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5.29 아, 제주!
  2. 2016.05.07 무엇이 더 급한가?
  3. 2016.05.07 ‘딱지를 까고 잘도 먹는구나!’
글 - 칼럼/단상2016. 5. 29. 12:06


제주박물관에서

 

 

 

 

아, 제주!

 

 

 

모처럼의 제주행이었다. 몇 년 째 중국인들이 제주를 접수한다고 난리를 쳐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인 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답사에는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끝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현장강의 좀 해달라는 학생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강심장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주는 얼핏 보기에도 포화상태였다. 하늘에는 육지를 오고 가는 양 방향으로 늘 비행기가 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5분 만에 한 대씩 뜨고 내린다니, 혼잡의 극치랄까. 전엔 공항 문을 나서기 무섭게 팜나무와 야자수가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으나, 이젠 그들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암담한 체념의 한숨만 내뿜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말라버린 이파리들을 처리할 의욕마저 상실한 듯 공항청사 주변의 녹색은 많이 낡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자동차들, 육중한 관광버스들이 넘쳐났고, 그들이 방출하는 매연과 분주함의 독기가 제주의 인상을 시들게 했다. , 그동안 많이도 망가졌구나!

 

국립박물관 전시 유물들. 참으로 곱고 아름다워서 가슴이 따스해졌다. 갤러리 1~6, 특별전시실 등, 차분히 느끼기엔 숨이 벅찰 만큼 넓은 공간들이었다. 특별 전시되고 있는 고산리 신석기 유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석기와 토기, 각종 생활사 자료들, 유배 지식인들의 유물 등등 어느 지역의 박물관보다 옹골찬 컬렉션이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으로 이어져 나온 삶의 모습이야 여기라고 다를 순 없을 터. 박물관이 내 상상력의 샘터임을 여기서도 재확인한다. 유약 아닌 원시인들이 뿜어낸 입김과 손때가 토기들의 안팎에 칠해져 있지 않은가. CD에 새겨진 것처럼 토기의 물결무늬엔 그들의 노랫소리 또한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손때를 보며 그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소중한 체험이 어디에 있을까. 안타깝지만, 쌍쌍이 어울려 재잘거리는 젊음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어찌 수만 년 전 유물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으랴.

 

삼성혈의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제주의 키워드를 말해줬다. 신화, 무속, 해녀, 43과 향토문학 등을 제주라는 고운 보자기로 감싸 젊음들의 가슴에 넣어주고 싶었다. 우주창세의 과정을 보여준 설문대할망 신화, 독립된 나라를 세워 영속시키고 싶었던 삼성(三姓)’의 탐라건국신화, 무조(巫祖)의 내력을 읊어나간 무속 본풀이들, 부자간 쟁투의 현실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보여준 김녕괴내깃당본풀이. 육지에서 들어보지 못한 신화들의 성지가 제주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결론은 늘 현실이었다. 주도권 다툼, 더 많이 갖기 경쟁, 사랑과 미움 등등... 그래서 나는 신화란 상상된 현실이며 현실이란 가시적으로 구현된 신화임을 강조했다. 부모로부터 내쳐졌던 괴내깃또가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를 치러 왔을 때, 그는 어떤 말을 건넸을까. 아들 신검에게 권력을 빼앗긴 견훤, 아들 방원에게 패배한 이성계, 평생 일군 부를 아들에게 빼앗긴 재벌 등등. 현실은 신화의 연속일 뿐이다. ‘허황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꿈이자 정신의 모습이고 현재 인간의 모습까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언술이 신화라는 캠벨(Joseph Campbell)의 말도 있지 않은가.

