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2. 1. 10:12
호남성통신 5

신화서점(新華書店)과 화장실의 소년

                                 
                                                                                                                      조규익

내 유년기의 콤플렉스들 가운데 하나는 화장실에 관한 것이다. 지금 4, 50대 이상의 장·노년들은 대부분 비슷한 추억들을 갖고 계시리라. 특히 나 같은 ‘촌놈들’은 좋든 싫든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당시의 시골 화장실이 얼마나 적나라하고 원시적이었는가. 어릴 적 가장 싫고 괴로웠던 일이 화장실 출입이었다. 그래서 집 근처 공터에 적당히 실례를 하다가 무참하게 두들겨 맞은 경우가 허다하다. 오죽하면 그 어린 나이에도 ‘커서 내 집을 지을 땐 무엇보다 깨끗하고 멋진 화장실부터 지으리라’는 결심을 수없이 했겠는가.
사실, 최근 화장실 바꾸기 운동이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화장실 문화에서 큰 소리 칠 형편은 아니었다. 한 6~7년쯤 전이던가. 관광차 우리나라에 온 일본의 한 여성이 공중변소에 들어갔다가 질겁을 한 채 그냥 일본으로 돌아간 사건을 기억하고들 계시는지?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런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느냐’고 핀잔을 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고속도로변 휴게소의 ‘삐까뻔쩍하는’ 화장실, 향내 풍기고 고상한 음악 울려나는 그곳만을 경험하신 분들이리라. 지금도 시골 읍·면 단위의 버스 정류장 공중변소엘 가보시라. 여러분의 입맛이 떨어질까 우려되어 자세한 말씀은 생략하기로 한다.

***

내가 공적으로 사적으로 중국여행을 시작한 것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이야 사정이 좀 나아져 평균 4성급 정도의 호텔을 이용하게 되었으니 화장실 관련 트러블은 별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답사를 다니며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화장실들은 참 문제가 많다.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 몇몇 특히 여성들은 화장실 때문에 중국여행의 기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화장실의 구조, 청결상태 등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분명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

지금 나는 화장실 문제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오늘 이곳 장사시의 신화서점엘 들렀고, 거기서 목격한 재미있는 광경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화서점은 중국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서점이며, 간판 글씨 또한 모택동의 친필로 유명하다. 북경대학의 간판글씨도 모택동의 친필이고 보면, 그는 중국의 지식사회에 그 나름대로 큰 꿈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신화서점의 본점은 북경에 있고, 북경에만도 30개에 가까운 점포가 있으며, 전국 대부분의 도시들에도 점포가 있다. 우리의 교보문고 쯤에 비견될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사 시내의 신화서점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시에 며칠 묵고 있느니만큼 신화서점을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만에 찾아왔다는 한파로 유리판처럼 얼음이 깔린 거리를 조심조심 즈려 밟으며 신화서점엘 들렀다. 어딜 가나 난방이 되지 않는 호남성. 신화서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썰렁하게 드넓은 점포.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날 만큼 추웠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계산대의 점원 아가씨들도 우리들의 물음이 귀찮다는 듯 턱을 들어 가리킬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화서점 내부


