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2. 14. 21:00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을 조상(弔喪)함


                                                                            조규익


그간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면서 문화의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우리가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편집증에 사로잡힌 ‘늙은 미치광이’의 소행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천박한 문화의식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게걸스레 눈앞의 먹을 것만 탐하고, 민족의 찬란한 과거와 미래는 남의 것인 양 날뛰던 우리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


숭례문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역사의 문이요, 문화의 문이요, 마음의 문이었다. 문을 없애버렸으니, 과연 우리가 들어갈 곳이 어디며, 나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들고 날 수 없으니, 우리는 꼼짝없이 무덤 속에 갇힌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자존심도 자부심도 역사에 대한 책무도 모두 방기(放棄)한 채 남이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나 주워 먹는 우리 속의 거먹 돼지들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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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 단정, 의연했던 우리의 숭례문


숭례문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개경에서 혁명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는 풍수론을 근거로 즉시 천도하려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옮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우여곡절 끝에 태조 3년 9월 혁명세력의 실권자 정도전의 의견을 수용하여 한양을 신도로 정했으며, 그 한 달 후 천도는 단행되었다. 마음이 급한 태조는 우선 천도를 감행한 다음 신도를 건설했다. 천도 이후 태조 5년 9월 사이에 종묘·사직·궁궐 등 기본 건축물과 북악·낙산·남산·인왕산을 연결하는 전장(全長) 19km의 도성이 완공되었고, 동시에 그 출입문인 흥인문(동)·돈의문(서)·숙정문(북)과 함께 숭례문(남)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숭례문은 남방에서 나랏님이 계신 서울을 바라보고 몰려오는 백성들 누구나 몸을 굽히고 통과해야 하는 ‘나라의 문’이었다. 백성들에게 나라 법도의 엄숙함을 보여 온 위풍당당함, 외적으로부터 이 나라 최후의 보루를 지켜온 의연함과 강함, 역사의 갈피갈피 우여곡절을 극복해 나온 이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 준 굳건함과 불변하는 아름다움 등. 숭례문은 모진 세월을 견디며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불사조(不死鳥)의 이미지’로 살아남은 생명체였다.


그런데, 그걸 태우다니! 나라 땅을 침범한 외적과의 싸움에서 불탄 게 아니요, 우연한 사고로 불탄 것도 아니다. 70을 바라보는, 한 미친 노인의 소행이라니! 인생 70이 청춘으로 예찬되는 요즈음이며, 죽을 때까지도 철 못 드는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이라 하나, 그래도 70이 적은 나이인가. 아무리 가슴에 맺힌 억울함이 병으로 돌았다 하나, 몹쓸 해코지의 대상으로 하필 숭례문을 택했단 말인가.


***


유럽을 가보라.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기원전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위용을 뽐내는 그 문화의 꽃밭을 가보라. 과연 그들 중에 성벽의 돌을 빼내다가 구들을 놓는다거나 책장을 찢어 벽지로 바르거나 종이공예의 재료로 삼는 망나니들이 있는가. 지금도 몇 푼의 돈에 팔린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알게 모르게 ‘나까마’들의 품에 실려 일본으로 넘어가는, 비통한 현실을 우리 중의 몇 %나 알고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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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트리어 시의 북쪽 문인 포르타 니그라. 기원전 2~3세기 로마지배 시절의 유적임


오호 통재라, 국보 1호를 통째로 구워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보하는 ‘너와 나’의 무감각이여! 내려앉은 가슴 저 깊이에 미래의 탑은 산산이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는데, 그 불쌍한 잔해들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숭례문의 최후를 슬퍼하노라.  

 


      숭례문이 불타던 다음날 아침


                        백규 통곡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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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

                                        
                                                                 조규익

작년 하반기에 출범한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과 지금도 논란중인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선정 과정은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국가적 아젠다 실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전자의 경우 탈락의 이유나 명분을 상당수의 대학들이나 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의 권위를 상징하는 총장과 교수들까지 교육부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만큼 후자의 경우 또한 결과 자체가 석연치 못하다.

 두 사업이 갖는 표면적 의미는 단순하다. 인문학 진흥을 위해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의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의 재정을 듬뿍 풀겠다는 것이 전자이고,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 권부의 한 축인 법조계 인맥의 공급처로 삼겠다는 것이 후자이다. 

 이제 로스쿨은 단순히 ‘법학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육수요자들이 이것을 학교전체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 원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인들은 로스쿨의 유무가 대학 생존을 결정하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인문한국이든 로스쿨이든 주관 부서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 미래지향적 의미를 크게 지녔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런 기준에 대하여 우리의 지식사회가 제대로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인문학을 새롭게 진흥시킨다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학 교육을 시키자고 하는 마당에 그에 입각한 아젠다나 철학 혹은 참신한 아이디어 등을 따지지 않고, 예컨대 과거의 업적이나 인프라에 무게중심을 두거나 기존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시키는 등의 일이 지식사회의 미래지향적 구도에 그다지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 때문에 선정결과의 발표를 서너 차례 연기했을 만큼 인문한국 사업은 시작부터 갈팡질팡했으며, 로스쿨 역시 ‘정치적인 고려’ 등 본질적인 철학 부재의 함정에 빠져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자 모두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지 않은 대학의 현실을 그 결정적인 요인으로 거론하는 인사들도 많다.