 

애월의 밤. 마늘밭 가의 숙소 공터에서 우리의 젊은 풍물패들은 제주의 밤을 마구 두들기고 깨트렸다. 마늘밭 한 평에 250만원이나 한다는, 지상의 현실과는 상관없는 꿈의 난장을 벌인 것이다.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을 애월의 제주인들은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 무리들의 춤과 소리에 놀라 깨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하늘 끝 바다 끝까지 닿을 진동의 힘은 잠든 세상을 무력하게 했다. 상큼 짭짜름한 갯물 내음은 창틈으로 스며들어와 뒤척이는 잠자리를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고, 퉁탕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젊음의 열기까지 합세해 대책 없는 불면의 밤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돌문화공원에서 만난 설문대할망의 꿈.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5백이나 되는 아들들을 낳아 놓았던 것일까. 어찌하여 무지막지한 돌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섬을 만들려고 했을까. ‘180만 년 전 신생대의 화산활동이 이 섬을 이토록 오묘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야말로 너무 단순하여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태초의 제주에서 설설 뛰던 불꽃들과, 세월이 흐른 뒤 식은 불꽃 사이를 조심조심 뛰어 놀았을 온갖 짐승들과, 불꽃이 만든 흙과 짐승들을 재료로 삶을 이어 나온 인간들의 지혜를 함께 버무려 생각하기로 하자. ‘형이하(形而下)’의 물질에만 정신이 팔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 위해 설문대할망은 이 땅에 강림하신 것 아닌가. 세상을 낳은, 위대한 지모신(地母神). 오랜 세월 제주를 감싸온 그녀의 오지랖 안을 뒤지니 텅 빈 동공뿐이었다. 뱀이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을 보며 무엇을 상상하는가. 빠져나간 몸들의 건강한 환락을 상상하는가. 아니다. 무수한 삶의 재생과 반복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허물이다. 그러니 피가 돌지 않는다 하여, 기름기가 빠져 있다하여 그 허물들을 짓밟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 땅에 남겨진 허물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없는 법. 신화를 사랑하자. 그 옛날 그 분들의 현실과 꿈을 오롯이 갈무리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우리의 끝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지 않는가. 삶이 어찌 오늘의 우리만으로끝나는 일이랴. 오로지 지금을 살기 위해, 지금의 나만을 위해세상은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신화는 존재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되어야 우리는 아득한 후손들을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현재의 내 아픔을 참아낼 수 있게 될까.

 

‘43 평화기념관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분노와 부끄러움이 뒤엉겨 분출의 시기만 기다리는 잠재적 활화산 혹은 휴화산의 분화구였다. 몇몇 인간들의 욕망과 착오가 빚어낸 오욕의 역사였다. 처음은 이랬을 것이다. ‘그래, 이 복잡한 시국에 그들 몇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귀찮음을 감내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듯한 이유와 명분을 내걸고 눈을 부릅뜨면 그대로 진정될 것인데. 이 외딴 섬에서 힘없는 사람 몇몇을 죽여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그렇게 끝이 나리라 착각했을 것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늘 그랬다. 하늘같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뻔뻔함과 물리력만으로 모면할 수 있으리라 믿어온, 우리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찌 그렇게 마무리될 수 있는 일인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사도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헤겔 식 역사의 이성을 우리가 믿는다면, 최소한 잘못된 계산을 그대로 넘길 순 없는 법. 3~4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지금껏 쉬쉬하는 권력의 속성을 민초들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뒤엉긴 시신들의 사진 앞에 몇몇 젊음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깨달음을 문장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비리와 부조리의 현장이 어찌 이곳뿐이랴.

 

해녀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물 깊은 바닥에서 건져 올린 소라며 전복이 꿈틀거리는 좌판. 그 좌판 언저리엔 가쁜 숨을 모아 만들어낸 숨비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값을 깎아보려는 사람들에게 핀잔을 건네는 할머니 해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 마음은 해녀박물관에 역사로 남아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설문대할망에서 시작된 제주 여성들의 기운이 해녀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나 아닐까. 호흡이 허락되는 그 짧은 순간에 단단히 뿌리박힌 소라와 전복을 따내야 하는 건 생존경쟁 원리의 극적인 현시아닌가. 그 힘이 지금 남자들을 능가하는 한국 여성들의 힘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제주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많이 망가져 있는 것도 사실인 듯 했다.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온전치 못한 법. ‘이제 제주를 떠나고 싶다, 한 제주친구의 음울한 말을 공항에서 전화로 듣게 되었다. 물론 제주의, 제주인의 프라이드를 이제 거의 상실한 상태라는 그의 말이 육지인인 내게 아직은 생소했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바람결 또한 싱그러웠기 때문이다. 해녀들이 물질해온 갯것들도 상큼하고 달았다. 새 공항이 생기고,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만 줄인다면, 아니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의 부피만 줄인다면, 설문대할망과 함께 제주는 영원할 것이다.