한참 동안 책을 고르고 계산을 한 다음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신화서점에 설마 번듯한 화장실 하나 없을까. ‘측소(厠所 ; 중국에서는 화장실을 대개 이렇게 부른다)를 물으니 ‘쩌어기!’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서점의 한 쪽 코너였다. 그 쪽으로 다가갈수록 바닥에는 검정색 땟물 자국들이 널려 있고, 그 위에 ‘중딩’쯤 되는 한 녀석은 털썩 주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과연 대변을 보는 ‘푸세식’ 변기가 세 칸쯤 만들어져 있고, 그 앞으로 바짝 소변기들이 서너 개 붙어 있었다. 과연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대변 보는 칸에는 문짝도 없는 듯 했고, 엉거주츰 일어서면 옆 칸이 내려다 보일 정도로 칸막이는 낮았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간신히 물건을 꺼내들고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끙끙’하는 신음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웬 ‘고딩’쯤 되는 녀석이 쭈그리고 앉아 그야말로 신나게 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사시내 동흥남로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매장에서 들고 온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나 역시 소싯적 한동안 화장실 변기에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본 적은 있으나, 훤히 열려있는 서점의 화장실에 앉아 대변을 보면서, 더구나 ‘끙끙’ 사실적인 소리까지 내면서 책을 읽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앞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보는 그가 더욱 고약했다. 그가 너무 당당하고 자연스러워 마음 한편으로는 ‘혹시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으로 신기하여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를 슬쩍 작동시켜볼까 하다가 봉변을 당할까 저어되어 가까스로 참았다.

***

일을 보는 동안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화장실 문화가 고약하긴 했지만,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있는 그 친구가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설사 그 책이 하잘 것 없는 오락물이었다 해도 별 상관이 없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널린 이 시대에 덜덜 떨릴 정도로 춥고 열악한 시설의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는’ 중국의 내일을 나는 발견한 것이었다.
갑자기 중국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녀석 혼자만 그럴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광경은 중국을 이끌어가게 될 ‘창조적 소수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 나는 ‘신화서점의 화장실과 그곳에서 변을 보며 독서하는 소년’을 통해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지식사회의 일면을 훔쳐 본 것이나 아닐까.  
참으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 서점 나들이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남대학 근처 식당 및 상점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 10:02
호남성통신 4

      얼어붙은 장가계(張家界), 사라진 무릉도원(武陵桃源)
          -천문산(天門山)의 서리꽃 눈꽃과 끊어진 다리의 씁쓸한 추억-


혹시 이번 참에 무릉도원을 밟아보는 것이나 아닐까. 지도에서 무릉원(武陵源)을 목격하고는 그곳을 주책없이 대뜸 천하의 절경이라 일컫는 장가계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로 했다. 복숭아꽃 만발한 무릉도원.
언제인가 외부인과 연락이 단절된 그곳에 어부 한 사람이 어쩌다가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곳에 천하의 절대 선경(仙境)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을 잡고 물으니, 자신들은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생사를 초월한 절대 낙원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 자신들의 존재와 공간을 누설치 말 것을 약속하고 빠져나온 어부가 그곳에 다시 갔으나,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바로 그 무릉도원엘 가고 있다는 설렘으로 잠시나마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같이 선경에 들렀다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어부의 심정으로. 우리는 험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상덕국제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 우리는 장가계를 향해 허위허위 너덧 시간을 달렸다. 상덕의 시계(市界)를 벗어나 무릉원으로 진입할수록 고도는 높아갔고, 주변의 봉우리들은 날이 서기 시작했다. 길 주변 산기슭에 띄엄띄엄 널려있는 민가들은 온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 결 같이 시멘트로 지은 단층 혹은 2층들이었는데, 짓다가 중단한 집들이 태반이었다. 어둠이 깔려도 따스한 불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고, 텅 빈 공간을 채운 것은 적막과 추위뿐이었다.
다들 어디에 갔을까. 호남성 일대의 가옥들에는 난방장치가 아예 없다는 설명을 들었고, 지금까지 호텔들을 거치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썰렁한 날씨 속에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거지가 남 잠자리 걱정해주듯, 나는 노랑노랑한 아이들과 구부정한 이 땅의 할매 할아배들이 눈에 밟혔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기온은 낮아지고, 버스의 창문에 눌어붙는 입김과 성에로 창밖은 가려지고 있었다. 더구나 닥쳐오는 산간의 이른 어둑발은 우리를 하염없는 졸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한참 꿈속을 헤매는데 모두 내려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들려 와 퍼뜩 잠이 깼다. 몇 년 전의 물난리로 없어진 황가 계곡의 다리가 아직 공사 중이라서 차가 갈 수 없으니 우리는 모두 내려 걸어서 계곡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릉원 황가계곡의 끊어진 다리, 중단된 공사현장


