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1. 29. 14:38

어수선한 새해를 맞으며

 

 

 

 

 

 

정유년이 밝았다.

닭의 해라지만, 첫날 새벽에도 상서로운 닭의 울음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TV를 켜기가 무섭게 보기 싫은 얼굴들이 화면 가득 밀려온다.

이른바 국정농단의 세력이 밉지만, 권력을 좇는 부나비 군상(群像)도 밉상이긴 마찬가지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도 국민들의 눈만 속이면 그만이라는 모양새들이다. 누구를 뽑아도 그놈이 그놈이라지만, 안 뽑을 수도 없으니 고민이다.

 

몇몇 부나비들의 현란한 춤에 민초들은 마음 둘 곳이 없고, 언론 매체들은 칠팔월 각다귀들처럼 날뛴다. 물 건너에서는 전대미문의 듣보잡이 등장하여 조자룡 헌 칼 쓰듯대권을 휘두를 태세이고, 휴전선 이북에서는 막 되먹은 애송이 하나가 위험한 칼춤을 추고 있으며, ‘깡패국가중국과 왜구 나라일본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 길길이 날뛰고 있다. 이 판에 우리만 좁디좁은 한반도 남쪽에서 굿판 아닌 굿판을 벌이는 중이다. 굿판의 끝이 어떨지 뻔히 보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란한 작두춤 속에 환호작약 시끄럽다.

 

젊은이들에겐 힘 쓸 만한 일자리가 없고, 일찌감치 일자리를 잃은 젊은 노인들은 한숨 속에 시간만 죽인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은 일신 편한 것만 도모하고, 돈 있는 자들은 긁어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젖도 안 떨어진 피붙이에게 금 수저 물려주기 바쁘고, 부와 권력 허세 속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사람을 키우지 못한 죄, 제대로 사람을 키우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죄, 좋은 싹들을 모조리 경쟁으로만 내 몰아 온 죄, 잘 하는 자와 훌륭한 자를 존경하지 않고 줄줄이 매장시켜 온 죄, 감당도 못할 자리에서 시위소찬(尸位素餐)만 즐겨온 죄, 코드 맞는 자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권력과 이익을 독점해 온 죄, 오늘만 살고 내일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탐욕죄...

 

돌아가는 형세가 어찌 올해라고 나아질 수 있을까.

누군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지만,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면, 그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그 오늘이 좀 더 나은 내일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오늘로 이어진 어제의 그 아수라장을

무슨 수로 견뎌낼 것인가.

 

지금은 난국.

정유년은 어쩌면 그 난국의 시작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어리석음을 반복한 통절의 정유재란을 기억하는가.

부나비들에게 깨달음을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일일까.

유황불이 몸을 태워 역한 냄새를 뿜어내면 모두가 괴롭다.

나라의 내일을 위해, 후손을 위해,

제 몸들을 스스로 파묻어, 모두를 살려야 할 때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1. 25. 15:54

정치와 예술의 금도(襟度)

-표창원 의원께-

 

 


                          에두아르 마네-올랭피아- 1863년

 

 

 

의정활동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신지요?

 

국회의원이 되시기 전, 경찰대 교수이자 프로파일러로서 늘 주요 사건이 터질 때마다 큰 방송들의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시어 조언을 하시던 의원님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저는 그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저렇게 탁월한 전문가들 10명만 있다면 우리나라가 많이 좋아질 수도 있을 텐데!’ 라는 비원(悲願)아닌 비원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조만간 좀 더 큰일을 하는 직책으로 발탁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짐작하던 차, 아니나 다를까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발 빠르게 나서서 의원님을 영입했지요. 제 취향이 아닌 정당으로 영입되어 가시는 모습을 보며 일말의 서운함은 있었지만, ‘우리나라 정당 특히 야당의 격이 약간은 높아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수족이 모두 잘린 지금은 참 묘한 시점입니다. 판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집권당으로서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라 할 만큼 절망과 수치 속에 숨죽이고 있는 반면, ‘다음 대통령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확실한 승리의 아지랑이에 휩싸여 있는 쪽이 더불어민주당이지요. 여당이나 대통령의 입장에서야 입이 천 개라 한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기라성 같은 율사들을 쓰러져 있는 대통령 앞에 대항마로 포진시켜 놓았지만, 무슨 수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아내어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를 아시지요? 천하장사인 초나라의 항우(項羽)와 필부출신의 한나라 유방(劉邦)이 쟁패하던 상황이었지요. 항우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날. 날랜 장수 범증(范增)마저 떠나고 동쪽으로 밀려가던 중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초나라 노래. 한신이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지요. 그 상황에 절망한 항우는 결국 오강(烏江)으로 뛰어들어 자결하고 말았다는 옛 이야기 말입니다. 국민들의 분노를 등에 업은 야당의 공격에 지리멸렬해 있는 여당이 바로 운명의 날을 향해 가는 항우 군의 모습이라 할까요?