 

 

 


고려조의 청자, 조선조의 백자, 분청사기 등


 


근대 제주의 '곰박(석자), 솔박(되), 도고리(함지박), 국자' 등 

 

 


물질의 도구인 태왁망사리

 

 


해녀물질의 도구들

 

 


용담동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이음독널'

 

 


각종 청자들


 


원삼국시대의 각종 토기들

 

 


삼성혈

 

 


애월의 멋진 숙소(힐링팰리스)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

 

 


돌문화공원에서 만난 '나무가 빠져나간 화산석'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어서 오세요 많이 반가워요 또 오세요!'랍니다.

 

 


돌문화공원 밖에서 만난 하르방님들

 

 


돌문화공원 밖에서 만난 제주의 옹기 및 기와들

 

 


민속마을에서 만난 제주의 옛집들

 

 


제주 43 평화기념관

 

 


멋진 조화(이경재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하늘과 바다)

 

 


해녀박물관에서 만난 '빛 바랜 기념사진들

 

 


해녀박물관 밖에서 포즈를 취한 아름다운 여학생들

 

 


해녀박물관을 떠나며

 

 


돌문화공원 밖에서, 선남선녀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5. 7. 15:41

 

 

 

무엇이 더 급한가?

 

 

#1 최근 지방 어느 대학에서 총장을 지낸 인사를 만났다. 중앙 부처의 과장급이 총장에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더러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아무리 총장들이 학문적 심볼로 인식되는 시절은 지났다지만, 행정 관료들이 대학의 수장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비정상 가운데도 비정상이다. 왜 그럴까. 언제부턴가 대학에 대한 국고지원이나 대학의 구조조정이란 명목 하에 거액의 국고를 다루어 온 그들이다혹시 마음먹기에 따라, 아니 펜을 놀리기에 따라 대학으로 가는 거금의 물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오만함이 작동하는 건 아닐까. '어렵게 과거급제를 탐할 것이 아니라 지방 관아의 아전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이 조선조 말기 현실비판 가사들에 나오듯, 대학교수나 총장 대신 교육부 관료 되는 것이 훨씬 폼 나는 일아닌가.

 

#2 친한 친구에게 최근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25개월 된 손녀 때문이다. 자신들의 자식을 직접 기르지 못하는 건 아들 내외 모두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평일엔 외할머니 댁에 있다가 금요일 오후가 되면 데리고 있다가 다시 일요일 오후면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생활을 반복 중인 모양이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건강 문제로 부득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다. 그는 지금 좌불안석이다.

 

#1#2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문제적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동시에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구조조정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육부가 거액의 돈을 내걸고 구조를 조정하겠다고 대학들을 몰아붙이는 중이다. 교수들은 교육자와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내걸고 '저항 아닌 저항'을 하고 있지만, 밥 그릇 지키려는기득권 세력으로 매도나 당할 뿐이다.

 

이 자리에서 교육부가 내건 갖가지 현란한 명칭들의 사업을 일일이 거론하고 싶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산업의 인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세금으로 대학의 구조를 조정하겠다는 것이 그 사업들의 공통된 요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문학 분야의 정원이 산업계의 수요에 비해 턱 없이 많으니, 그 정원을 줄여 이공계로 재배치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교육부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런 추세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대학의 정원을 감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대학이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할까 걱정해주는 교육부의 가상한배려에 감읍하며 잠자코 있으란 말일까. 조만간 대학이 정원을 못 채워 대학의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고, 그에 따라 나 같은 교수들이 월급도 못 받는 사태를 미연에 막아주려 국고를 퍼 부어서라도 구조조정을 해주겠다는 것일까교육부와 정치권의 감동적이지만 뻔한 오지랖 앞에 인문학 교수들은 대부분 머저리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태가 급박하고 상황이 궁하다 해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될 일 등을 구분 못하는 듯한 정치권과 교육부 관료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산업구조의 변화나 인력수요는 답답한 공무원들보다 시장이나 국민들이 훨씬 먼저 느낀다. 국가를 경영하려면 누구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산업혁명의 방향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알파고의 위력을 목격하고서도, 조립공정의 대부분을 로봇이 담당하는 자동차 공장을 보면서도,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한강변에서 삼계탕과 맥주를 즐기는 유커들을 보면서도, '탈 제조업시대의 혁명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옛날 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이 딱하기만 하다. 인문학과 출신자들이 취업을 못하면 국민 스스로 진학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꿀 것 아닌가. 그래서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는 학과나 학문분야는 자연스레 위축되다가 결국 퇴출되거나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 아닌가. 국민들이나 학생들이 그런 방향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방향을 선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앞서 가는 국민들보다 못한 판단력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는구조를 '한꺼번에 돈 들여서 억지로바꾸겠다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굳이 귀한 국고를 투입하거나 대학인들의 자존심을 손상시켜 가면서까지 구조조정을 하지 않아도, 대학은 저절로 조정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그게 바로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시장 논리아닌가. 물론 시장 논리가 만능이 아님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방법을 잘 택할 경우 적지 않은 시장 논리의 문제를 덜어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정확한 미래예측과 투자의 우선 순위에 대한 통찰이다.

