 표현들이다. 그 비정상적인 상태는 허둥대는 모양을 말하며 그 시간대로 섣달 그믐날을 지정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사람들은 으레 초조한 마음으로 허둥대기 마련인가. 섣달 그믐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인간의 만각(晩覺)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가 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던 은사 원정(園丁) 선생은 늘 시간의 짧음을 한탄하시며 빈둥거리던 우리의 젊음을 꾸짖곤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한다. 당연히 그 때의 우리도 그런 말씀을, 대책 없이 늙어버린 훈장의 잔소리 쯤으로 흘려듣곤 하였다.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인생의 길이를 계산해 보이셨다. 여기서 인생의 길이란 물리적 시간 혹은 생물학적 수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동물과 구별되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치를 창조하고, 비록 하잘 것 없다 해도 나름대로의 기념비를 세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를 뜻한다. 물론 억지를 쓰자면 자식들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기념비가 아니냐고 강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일생 동안 이룬 일이 그것뿐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한 인간의 수명을 어림잡아 70이라 하자. 20까지는 아직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기간이고, 60에서 70까지의 10년 역시 삶의 현장으로부터 은퇴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니 70의 수명에서 30을 빼면 40년 정도가 독립적인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가치 창조를 향해 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반 정도는 잠 자는 시간이니 이것을 빼면 20년이 남는다. 그것뿐이랴. 밥 먹는 시간, 변소 가는 시간, 남을 물고 헐뜯으며 쓸 데 없이 낭비하는 시간 등이 줄잡아도 하루의 삼분지일은 될 것이니 이것을 빼면 겨우 13년 정도 남게 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우리의 삶에서 정채(精彩) 있는 시간이 우리의 일생 중 겨우 10년 남짓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지 않은가. 벽시계의 초침은 종착역을 향해 숨 막히게 재깍거리는데 아직도 눈앞의 캔버스에는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 무슨 기념비를 세울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도 못해 본 채 끝내버리는 것이 우리 장삼이사들의 삶이라고 체념해야 할 것인지.

 

열두 해 만에 찾아 온 원숭이가 기엄기엄 고개 마루를 넘으려 한다. 지난 섣달 그믐날에 밤을 밝히며 긁적거려 두었던 새해의 계획표가 뽀얀 먼지만 뒤집어 쓴 채 널브러져 있는 것이 올해라고 다를 리 없다. 기어코 고놈의 기념비라는 것을 윤곽만이라도 잡아 볼 게라고 설치던 정초의 오연한 패기는 칠팔월 땡볕에 엿가락 늘어지듯 우습게 되어 버렸고, 아득한 피로만이 백중사리 밀물 마냥 밀려든다. 괜히 마음으로만 바쁠 뿐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이 때 쯤에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화롯불 옆에서 책을 읽거나 세한도(歲寒圖)를 치면서 마음들을 가다듬은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책을 읽거나 화폭을 어루만지며 묵은해를 돌이켜 보고 새해로 넘어가기 위한 원기를 모은 것은 아니었을까?

섣달 그믐날, 한 해의 계획을 점검하며 흡족해 하는 이가 그 얼마이겠는가. 아마 대개는 이것들을 다음 해로 넘겨야 하는 마음 무거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태반이 넘을 것이다. 조율만 계속하다가 제대로 된 연주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마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 계획과 다짐은 수없이 하면서 정작 실행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10년 남짓 허여된 가치 창조의 시간대를 헛되이 까먹으면서도 결국 그 기념비의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획을 세운다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이 뻔하다 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어찌 계획 없이 새해를 맞을 수 있으랴! 도로 굴러 내려올 줄을 알면서도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던, 신화 속의 시지프스처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분명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세밑의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다시 먼지나 뽀얗게 뒤집어 쓸 것이 뻔한 새해 계획표를 끄적거리는 중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3. 24. 12:27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님께

 

 

 

 

탄핵 소추가 의결되면서부터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국정수행에 대해서도 비판과 비난이 난무하고, 일부 정치세력들의 무리한 딴죽걸기 또한 없지 않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나날이시겠지요. 그러나 비록 한시적인 대행이라 할지라도, 국가원수로서 하셔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제 미국의 매티스 국방장관은 상원 세출위원회 국방소위 청문회에서 중국이 주변 국가를 조공국가 대하듯이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가지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의 집권세력이 비로소 동북아의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 상대적으로 역사와 현실의 상관관계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우리의 현주소를 내 스스로 아프게 파악했다는 점 등입니다 

 