 

상승과 하강이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상황을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상승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하강의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하고, 그 반대로 하강하다가 상승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다반사(茶飯事)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극적인 사변(事變)이나 외적인 충격이 있지 않고서야 바야흐로 방향을 잡은 국면이나 추세가 시간을 앞당겨 바뀌긴 어렵지요. 음양(陰陽)이 교차하는 것은 세상사의 이법이고,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영웅호걸이라 해도 그런 음양의 추세를 갑자기 뒤집기는 불가능한 게 우주의 이법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야당의 잠룡군(潛龍群)에서 차기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겁니다. 말하자면, 야당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지금 희색(喜色)을 억누르며 표정관리하기 어렵고, 혹시나 이 흐름이 바뀔세라 시간의 더딤을 한탄하고 있을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때를 기다려온 야당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지요? 이런 꽃놀이 판에서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는 것은 요즘 똘똘한 초등생들도 아는 행동수칙 아닌가요? 이제 열매를 손에 쥐었다고 방심한 것일까요? 열매를 딴 뒤에 벌어질 논공행상을 대비한 것일까요?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런 공이라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조급한 영웅심이 발휘된 것일까요?

 

국회 건물 안에서 펼친 대통령 나체화 전시회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접하며 참으로 기가 막히고 부끄러워 이틀 연속 혀만 차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평생 문학을 공부하며 예술 쪽도 곁눈질을 해왔습니다만, 그걸 만들어놓고 예술의 자유, 창작의 자유운운하시는 모습을 보며, ‘소가 웃다가 코뚜레 부러지는 일이 바로 여기서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예술이 대중의 미학을 선도한다고는 하나, 저같이 우매한 민중에게 그것도 예술임을 강변하려 한다면, 솔직히 번지수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걸 국회로 끌고 와서 난장을 벌인 장본인이 좋아하던 표 의원님이었다니!

 

우리 현대사의 고비를 목격하고 느끼며 나이를 먹어 온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원으로서,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심한 내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치 풍자와 예술을 가장한 폭력행위까지 국회의사당에서 스스럼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제까지 제가 공부해온 미학의 상식과 바탕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풍자나 은유가 필요하거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치권력의 폭압으로 민중이 할 말을 하지 못할 때뿐입니다.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대통령을 욕하는 지금, ‘풍자예술을 통해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다는 건지요?

 

사실 예술에 대한 해석이나 미학에 대한 논의도 보편적 상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현 대통령의 얼굴과 150여년 전 마네의 작품을 합성하여 만든 작품 아닌 작품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그 자체가 풍자예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단순한 분풀이 이상의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의원님의 판단착오로 가능했던 그런 행사가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손해이고 누구에게 이득인지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이 매우 저급하고, 행동거지 또한 너무 경망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점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정치인이기에 앞서 멋진 지식인이자 유능한 전문가로 알아 왔던 의원님이 그 동네에 들어간 이후 그렇게 표변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의원님을 거울로 삼아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우리 스스로 다짐할 수만 있다면, 이번의 사건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중언부언(重言復言)한 제 말씀이 부디 의원님께 불쾌감을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1. 19. 16:24

 

  나이타령

-정치인들에게-

 

 

 

 


세종대왕

 

 

 

세종 18(1436) 326일의 일이다. 당시 판중추원사를 지내던 허조(許稠)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出納)이나 병기(兵器)군정(軍政)숙위(宿衛) 등 임금 주변에서 군무나 경비를 담당하던 핵심 부서였고, 판중추원사는 정2품의 고위직이었다. 조선조 18개 품계 가운데 정1, 1품 다음의 세 번째로 높은, 오늘날로 치면 장차관이나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직급이었으니, 권세 또한 막강했을 것이다.(그는 좌보궐로 조선조의 벼슬을 시작하여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이르기까지 문무의 요직들을 두루 역임했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그는 조선조에 들어와 국방은 물론 조선조 예악정치(禮樂政治)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태종 때는 명나라 사행 길에 서장관으로도 참여하여 국제적인 안목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핵심 요직에서 조선왕조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 중세적 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었다. 조선조 건국과 함께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해 오다가, 연부역강(年富力强)마흔아홉에 세종의 치세를 맞이한 그의 기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세종 조에 들어와 20년 가까이 활약한 뒤 67세에 이르자 왕에게 치사(致仕)를 요청한 것이다. 그 시대로 보면 고령이었고, 세종은 39세의 팔팔한 청춘이었다. 그가 요청한 사직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종척(宗戚)도 아니고, 훈벌(勳閥)도 아니며, 공의(公議) 또한 호의적이지 않다.

