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7. 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7. 22. 01:41

불통의 시대를 살며

 

 

 

개인정보 보호의식이 웬만큼 정착되었을 법도 하지만, 가끔 나 스스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두어 학기 전의 일. 자꾸만 나로부터 탈출하려는 영어를 붙잡아 앉힐 겸 매주 한 번씩 몇몇 교수들과 함께 만나는 외국인 교수가 있었다. 한 교수와 여러 학기를 지속적으로 만날 때도, 한 학기만으로 끝날 때도 있었으나, 매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식사 한 끼 대접해온 것이 내 원칙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나, 사실은 너무 무미건조한 그들에게 끈끈한 인간관계의 전통을 보여주고픈 욕망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마침 학기 내내 부득이한 일들로 시간을 빼먹곤 하다가 그 교수와의 마지막 시간마저 놓쳐버렸다. 더구나 학기 중 그의 개인 연락처를 알아놓지도 못한 나는 하는 수 없이 외국인 교수들을 관리하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국문과 조 아무개 교수인데, 아무개 교수와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안 계시는데요.”

당연히 그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진 않겠지요?”

.”

그럼 내 전화번호를 남길 테니, 전화 좀 해 달라고 알려드리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용건이 뭐죠?”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조교가 용건을 묻는 순간 화가 터졌다. 교수가 자신의 신분과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같은 대학 교수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무슨 용건으로 그와 통화하려는지 묻는 그 조교 녀석이 멍청하고 야속해보였기 때문이다.

 

, 학생! 용건은 왜 묻는 거야? 교수가 같은 대학 교수에게 연락처까지 남기고 전화를 부탁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까지 자네에게 알려줘야 하는 거야? 외국인 교수에게 왜 그리도 저자세인 거야?”

 

그는 깜짝 놀라는 듯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화가 갈아 앉지 않았다. ‘짜식들, 한국에 왔으면 한국의 방식을 따라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정보 관리에 철저한 서양 사람들과 그들에게 과공(過恭)하는 듯한 조교를 괜히 비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

 

학진(한국학술진흥재단의 약칭. 현재는 한국연구재단)’ 사이트에 교수들의 연락처가 상세히 올라 있던 때가 있었다. 연구소 일, 학회 일, 논문 심사, 강사 섭외, 자료 문의 등등. 일면식도 없는 타 대학 교수들에게 연락할 일들이 수시로 생겼고, 그 때마다 학진 사이트가 내 수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하던 시절이었다. 학진 사이트가 있어 참 편리했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학진 사이트에서 개인 연락처가 싸악 사라졌다. 어둔 산길을 가던 중 등불이 꺼진 것처럼 답답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접촉할 교수의 재직 대학 해당학과 사무실로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앳된 목소리의 대학원생 조교는 알려드릴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럴 때마다 내 연락처를 남기지만, 원하는 시간 안에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 답답한 시절이 도래한 것이었다. 은행, 보험사, 통신사, 신문사, 캐피탈, 장애인 협회, 기획부동산 회사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불청객들이 전화를 해대고, 온갖 스팸메일들을 보내오는데, ‘놈들은 과연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아냈단 말인가.

몇 년 전 몇몇 일본의 교수들을 급히 접촉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도통 연락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대학 홈피의 어느 구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해당 대학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그 대학 직원 가운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간신히 찾아 내 뜻을 전했으나, ‘그 교수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드릴 수 없다/본 대학으로 공문을 보내 이메일 주소 알려주기를 신청하면, 그 교수에게 연락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이메일 주소를 알려줄 수 있다/개인 전화번호도 마찬가지다는 것이 알아듣기 힘든 그의 영어 가운데 겨우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참 대단한 놈들이다!’라고 혀를 차면서도 끝내 어쩔 수 없었다.

 

***

 

이런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나는 보란 듯이 내 정보를 홈피와 블로그에 대문짝처럼 게시해놓고 있는 중이다. 누구의 연락도 사절해야 할 만큼 바쁜 내가 아니며, 빼앗길 것이 두려울 만큼 돈이 많은 내가 아니며, 남들에게 위해를 당할 만큼 나쁜 짓을 하고 사는 내가 아니며, 그나마 빼꼼히 뚫린 이메일 주소를 막아놓아야 할 만큼 주변에 친구들이 득실대는 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내는 지금도 내게 연락을 주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할 뿐인데, 그나마 막아놓을 경우의 적막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심심치 않게 답지하는 스팸메일들이야 약간의 손가락 운동만으로도 쓰레기통에 던져넣을 수 있으니, 운동량이 모자라는 요즘 세상에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정신만 온전히 차리고 산다면, 이메일을 타고 숨어드는 좀도둑들 쯤이야 간단히 제압하고도 남을 터. 그러니 제발 열어놓으라고 만든문들을 꼭꼭 닫아 건 채 소통(疏通)’의 구두선(口頭禪)만 외쳐대는 위선자들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7. 5. 08:50