우리는 왜 중국의 시대착오적 패권주의의 악행(惡行)’을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기만 해야 할까요?패권국가란 쉽게 말하여 깡패국가란 뜻일텐데요. 한낮의 대로 위에서 깡패에게 얻어맞으며 똑 같이 깡패처럼 대응할 필요는 없다 해도, 논리 정연한 꾸지람 한 번 건네지 못하는 현실이 통분하여 일개 민초인 저로서는 편안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세계를 향해서 입을 열 때마다 화평(和平)’을 말하고, 미국의 보호무역을 비판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거짓구호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 반대의 뻘짓들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흡사 범죄자들이 문서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귓속말로 속닥거리듯, 자국의 모든 분야 일꾼들에게 한국을 응징하라는 구두지령을 내린 바 있고, 일당독재의 나라답게 그 명령을 받아 기계처럼 움직이는 중국 사람들입니다 

 

공자와 맹자를 낳은 나라라고 믿어오던 중국과 전쟁 없이 살기 위해굴욕에 가까운 저자세 외교로 중세 이래 근대까지 정체성을 근근히 유지해 온 우리민족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2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런 불평등의 관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오랜 역사의 관성(慣性) 때문일까요? 아니면 힘의 불균형을 바탕으로 한 현실의 부조리때문일까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패권주의적 행동(깡패 짓’)을 놓고 볼 때, 시진핑이 말한 화평굴기(和平崛起)’란 '근대 이전 중화제국의 재건 혹은 회복을 염원하는 몽상(夢想)이라 할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 부조리한 현실의 본질을 저 같이 하찮은 민초도 잘 알고 있는데, 하물며 국가원수이신 황 대행님께서야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미국의 국방장관이 먼저 이런 문제를 아프게 지적하고 말았습니다. 그 지적을 시대와 역사에 둔감한 중국의 지도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는 없지만, 저는 한편으로 사이다처럼통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 말은 먼저 우리 국가원수의 입에서 점잖으면서도 조리있게 표출되었어야 합니다. 혹시 그 언급이 음으로 양으로 매티스 장관과의 교감 하에 생긴 일인가요?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의도치 않게 <<삼국지>>에서 왕윤이 여포를 시켜 동탁을 죽인 것같은, 일종의 차도살인(借刀殺人)’의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더더욱 떳떳치 못한 일입니다

 

, 이쯤 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발뺌해도, 사태는 백일하에 드러났을 뿐 아니라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지금 양국 정부가 출구를 찾기 위한 물밑 교섭을 진행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노와 무력감에 빠져있는 국민들을 위하고 비정상적인 중국 지도층의 사고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국가원수인 대행께서 즉시 나서셔야 합니다. 약간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중국의 지도부와 우리 국민들을 상대로 담화문이라도 발표하셔야 합니다. 매티스 장관이 말한 중국의 '패권국가적 태도'는 대행께서 지적하셔야 할 내용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젠 당신들의 조공국이 아니라는 것, 이제부터는 화평과 선린우호의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조속히 정상국가로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것' 등을 조용하지만 엄숙한 어조로 중국에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비이성적 태도로 상처를 입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순리로 그들을 설득하는 동안 국가의 힘을 동원하여 민생을 안정시킬 것이니, 잠시 정부를 믿고 인내해 달라' 당부를 건네는 것이 옳습니다. 대외적인 식견이나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대선 후보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 무엇보다 답답한 요즈음입니다. 그러니 중국이 좋아할 '우물 안 개구리'가 새 대통령으로 등장하기 전에 저들을 향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 두셔야 합니다.      

 

덩치만 크고 속이 좁은이웃을 달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은 역사나 그동안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당당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은 자손만대 저 나라와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하지하책(下之下策)’도 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그들이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고 있는 점에 대하여 지금 온 국민이 공분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보다 더 중한 국사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이 문제의 해결보다 더 큰 국가원수의 책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소수의 정파나 인사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뒤에서 응원을 보내고 있으니, 대행께서는 부디 힘과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3. 20. 08:17

어리석은 대한민국 외교부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굴욕을 당해 온 역사가 참으로 길다.

21세기 초반에 들어와서도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이른바 정치를 한다는 자들의 전략 없음, 소신 없음, 센스 없음때문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뻘짓을 하다가 쫓겨나 국가를 누란(累卵)의 위기에 몰아넣은 지 몇 달.

그 공백을 장관과 관료들이라도 메워가며 급한 불은 꺼야 할 것 아닌가.

 

최근 미국의 국무장관이 다녀갔다.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미국과 중국만큼 우리 생사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강대국이 있는가.

그리고 미 국무부 만큼 우리 이해관계의 키를 쥐고 있는 부서가 있는가.