깜깜한 밤, 차에서 내리자 토가족 원주민들이 몰려왔다. 계곡 건너편으로 짐을 지고 갈 일꾼들과 사람들이 빙판 진 계곡 길을 미끄러짐 없이 건너 갈 수 있도록 발에 감을 짚신 등을 팔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다리 공사에서 품을 팔아봤자 하루 종일 20원 벌이가 고작이었으나, 트렁크 두어 개만 계곡 건너편으로 옮겨주면 40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이 다리의 완공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헛말이 아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릉원을 떠나던 날 우리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곡을 건너는 토가족 남성들


어릴 적 눈 온 날 등굣길, 고무신발에 새끼를 동여 본 이후 처음으로 엉성한 짚신을 신고 계곡을 건넜다. 깊이가 30m 이상, 길이가 500여m가 넘는 끔찍한 계곡이었다. 빙판에 미끄럽기도 하고 질퍽거리기도 했다. 달빛도 없는 우중충하고 깜깜한 밤중. 인적 없는 타국의 계곡을 건너는 50여인의 나그네들은 참으로 고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어서 길 공사가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자 토가족 원주민들의 억지가 이어졌다. 계곡을 건너오는 도중 손을 잡아주었으니 20원을 더 내라고도 하고, 비용으로 가방 당 20원을 더 내라고도 하면서 짐을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험악한 순간이었다. 원래 산적(山賊) 출신이니 어쩔 수 없다고 혀를 차면서 이들의 억지 대부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무릉원에 입성했고, 천자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다음날 천문산을 케이블카로 올랐다. 공중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릉원 시가지의 집들 모두 추위에 떨고 있었다. 모두 얼어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간혹 뿜어대는 열차의 경적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늘 진 주택들의 지붕 밑 빨랫줄에는 그들의 남루(襤樓)가 물에 젖은 채 걸려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이는 구절양장의 도로

 그러나 케이블카에 달랑달랑 매달려 내려다보는 산과 계곡은 참으로 의연했다. 추위 속에 증발되는 겨울 안개가 중턱 이후로 자욱했고, 발 밑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꼬불탕 차도가 구절양장으로 장난감처럼 꼬부라져 있었다. 순간순간 아아(峨峨)한 산봉우리들이 케이블카의 창문을 통해 내 몸에 부닥칠 듯 다가왔다 물러가곤 했다. 중턱을 지나자 서리꽃 눈꽃 핀 나뭇가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눈과 서리에 얼어붙은 천문산의 나무들

 
장가계의 산들 중 역사 기록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천문산. 운몽산이나 고량산 등의 이칭을 지닌 이 산은 해발 1518m나 된다. 해발 1300m 지점에 환하게 뚫린 구멍 즉 천문(天門)이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천연 종유굴인 천문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 가려면 케이블카에서 내려 다시 99개의 고개를 버스로 올라야 하고, 다시 가파른 999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도중 안개에 가려 어렴풋하긴 했으나, 천문동을 볼 수 있었다. 높이 131m에 너비 57m, 깊이 60m나 되는 큰 동굴이었다. 시내에서 시작되는 케이블카는 종착점까지 7.45km, 편도 35분의 엄청난 길이였다. 오금이 저려오는 1시간여의 체험. 그러나 손에 잡힐 듯한 설화목(雪花木)들 덕택에 그 공포는 찬탄과 쾌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

드디어 종착점. 모든 것이 얼어 있었고, 나무들은 무거운 눈을 이고 있었는데, 나무들을 감싸고 있는 눈은 부스러지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얼어붙어 있었다. 나무들 모두 마치 두꺼운 솜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눈과 서리에 얼어붙은 천문산의 나무들