2. 평소의 질병으로 근력은 쇠약하고 피곤하여 걷기가 힘들 뿐 아니라, 정신이 없어져서 앞뒤를 기억하지 못한다.

 

육체적정신적 노화현상을 밝힌 2는 지극히 평범하여 누구나 수긍할 만 하다. 그러나 임금의 친척도 아니고 공신의 후예도 아니라는 점과 함께 공의가 호의적이지 않다1의 이유는 요즘에 비추어 보아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임금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가 밝힌 사의를 반려한다.

 

1. 나이는 높으나, 눈과 귀는 밝고 자세하며 근력은 아직 편안하고 튼튼하다.

2. 만년(晩年)을 온전하게 하여 공명(功名)을 보전하고자 하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3. 그러나 좋은 계책을 내고 큰일을 결정할 때 임금인 내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4. 몸을 보전하고자 하는 것과 나라의 임무를 맡는 것 중 무엇이 더 중한가?

5. 그래서 사직을 윤허할 수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인 70에 사망한 것을 보면, 실제로 그는 그 때쯤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겪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허조가 사직의 결정적 이유로 제시한 1은 무엇이었을까. 원문(“猶竊殊寵, 私自未安, 公議何如?”)‘(임금의)특별한 사랑을 독차지함이 스스로 편안치 않은데, 사람들의 뒷말은 어떻겠습니까?’로 풀어도 좋으리라. 말하자면 나이를 먹어서까지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는 그에 대한 뒷담화들이 많았던 모양이고, 사실 그로서는 육체적인 질병보다 그것들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67세에 사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학문이나 경륜의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39세의 왕이 보기에 67세의 원훈대신(元勳大臣)은 나라의 믿을만한 기둥이었으리라. 패기 하나 믿고 경륜의 노년을 업신여기는 젊은 친구들이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극구 떠나가려는 허조를 붙들어 앉힌 것이나 아닐까.

 

***

 

이와 관련, 요즘 벌어지는 선출직 65세 정년론(停年論)’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개운치 않다. 그 문제를 제기한 표창원 의원은 현재 51세이니, 14~5년 후인 그의 65세에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으나, ‘친문으로 분류되고 있는 그가 반기문 전 유엔총장을 견제하고 문재인 전 의원을 돕기 위해 이런 논의를 제기했다고 보는 항간의 풍문도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도우려는 문재인 전 의원이 올해로 64세임을 감안하면, 그런 항간의 의혹이 정확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가 언급한 65세가 은퇴하기에 적절한 나이임에는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표 의원의 전직이 대학교수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대학교원들의 정년을 쉽게 떠올렸을 것이다. 나 역시 65세가 되면 미련 없이 강호로 들어가 조월경운(釣月耕雲)’하며 남은 삶을 엮어가려 한다.

 

그런데,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른바 ‘100세 시대. 가끔 동네 사우나에서 70대 어른을 한 분 만난다. 구릿빛 몸매와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며 나보고 근육운동을 권하시는 분이다. 근육질의 70대와 선병질(腺病質)20대가 공존하며 경쟁하는 것이 오늘날의 특징이다. ‘가스통으로 불리는 부정적 노인들도 있지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어른들도 적지 않다. 단순히 육체 나이를 들이대며 은퇴를 강요하는 것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이다. 바람직한 희망과 목표를 갖고 노력하는 경우에만젊음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다. 아무런 공부나 대책도 없이 성질 부룩거리고, 막말이나 해대는 것을 젊음의 특권이라 여긴다면, 그건 나라와 민족에게 재앙이다. 그런 젊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최근 저잣거리에 나와서 표를 구걸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라. 괜찮아 보이는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아 당선의 가능성이 없고, 제법 지지율이 높은 인물들은 대부분 경륜이나 식견이 매우 모자라 믿음을 주지 않으며, 심지어 인간성이 개차반으로 보이는경우까지 있어 걱정이다. 거기에다 나이의 잣대를 들이대어 그나마 잘라 버린다면, 도대체 경륜 있는 지도자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공자

 

 

공자는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이라 했다. "후생이 두렵나니 어떻게 미래의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만 못할 줄로 알겠는가? 사오십 세가 되어도 명성이 없다면 이 역시 두려워할 게 못 된다."고 번역되는 이 말에는 크게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다. ‘나이 먹었다고 젊은이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그 하나요, ‘40, 50이 되어 제대로 된 명성을 얻지 못하면 그 젊음도 별 볼 일 없다는 것이 그 둘일 것이다.