앙증스런 대회 입간판

 

 

 


CSUN 입구에서

 

 


학술대회장에 들어서며

 

 

 

LA, 그 바벨탑의 체험

-2016 ASPAC 참가기-

 

 

 

 

 

지난 달 10-12일(미국 날짜). 2016 ASPAC(Asian Studies on the Pacific Coast) 학술대회 참석 차 LA 인근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노스리지 캠퍼스(CSUN: 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에 다녀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캠퍼스에 갖가지 사막 식물들이 삶의 원기를 방출하는 곳. 주렁주렁 노랑 오렌지들이 캠퍼스 도처에 향을 내뿜고, 하늘에 닿을 듯한 야자수들이 가로수로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 이면의 문제들이야 그곳이라고 없을까만, 외관만으로는 말 그대로 에콜라지컬 유토피아(ecological utopia)’였다. 캠퍼스 전체가 식물원에 가까운 컨셉이었지만, 학술행사가 열린 이스트 컨퍼런스 센터(East Conference Center)’ 앞의 버태니컬 가든(botanical garden)’은 특별한 공간이었다. 이번 행사는 그 숲 한 가운데서 미국인들과 아시아인들이 함께 어울린 학술의 난장이었다.

 

캠퍼스 하우징의 한 복판에서 인도의 젊은 인류학자 프라빈 박사(Dr. Pravin S. Khandagale/School of Hyderabad, India)를 룸메이트로 만났고, 또 다른 인도의 법학자 쿠마르 교수(Dr. Saroj Kumar Dhal/Symbiosis International University, India)와 중국학자 왕 교수(Dr. Wang Wuyun/Gifu City Women’s College, Japan), 호주 학자 앤드류 선생(Andrew De Lisle/PhD Candidate/School of Culture, History and Language, College of Asia and the Pacific) 등 무수한 외국학자들을 같은 공간에서 패널리스트이자 청중으로 만났다. 유럽계 미국인들, 아시아계 미국인들, 아시아인들이 두루 섞여 이루어진, 그들 말로 한시적인 용광로(a temporary melting pot)’였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태국어, 인도어 등으로 각자의 모국어는 달랐으나, 발표장이나 식당에서는 순식간에 영어로 바뀌어 나오는 특이한 공간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룸메이트 프라빈과 하우스메이트 쿠마르의 인도 영어(Indian English)’는 얼마나 특이한가. 그들의 영어에 적응되기까지 몇 시간은 그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내가 듣기에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인도 말과 영어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인디언 잉글리쉬(Indian English)를 대표적인 혼합영어(pidgin English)로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콩글리쉬(Korean English)’보다야 소통의 면에서 훨씬 나은 건 사실이지만.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백인 중에서 특히 잉글랜드 출신의 영국계, 기독교 중 신교도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나 그에 근접하는 백인들이 주류사회의 정점을 형성하는 미국사회에서 그 주류사회의 오만(pride)과 유색 이민자들의 영어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 with English)언어(영어) 제국주의(linguistic imperialism)국가 미국의 두드러진 표지(標識)’이자 이민자들에겐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 점, 이창래 작품(Native Speaker)의 주제를 이루는 주인공의 깨달음도 결국은 이런 장벽을 피하고자 한 지점에서 얻게 되었다는 점 등이 내 발표의 핵심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뉴욕이나 LA를 로마에 이은 바벨탑으로 규정한 것도 그 도시들이 신의 뜻을 받아 지은이상적 공간은 아니라는 점, 그래서 그런 도시들의 마이너리티들은 결국 썩은 내 나는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한 채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아프게 확인한 것이 이창래의 본뜻이었으리라. 이민자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주류 출신 아내 릴리아가 이민자들의 모국어로 하나하나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작품의 결말도 알고 보면 긴 좌절과 방황을 거친주인공의 현실적 타협의 소산에 불과한 것 아닌가. 어차피 영어가 모국어 아닌이민자들이 주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 옛날 바빌론처럼 이 새로운 바벨탑들이 무너질 가능성 또한 없을 것이다. 소설이 현실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임을 인정하면서도 결말은 얼마간 이상이나 추상일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의 벽을 깨기가 현실적으로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다양한 인종들의 용광로(melting pot)가 지금의 미국인데, 당신의 그런 부정적인 결론은 비현실적이거나 부정확하다고 보지 않는가라는 백인 학자의 질문에, ‘사실 내가 비관주의자일지는 모르지만, 멜팅팟은 비현실적 상징(idealistic symbol)이거나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은유(metaphor for glossing over the reality)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표 마지막 날. 만찬장에서 만난 인도계 미국 노학자 람 교수(Dr. Ram M. Roy/Emeritus Professor of International Relations & Political Science, College of Social and Behavioral Sciences, Cal. State Univeristy, Northridge)의 초대로 몇몇 학자들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나는 내 말이 맞았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저택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산 중턱에 우뚝 서있는 그의 붉은 색 2층 벽돌집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50년이 훨씬 넘는 경력을 쌓은 그였다. 이른 나이에 풀브라이트(Fulbright)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무용담(?)과 함께,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학교의 중심 건물에 독자 연구실을 부여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는 점을 푼수 없이되뇌는 그를 보며, 이민생활 50년에 LA 인근 산록(山麓)의 붉은 벽돌집 한 채로 현시(顯示)되어 있는 아메리칸 드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의 콤플렉스를 헤아리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간파하고 나니 얼마간 처연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국 지식사회에서 그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그의 영어에서 느껴지는 인도인의 혀 놀림(Indian tongue)은 어쩔 수 없음을, 주방의 미니바에 즐비하게 세워놓은 와인 병들을 따서 권하는 그의 호기 너머에 잠재된 외로움의 흔적은 지울 수 없음을 나는 그만 알아채게 된 것이다. 발코니 건너 편 겹겹의 산맥 넘어 태평양으로 스러져가는 석양이 80대 노인의 깊은 주름에 반사되어 수심과 외로움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챈 건 아마도 일행 중 나뿐이었으리라!