 

자신들은 제대로 한다고 강변하지만, 지식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다. 사회의 변화와 연동되는, 일종의 생명을 가진 실체가 오늘날의 학문체계다. 그 학문체계를 바꾸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정책부서의 일부 관료들이 앉은 자리에서 쉽게 디자인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학문 생태계를 바꾸는 일이야말로 나라 전체의 재편에 버금가는 구조적인 대역사(大役事)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의식 있는 학자들이 우려하듯이 이번의 사업들이 지금까지 대학을 대상으로 수없이 저질러 온 시행착오들의 목록에 또 하나를 추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이런 일들을 세심한 고려 없이 강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미래란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소박하면서도 한심한 근거에서 찾는다면, 정말로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이런 사태의 다른 편에서 불거진 현안이 바로 육아 혹은 유아교육의 문제다. 어린이집, 유치원등 유아교육을 방치하다시피 내던지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현 대통령의 공약을 보라. 젊은 엄마들이 육아에 대한 고민 없이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겠으니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큰소리 친 것이 바로 엊그제다. 육아 때문에 경단녀가 생겨나지 않도록 아이 낳는 일과 기르는 일에 대한 지원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강조하며 튀긴 침방울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상태다.

 

내 친구의 손녀는 지금 25개월. 어딘가에 맡기긴 해야 하는데, 보내고 싶은 어린이집 대기 순번 250번이란다. 그는 명문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유수 은행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며느리를 아이 육아 때문에 경단녀로 만들 순 없지 않느냐면서 앓는 소리를 낸다.

 

우선적으로 국고를 쏟아부어야 할 부분은 국가 교육정책의 바탕을 유아교육에 두는 일이다. 유아교육을 교육부의 가장 우선적인 과업으로 정착시키고, 다른 어떤 분야보다 먼저 국고를 투입해야 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들에게 맡기지 말고, 유아교육만큼은 철저히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 국고를 투입하여 '유아 교육시설'을 건립하고 교사들과 관리직을 국가가 선발하여 교육을 일원화, 표준화시켜야 한다. 유아 부모들의 실정을 면밀히 조사하여 국가가 육아 및 교육의 대부분을 떠맡아야 한다. 유아교육처럼 중요한 일을 지방자치단체에만 맡겨놓아서는 안된다.  유아교육에서 대학교육까지 교육부가 맡아 일원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건 유아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상급 교육들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기 때문이다.

 

눈만 뜨면 일어나는 유아원 폭행사건들을 보면서 국가 주도의 유아교육을 외면하는 것은 아무리 현실적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결코 옳지 않은 처사다. 배출하는 인력의 규모가 산업의 수요에 맞지 않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학령인구의 감소로 대학의 정원미달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천문학적 액수의 국고를 퍼부으며 다 큰 아이들 다니는대학의 구조 조정을 먼저 해야겠는가? 아니면, 곧 다가 올 인구절벽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 낳는 일, 기르는 일에 우선 투자해야 하겠는가?