 

첫 번째는 당연함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두 번째는 요즈음의 현상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갖는다. 40이나 50이 되어, 아니 그 이전에라도 뜨는인사들은 부지기수다. 그런데, ‘무엇으로뜨느냐가 문제다. 막말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여(그들을 속여서) 뜨는 것도 공자의 이른바 명성[]’이라 할 수 있는가. 교묘한 심리적 사술(邪術), 이른바 포퓰리즘으로 유권자들을 속여서 뜨는 것도 그 명성의 범주에 속하는가. 자기편에 선 사람들을 조종하여 상대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갖도록 함으로써 뜨는 것도 그 명성의 범주에 속하는가. 공자가 말씀하는 문()이란 군자로서의 소문이고, 군자란 도와 덕에 바탕한 훌륭한 인간상이라면, 무엇으로 떠야 하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살 넘은 자들은 물러서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제 ‘50대가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발언들은  대부분 육체나 물질의 허상에 잡혀 있는 자들의 텅빈 구호일 뿐이다. 세상을 경영할만한 덕과 방책을 갖추고 있기만 하다면, 지금 그들이 몰아내고자 하는 연령대의 인물들을 지도자로 뽑는 데 무슨 문제가 있으며, 20대나 30대인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설마 표 의원이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그런 말 자체가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 것은 오늘날 지식사회의 의식이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른바 정치인들이여, 쓸데없는 말로 가뜩이나 경조부박(輕佻浮薄)한 이 사회를 흔들지 마라! 한 마디 말이라도 아끼고 좋은 일들을 더 많이 실천함으로써, 방황하는 젊음들을 제대로 이끄는 삶의 푯대가 되어 달라! ‘나이 타령같은 요설(妖說) 말고, 제대로 된 담론(談論)으로 우리 사회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달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1. 3. 01:33

새해를 맞으며

 

 

 

2016년 12월 31일 득량만에서의 해넘이

 

 

2017년 1월 1일 득량만에서의 해맞이

 

 

                                                  2017년 1월 1일 득량만에서 만난, 추억의 아침 연기

 

 

1990년대 초쯤일까요. 복거일의 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를 읽고 나서, 한동안 타임머신을 저 자신의 화두(話頭)로 틀어쥐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불혹에 접어들면서 시간의 위력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 제 내면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었지요. 그로부터 참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욕망이 망상(妄想)의 근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호걸들도 그저 ‘(역사를) 앞사람으로부터 받아서 뒷사람에게 이어주는고리에 불과하다는 진리. 바로 그 진리란 특별한 공부 아닌 나이가 알려주는 자연법칙이라는 점을 절감하게 된 것이지요.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작비금시(昨非今是)'! 요즘 연말연시만 되면 누구나 한 번씩 인용하곤 하는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명구이지요. 고백하건대, 길을 잃고 헤맸으나 아직 멀어지진 않았으니/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는 도연명의 깨달음에 힘입어, 나와 조상의 지난날들을 찾아 헤매다가 많은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의 어떤 점들이 잘못 되었고, 지금은 어떤 점이 옳거나 나아졌는지, 참으로 궁금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해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저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감수(甘受)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손쉬운 타성에 푹 젖어들고 말았습니다.

 

작년에는 참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소천을 통해 죽음의 의미와 가족관계의 허망함을 깨달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을 통해 치열한 삶과 성취보다 건강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는 예수의 말씀(마태복음 1626)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입니다.

 

가치와 중요성은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들일까요? 아니면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들일까요? 가치가 있어서 중요한 것일까요? 아니면 중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참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모두에게 가치 있는, 아니 모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서로 물고 뜯으며 적개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지내온 지난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움이 더욱더 크게 증폭될 올해를 걱정합니다. 이제 좀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은데, 다시 어느 편에 서서 불편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것이 뻔한 2017년이 두렵습니다.

 

반복하건대, 손에 잡히지 않는 타임머신을 타고서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그 당시 정의와 최선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호걸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왜 우리는 새해만 되면 지난 시간대의 자신을 후회스런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그들의 말을 듣고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저는 그저 크게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살아가렵니다. 좀 더 따스한 눈빛으로 주변 사람들의 아픔을 다독일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지도 못할 일들을 하겠노라 떠벌이게 될 정치인들을 미움 아닌 연민으로 바라볼 여유와 폭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 여러분들에게 신의 가호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새해 벽두에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