 사람들은 넋을 잃어버린 채 눈의 무게에 체념하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날뛰듯 돌아다녔다.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세사에서 떠나려는 모습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들떴다. 그래, 가장 순수한 곳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온 우리가 가끔씩 순수했던 지점으로 회귀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아니, 어쩌면 그런 기회를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 아닌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리와 눈으로 얼어붙은 나무들 사이에서

 
오늘 무릉도원을 찾아 왔다가 추위에 얼고 삶에 찌든 사람들을 만나 우리의 마음마저 썰렁했지만, 이제 산정의 순수한 설화목들 속에서 그간 잃어버리고 있던 순수를 되찾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다리 끊어진 계곡을 천신만고 건너온 고생은 보상을 받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곳을 내려가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으랴! 그러고 보면 우연히 만난 무릉도원을 다시 찾지 못한 그 어부의 경우처럼, 이 천문산 케이블카의 종점이야말로 우리에겐 그 어부의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 아니랴? 그러니 무릉도원 밖에서 무릉도원을 찾을 일이 아니오, 세상 밖에서 세상을 찾을 일이 아님을 오늘 이 천문산은 내게 포효하듯 말해주었다. 그래, 이곳에 다시는 못 올지라도 이제 세상으로 내려가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천문산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며


2008. 1. 24.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 09:43
호남성통신 3

상덕(常德)과 원강(沅江), 그리고 모택동


                     

김형!

지금 우리는 장사(長沙)를 떠나 상덕(常德)으로 향하고 있소. 이곳 사람들의 과장 섞인 말로는 20년 만에 처음 당하는 한파로 곳곳이 얼어붙은 상장(常長) 고속공로를 통해서 말이오. 가는 길에 점심을 해결할 겸 고속도로가 뚫리기를 기다리기 위해 상덕시의 원강공원으로 접어들었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강의 풍경

 
 그런데, 강안(江岸)의 널찍한 공원에 주차한 우리는 뜻하지 않은 진경(珍景)을 만나게 되었소. 외지 관광객들 대부분은 한가로이 흘러가는 강물과 그 물 위에 떠가는 배만 있는 줄 알고는 5분 만에 혀를 차며 떠난다는 곳이오. 차에 내려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강안을 접하여 무한히 뻗어있는 벽(壁)을 발견할 수 있었소. 아, 그곳엔 무수히 많은 시들이 새겨져 있는, 이른바 시비(詩碑) 아닌 시벽(詩壁)이 있었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강공원 시벽의 표지석


  아주 가끔씩 그저 괜찮은 시인의 시작품 하나 만을 겨우 돌에 새겨 비를 세우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무수히 뻗어 있는 시벽을 대한 채 말을 잊었소. 중국인들의 규모와 배포를 엿볼 수 있는 일이었소.
과연 ‘세계 최장의 시벽’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실을 표지판으로 만들어 이곳의 초입에 세울 만큼, 그건 장관이었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네스북에 올른 세계 최장의 시벽

 
이 시벽의 공식명칭은 ‘중국상덕시장(中國常德詩墻)'.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946명에 달하는 중국 유명 시인들의 시사(詩詞)들이 정(正), 초(草), 예(隸), 전(篆) 등 여러가지 서체로 각자(刻字)되어 있었소.
그와 함께 명화(名畵) 43폭도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상덕의 역사와 풍운을 반영한 <<백대창상(百代滄桑)>>도, 고금의 명현(名賢)들이 상덕을 읊은 <<명현제영(名賢題咏)>>도 들어 있었소. 총 길이 3000m, 총 1267수의 작품들! 놀랍지 않소?
  더구나 이 거사가 그 흔한 시인협회 등 문인들의 단체에서 주관하여 이루어진 게 아니고, 상덕시위원회와 시정부가 앞장서서 한 일이라니, 이들의 문화의식이 그저 부럽기만 했소.
우리나라 문인단체 같으면 이 정도의 일을 기획하기도 어렵겠거니와, 현재와 같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혹은 공무원들의 그리 높지 않은 의식수준으로 보아 수용될 수 있는 일 또한 아니겠지요. 그것이 바로 문화적인 면에서 우리가 중국을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하오.
‘전봇대 하나 뽑는데 10년이 걸렸다’는, 요즈음 인구에 회자되는 사건 하나만 보아도, 청계천의 양쪽 벽에 유명 시인들의 시판(詩板)을 붙이자고 할 경우 우리네 공무원들이 과연 수긍하겠소?