 

***

 

의무교육도 아니고, 모두가 원하지도 않는 대학의 구조 조정에 정확한 진단도 없이 쏟아 부으려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우선 유아교육으로 돌린다면, 국가의 장래에 그보다 더 도움 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돈을 육아 혹은 유아교육에 효율적으로지원한다면, 미래의 동량을 키워낼 수 있고 젊은 여성인력을 100% 활용할 수 있으니, 나라의 장래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사실 그것은 단순한 '도움'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나라를 살릴 만한 '큰 투자'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노후를 안락하게 보내려던 노년의 은퇴자들이 손자손녀 육아의 고역에 신음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럽다. 은퇴생활의 무지갯빛 꿈에서 복지 사각지대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그들. 그러나 비참한 게 어찌 그들뿐이랴. 어떤 젊은 커플들은 새벽같이 아이를 부모에게 맡긴 뒤 하루 종일 직장 일에 시달리며 불안과 초조함으로 동동거리다가 퇴근 후 아이를 찾으러 부모에게 달려가고, 어떤 부부들은 금요일 퇴근 후에서야 1주일을 떨어져 지내던 자식과 해후하게 되니, 그 참상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왜 '대학 구조조정' 같은 무사려한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착각하여 대책없이 밀어붙이려는 것일까? 애당초 그들이 아무런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표가 급했을 것이다. 각종 선거에서의 표 계산이 중요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반값 등록금공약을 내걸고 지키려 무리를 범하기 전에, 국고를 쏟아 부으며 원하지도 않는 대학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기 전에, ‘국가가 나서서 아가들을 제대로 키워주겠노라는 공약을 먼저 이행했어야 한다. 한정된 나랏돈은 아무나 제멋대로 쓸 수 있는 쌈짓돈이 아니다. 정말로 정치인들이나 교육부의 관료들이 눈앞에 펼쳐진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목전의 소리(小利) 때문에 눈을 감아 버렸다면, 우리나라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런 무리수가 조만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국민들이 직접 나서는 길밖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이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조만간 더 큰 심판으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내년에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인사에게 육아와 유아교육의 정상화를 첫 공약으로 내세울 것을 강하게 요구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국민 모두 두 눈에 불을 켜고 '교육부의 정상화와 유아교육의 정립'을 누가 어떻게 공약으로 성안(成案)하고 실현해가는지 면밀히 평가해볼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5. 7. 04:53

 

 


황발이

 

 


화난 게

 

 


칠게

 

 


칠게

 

 

 

 

딱지를 까고 잘도 먹는구나!’

 

 

 

충남 서해안의 한 한촌(寒村)이 내 고향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기름진 갯벌이 질펀하게 펼쳐진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작고 큰 게들의 천국이었다. 그럴 듯한 꽃게는 아니지만, ‘사시랭이능정이쇠발이황발이달랑게돌짱이등 작지만 먹음직한 게들이었다. 전라도와 경기도 해안 지역 사람들을 만나면 통하는 게 있다. ‘갯벌에서 나오는 해산물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북도 서해안 지역을 특별히 동일한 게 섭식(攝食) 문화권이라고 부른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마파람은 습한 기운을 머금은 남풍이니, 곧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게들은 몸의 염도를 유지해야 살 수 있다. 비에 소금기가 씻겨 내려가면 안 될 일. 그러니 갯벌 표면으로 올라와 부지런히 먹을 것을 찾던 게들도 비가 온다는 남풍의 경고에 바짝 긴장하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자신들의 집이래야 갯벌에 뚫어놓은 작은 구멍이 고작인데,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곧추 세웠던 잠망경을 접어야 하리라. 그래서 마파람이 불면 게들은 치켜세웠던 자신들의 눈을 접고는 냉큼 집으로 몸들을 숨기는 것이다. 흔히 배고픈 사람이 허겁지겁 밥을 퍼먹는 모습이나 관리들이 나랏돈 집어삼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언가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집어삼키는 모습을 이렇게 그려낸 것이니, 우리 옛 어른들의 눈썰미가 이처럼 매서웠다.