 

그랬다. 미국에 자리 잡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나뉘는 것 같았다. 아메리칸 드림이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전자(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젊어서 뭣 같이 벌어놓은재산에 기대어 힘 빠진 노년기를 그나마 불편 없이 보내는 게 미국에 자리 잡은 그들의 꿈이라면 할 말은 없다. 우리 몇 사람을 강권하여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간 람 교수. 어쩌면 그는 붉은 벽돌집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 여부를 우리로부터 직접 확인받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당신은 아메리칸 드림의 가장 성공적인 성취 사례임을 그의 면전에서 거듭거듭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그곳 사람들은 -(CSUN: 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으로 부르며, 이 대학을 사랑했다. 노스리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찍이 자리 잡은 곳이고, 그 분의 따님인 안수산 여사가 일생을 사시다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가. 이곳 주민들 가운데는 한국계가 가장 많았다. 우리 가족이 안수산 여사를 방문, 그 분의 팔순 생신연에 참여한 1999년 1월은 우리가 인근의 UCLA에 머문지 1년이 넘어가던 때였다. 벌써 18년 전의 일. 아름답게 채색해놓았던 당시의 추억은 세월의 모진 풍우에 빛이 바랬고, 곱게 웃으시던 안수산 여사의 표정도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그곳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슬픈 한계를 재확인하게 된 마음이 자못 착잡할 따름이었다.

 

 

 


이창래의 작품들

 

 


이창래에 대한 언론의 관심들

 

 


학술대회가 열린 East Conference Center

 

 


첫날 발표 후 프라빈 박사(인도), 필자, 쿠마르 박사(인도), 치앤타이 교수(태국)

 

 


점심 뷔페

 


 


점심식사 광경

 

 


점심시간에 담소하는 각국 학자들

 

 


이틀째 발표가 끝난 뒤 행사장 밖에서

 

 


야자수 무성한 CSUN 캠퍼스의 모습

 

 


캠퍼스에서 맛난 걸 요구하는 청설모(?)

 

 


먹을 것을 주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앞에서 재주를 보여주는 부부

 

 


인간과 동식물의 공존

 

 


선인장

 

 


이름모를 풀꽃

 

 


대나무 숲길

 

 


오렌지향은 바람에 날리고...

 

 


초대받아 간 람 박사의 자택

 

 


람 박사 자택 발코니에서 석양을 담기에 바쁜 손님들

 

 


람 박사 자택에서 바라본 태평양 연안의 연봉들

 

 


와인 시중을 들고 있는 람 박사

 

 


람 박사 자택에서 내다 본 석양

 

 


밤 하늘, 그리고 달...

 

 


람 박사 자택의 야경

 

 


람 박사의 아끼는 아들 소개

 

 


인도의 두뇌 쿠마르 교수와 프라빈 박사

 

 


벨기에 화가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Lucas van Valckenborch)가 1568년에 그린 바벨탑(Tower of Bable)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