***

시간에 쫓겨 시벽을 대충 훑어본 다음,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공원 밖의 식당엘 들렀소.  ‘동정모기반점(洞庭毛記飯店)’이란 난해한(?) 이름의 식당이었소. 번역하면 ‘동정호반의 모택동을 기념하는 식당’ 쯤 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강공원 밖의 동정모기반점(洞庭毛記飯店)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아보았소. 모택동이 원래 호남성 출신이지요? 이곳에서 가까운 소산(韶山)이란 곳에 그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오. 이곳 호남성에서 모택동은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숭배되고 있었소. 전통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재의 중국을 있게 한 그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들은 바에 의하면, 대장정에 나섰던 모택동이 고향 땅을 찾았다고 합디다. 어떤 촌가에 들렀을 때 가난하여 대접할 게 없던 그 집 주인은 시장에서 사온 물고기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조리하여 내놓았다고 하오.
물고기 머리에 뭐 그리 먹을 게 있었겠소? 머리뼈에 붙은 양념을 맛있게 빨아먹은 모택동. 그 후로부터 물고기 머리 요리와 삶은 돼지고기 요리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나요?
그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대충 원강 가이고 보면 잉어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돼지고기는 동정호 일대에서 근원된 것으로 보이는 ‘동파육’이 아니었을 지요? 그러나 자세한 건 나도 모르오.
어쨌든 그 식당으로 들어가자 과연 식당 모든 곳에 모택동의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고, 반상에는 여러 요리들 가운데 물고기 요리가 올라왔소. 모양은 물론 그 맛 또한 발군이었소. 뼈까지 빨아 먹고 나자 샤오제가 국수를 말아주는데, 국수 맛도 일품이었소.
그 요리의 내력과 레서피를 그녀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우선은 소통이 불가능했고 또 바쁘게 이동하는 일행의 일정에 방해될 것 같아 자제할 수밖에 없었소.    
모택동에 대한 중국인들 특히 호남인들의 지극한 애정은 어딜 가나 한결 같았소. 그의 독특한 서체 또한 명승지 어딜 가도 볼 수 있었소. 거 왜 있지 않소? ‘북경대학(北京大學)’ 현판 글씨체 말이오. '호남대학(湖南大學)‘도 그의 글씨체였소. ’왕희지 체‘ 아닌 ’모택동 체‘라고나  할까요?

***

원강공원에서 시향(詩香)과 어향(魚香)으로 배를 불린 우리는, 무릉원과 천문산 그리고 천자산을 품고 있는 장가계로 한 발 다가서기 위해 상덕시로 향하려 하오. 그곳에서 다시 봅시다.  

백규 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23. 15:04
  호남성통신 2
-아, 악록의 정신이여!-