 

도시 사람들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는 속담을 그럭저럭 들어서 알고는 있다. 그러나 시골 출신이든 도시 사람들이든 딱지를 까고 잘도 먹는다는 말은 대부분 모른다. 속담사전들을 들춰봐도 없다. 그러나 내 고향에서는 흔히 통용되어 왔고, 특히 돌아가신 내 어머니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는 속담 대신 이 말을 자주 쓰셨다. 어머니를 비롯한 고향의 어른들은 게 잡이 선수들이셨다. 그럴 듯한 물고기를 잡을만한 곳도 아니었으니, 그나마 그런 게들을 잡아다 없는 반찬을 보충하셨을 것이다.

 

짜디짠 김치와 엄지손가락만한 게 여라믄 마리가 반찬의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릴 적엔 딱지와 발을 뗄 것도 없이 통째로 으드득씹어 먹으며, 속으로 참 맛도 더럽게 없다는 불평을 하곤 했는데, 요즈음은 그 맛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얼마 전 동네 시장에 나갔다가 억지를 부려옛날의 그 게들과 비스름한 것들을 한 보시기 사온 적이 있다. 간장에 절였다가 끼니 때 식탁에 꺼내놓고 옛날처럼 으드득씹어 먹으니, 아내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며칠 잘 먹다가 아내의 눈치가 심각하게 바뀌는 걸 보곤 냉큼 게에 대한 추억과 미련을 접고 말았다.

 

딱지를 까고 잘도 먹는구나!’가 게로부터 온 말일까. 우리 고향 어른들은 게를 잡으며 게의 해부학적생리학적 구조를 잘도 파악하신 것 같다. 나도 어릴 적 게를 가만히 관찰해본 적이 있다. 게들은 두 개의 큰 집게를 갖고 있다. 우리가 손으로 물건을 집거나, 싸움할 때 상대방에게 주먹질을 하듯이 그들은 집게로 물건을 잡거나 적을 물기도 한다. 나머지 발들은 이동할 때 사용한다. 잘 아시다시피 게들이 드넓은 갯벌에 올라와 식사를 하거나 해바라기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해바라기 할 때는 움직이지 않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늘 부지런히 꼼지락거린다. 어릴 적에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갯벌에서 무언가를 집게로 집어 올려’ (육안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작은 입으로 나르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만의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갯벌에 살고 있는 플랑크톤이나 물고기의 사체 등으로부터 분리된 유기물들을 집어먹고 있었으리라.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그걸 보면서 나는 참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저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집게로 잡아 어느 세월에 그 큰 배를 채운단 말인가. 차라리 (게의) 딱지를 까고 갯벌에 널린 먹이를 집어넣으면 순식간에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아닌가. 당시 나는 게들을 보며 늘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래, 저 굶주린 게들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겨우 보일만한 유기물들을 하루 종일, 아니 일생동안 집게로 들어 올려 입으로 운반하며 생명을 유지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바로 내 마음을 미리 알아채신 것처럼 딱지를 까고 잘도 먹는구나!’라는 속담을 만들어 쓰고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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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미디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공직자들이나 기업가들의 부정과 부패 소식을 토해낸다. 눈 먼 돈이 널려 있는데,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나랏돈이 내 돈이요, 회사 금고 안의 돈도 내 것인데, 안 먹으면 멍청이란 말일까. 갯벌에 널린 눈 먼 유기물들은 온통 게들의 먹이다. 그러나 게들은 욕심 내지 않고 그 둔탁한 집게로 한 알 한 알 조심스레 들어 올려 먹을 뿐이다. ‘딱지를 까고먹으면 순식간에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라고 모르진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들은 딱지를 까고먹지는 않는다. ‘딱지를 까고 먹는 행위가 죽음임을 알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으레 눈 먼 돈을 보면 딱지를 까고덤벼든다. 그러다가 걸려서 사회적 생명이 끊어지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게만도 못한존재임이 분명하다. 다함없는 헛된 욕망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제 공직자들이나 기업가들은 (딱지 깐) 게 사진을 집무실에 걸어놓고 다음과 같이 외치면서 아침저녁으로 경배(敬拜)할 일이다.

 

저는 오늘도 딱지를 까고 먹지 않겠습니다!”(출근 시의 구호)

저는 오늘도 (다행히) 딱지를 까고 먹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게님!”(퇴근 시의 구호)

 

 


꽃게

 

 


게들의 천국(신안군 증도)

 

 


게들의 천국(신안군 증도)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