 

그 장관이 와서 우리의 정부 요인들과 첫 대면을 했는데, 공식적인 회담만 하고 만찬을 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장관이 거절했다하고, 그 쪽에서는 한국에서 제의조차 없었다고 밝힌 점이다.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틀리기도 할 것이다. 아마 우리 쪽에서는 슬쩍 지나가는 말로 저녁 한 번 하실래요?”라는 제의 겸 인사치레의 말을 건넸을 것이고, 그것을 만찬 제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쪽에서는 그것을 공식 의전절차 아닌 가벼운 인사치레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 이어서 벌어졌다. 엊그제 미 국무장관은 일본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고,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말했다 한다. 미국과 유럽인들이 일본을 중시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나 같은 민초도 느껴서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들 장관의 입으로 이런 말을 내뱉게 해야 하는가? 그들 마음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런 내심이 공식적인 멘트로 나온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보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북한의 핵 장난이 우리로서는 초미(焦眉)의 급한 불 아닌가.

 

일본에서 잘 대접 받았으나, 한국에서는 제의조차 없었다는 그 저녁 한 끼 때문에, 틸러슨 장관의 그 말이 나왔으리라 믿고 싶진 않다. 그러나 세상사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모든 일은 사람의 기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그동안의 내 경험이다. 저녁 한 끼 대접하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렵더란 말이냐? 상대방이 예의상 사양한다 하여 그럼, 잘 됐네. 돈 굳었네!’라고 쾌재를 부르며 물러섰더란 말이냐? 운동장만큼 큰 회담 테이블에서 핑퐁처럼 주고받는 말들은 그야말로 외교적 언사들일 뿐이다. ‘진짜 협상은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상식 만 외교부 당국자들이 알고 있었어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대통령이 없다고 자신들의 일을 그렇게 대충대충 해치운 것일까.

 

외교부 당국자들이여! 1950110일 미 국무 장관 애치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는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이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 선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해버린 것이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 북한이 오판하여 625를 일으킨 결정적 계기였다.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권에서 제외되었으니, 안심하고 침공한 것이다.

 

그 애치슨과 지금의 틸러슨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똑 같은 미국 국무장관이고 똑 같이 일본을 좋아하되, 한국에 대해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저 밥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이 세계사를 논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하려는가? 지금의 한국이 가장 중요한 동맹아닌 중요한 파트너란 말을 잘 해석해 보라. 만약 그들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속뜻이 숨어 있음을 모른다면, 외교부 당국자들은 당장 옷을 벗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찔리는 바는 있었는지, 외교부에서는 의미 부여할 내용 아냐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다. 가관이다.

 

큰 불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고, 제방의 붕괴는 실낱같은 누수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미국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중요한 사명을 갖고 동북아를 순방하는데, 우리 국익을 지키기 위한 밥상머리 협상조차 성사시키지 못한 외교부 장관은 당장 물러나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쫓겨난 대통령의 가장 큰 오점이 인사의 난맥이었는데, 외교부에서 그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제발, 정신들 좀 바짝 차려 달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3. 10. 13:36

 

 

 

2012년 12월 20일,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탄핵 되었다.

모든 것이 순리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3. 1. 13:58

이제 태극기와 촛불을 내려놓을 때다!

 

 

 

 

 

 

오늘, 31절이다.

 

식민제국주의의 대표적인 깡패국가일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난 날 아닌가. 바로 오늘, 국민 전체가 촛불 부대와 태극기 부대로 나뉘어 광장의 결투를 벌인단다.

 

우로 갈려 피 터지게 싸우던 70여 년 전 우리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모양이다. 이른바 대권주자들이 대열의 앞장에서 선동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대신 선동의 칼을 휘둘러 표를 얻어 보려는 저들의 무책임이 가증스럽다. 저런 사람들이 국민과 국가를 대표하겠다니, 이 민족의 불행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존경하는 역사철학자 카(E.H.Carr)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왜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바로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아예 떠올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실들과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70년 전의 일인데,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우행(愚行)’에 대하여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러니, 똑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제, 이쯤 멈추어야 한다. 촛불은 끄고, 태극기는 고이 접어 잠시 상자에 모셔 두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 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하자!

 

시작이야 어떠했건, 지금 이 순간은 촛불과 태극기 모두 독선과 아집의 표상일 뿐이다. 독선과 아집은 시간 앞에 무력하다. 잠시 내면을 관조하고 나면 언제 그랬었냐 싶게 독선과 아집은 해 뜬 후의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시간 앞에 영속되는 건 없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삭여보자.

 

제발, 이제 치고 받는 싸움일랑 그치고 심판의 깃발에 따르기로 하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