                                                                                                                    조규익

호남성은 궂은 겨울비에 젖어 있었다. 남방에 있다하여 내가 방심했던 것일까. 가이드의 표현대로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가 매섭다. 차라리 ‘에이는 듯한’ 우리나라의 겨울날씨가 낫다. 이곳은 매우 습한 곳이라 우리보다 기온은 높되 더 춥게 느껴지는 듯하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어느 곳을 가도 난방이 되지 않거나 시원치 않다는 사실이다. 4성급 호텔임에도 천정 밑에서 겨우 온풍기 하나가 돌아갈 뿐이었다.
우리나라야 밖에서 좀 추워도 집안으로 들어오면 등을 지질 수 있는 온돌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온돌을 고안해 사용하기 시작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야말로 세계에서 으뜸이랄 수 있다. 이곳에서 움츠리고 길가를 걷다보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람 휑하니 통하는 가게를 지키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남성은 중국 22개 성 가운데 면적으로 10위(21.18㎢), 인구로 7위(6천600만), 인구밀도로 13위(313/㎢)란다. 북쪽의 호북(湖北)성과 동쪽의 장시성, 남쪽의 광둥성, 남서쪽의 장족 자치구, 서쪽의 귀주성, 북서쪽의 중경과 접한 곳. 우리가 첫발을 내디딘 장사는 호남성의 성도(省都)다. 모택동, 유소기, 호요방, 주룽지, 화룡장군 등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온 곳도 이곳 호남성이며, 김구선생이 잠시 피신했던 곳도 이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악록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모택동 상


이곳에도 소수민족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토가족, 묘족, 백족, 뚱족 등 네 종족의 수가 많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옛날 이 지역에서 '산적' 노릇을 하던 토가족은 단연 으뜸. 왜 토가족(土家族 )일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인이 섬기던 토지신은 키가 작다고 한다. 그런데 토가족은 대체로 키가 작은 종족이다. 그래서 ‘토가족’이라 하며, 야채를 위주로 하는 이곳의 식사를 ‘토채(土菜)’라 한다는 것. 물론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인 데서 명칭을 얻은 호남성의 약칭은 ‘상강(湘江)’에서 온 ‘상(湘)’이오, 이 지역의 음식은 ‘상채(湘菜)’다. 남북으로 흐르는 상강은 장사 시가지를 동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잠을 잔 시대제경호텔도, 호남사범대학도, 악록서원도 모두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사시에 있는 동안 주로 서쪽에서만 움직인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희 상

22일 아침. 호남사범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고, 호남대학 구내에 있는 악록서원(岳麓書院)을 들렀다. 악록산 청풍협의 아래쪽에 있으며, 중국 4대 서원 가운데 하나인 악록서원. 이 서원이 지어진 것은 북송 때(976년)였다. 악록산의 고상한 산세와 눈발 흩날리는 궂은 날씨 때문인가. 서원의 분위기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원문(院門)에 들어선 다음 발길을 옮기자 혁희대(赫曦臺), 대문(大門), 이문(二門), 강당(講堂), 어서루(御書樓)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통로 양측으로 교학재(敎學齋), 반학재, 상수교경당, 백천헌, 선산사, 숭도사, 육군자당, 염계사, 사잠정 등 즐비한 건물과 공간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각종 부속 박물관과 연구소도 적지 않은 걸 보면, 동양학 아니 인문학의 근원이 이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우리 역사를 파행으로 몰아간 중국.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들이 품고 있는 도학의 큰 맥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원의 경내를 거닐며 산같이 위대한 지성들이 산 속에 파묻혀 진리를 궁구하고 토론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서원에선 그 옛날 주희(朱熹)와 장식(張栻)이 토론을 벌였다. 지금보다 삶의 여건이 결코 좋을 리 없었을 터. 백발이 성성한 대학자들이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이곳에 틀어박혀 학문을 토론했을 것이니, 참으로 존경스럽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남사범대학 문학원


학문을 한답시고 애꿎은 종이와 전기만 낭비하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염량세태에 휘둘리며 일희일비하는 백규, 학문의 폭과 깊이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려 하지도 못하고, 가르침을 줄만한 세상의 현인들을 찾아 나서지도 못하는 백규, 공부에 모든 것을 걸지도 못하는 겁한(怯漢) 백규...
호남성의 악록서원에서 위대한 선현들의 마음자리를 깨닫곤 헤어날 수 없는 부끄러움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악록서원 어서루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