 국가나 대학의 조직은 매니지먼트의 측면에서 공통되며, 그 자연스런 결과로 평가에 관한 기준이 물적 인프라의 규모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자칫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과거부터 누적되어오는 물적 인프라의 기준에 밀려 평가의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점은 큰 문제다. 큰 대학들은 늘 국가적 혜택을 받는 반면, 작은 대학들의 경우 제대로 도약의 계기를 얻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잘 하는 쪽을 밀어주는 것은 잘 나가는 집단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잘 하고 못함’을 가르는 기준이 미래 지향적 의지를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은 ‘힘 있는 세력’의 떳떳하지 못한 자기 합리화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 없는 기준에 바탕을 둔 ‘승자독식(勝者獨食)’이야말로 ‘만년 우등/만년 열등’의 구조를 고착시키게 되고, 그것이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학문정책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대신 구태의연한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가 걸린 일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감행하면서도 ‘할일을 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지식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반성이 결여된 지식사회의 행태가 우리 시대 최고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2. 4. 20:37
안녕하십니까?
금번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에서는 조선조 후기 궁중 정재의 문화적 의미와 미학을 담론하는 학술발표와 공연(춘앵전)의 자리를 아래와 같이 마련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고려와 조선왕조는 음악, 춤, 노래가 어우러진 종합무대예술을 향유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재입니다. 부디 오셔서 정재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 제 : 조선조 후기 궁중정재의 문화적 의미와 미학
때 : 2008. 2. 13.(수), 오전 10시~오후 5시
곳 :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115호실

순서
1부 : 개회사 및 인사, 축사

2부 : 발표
1. 조선조 후기 정재의 예악 실현 양상--이종숙(한양대)/토론 김영희(성균관대)
2. 조선조 후기 정재의 음악미학--임미선(전북대)/토론 권도희(서울대)
3. 조선조 후기 정재창사와 선계 이미지--조규익(숭실대/토론 강명혜(강원대)
4. 조선조 후기 정재의 무적 구조변화와 수용--손선숙(단국대)/토론 유미희(경인교대)
5. 조선조 후기 정재와 민속무용의 상호교섭 양상--박은영(한예종)/토론 이미영(국민대)

3부 : 정재 공연 및 출판기념
1. 춘앵전 공연--최서윤(성균관대, 석전 이수자)
2. 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총서 출판기념

문의처 : 820-0830, 820-0326, 820-0846

2008. 2. 4.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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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 10:25
호남성통신 6

  중국의 마트에서 만난 개구리의 슬픈 눈동자


                                                                                                                    조규익


호남성 사람들의 말로는 50년 만의 혹한이라 했다. 과연 추웠다. 그것은 우리나라 한겨울의 ‘살을 에는 듯하지만 상큼한’ 추위가 아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불쾌한 추위였다. 우리의 경우 밖이 추워도 문만 열고 들어서면 따스한 온돌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곳엔 그런 게 없다고 한다. 온통 습하고 음침하다. 습기 때문인지 약간만 추워도 땅바닥은 유리를 깐 듯 미끄러웠다. 그 위에 눈까지 내리니 공항은 물론 팔방으로 통하는 고속도로들도 완벽하게 막혀버렸다. 중국에서 최고급에 속한다는 5성급 호텔도 정전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열차가 석탄을 실어 와야 발전소를 돌릴 텐데, 중간에 열차가 멈췄으니 제대로 발전이 될 리가 없다 한다. 과연 대단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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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공항 대합실

 

***

공항이 폐쇄되어 귀국길이 막힌 지 2~3일 만에 생필품 구입을 위해 일행들은 호텔 근처의 마트에 갔다. 그곳까지 차로 20분 거리. 웬만하면 걸어서 갈 수도 있는 거리이나, 가이드는 늘 차로 함께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중국말도 통하지 않을 뿐더러, 거리가 위험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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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바야호텔 인근의 **마트


처음 가보는 중국의 마트. 한국으로 치면 하나로마트, 이마트, 코스코 등과 같은 규모와 형태일까. 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렸다. 평소 약간의 식탐(食貪) 끼가 있는 나인지라 그들의 식재료 코너를 당연히 보고 싶었다. 기름에 절이고 말려 갖가지 모양으로 매달아 놓은 새들, 돼지고기 덩어리들, 속을 넣어 줄줄이 사탕처럼 묶어 매달은 갖가지 창자들(소세지?)... 아, 그곳은 지옥의 형상이었다! 우리 인간도 최후의 심판대를 거쳐 지옥에 떨어질 경우 악귀들 세상의 마트에 저런 형상으로 내걸리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건 약과였다. 발길을 돌린 순간, 더 처참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곳을 비집고 들어서니 큰 유리 상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큼지막한 개구리들과 자라, 거북이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거북이나 자라의 경우 머리를 집어넣거나 눈꺼풀을 내려 버리면 그만이니 그 녀석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방도가 없었다. 문제는 개구리들이었다. 큰 놈은 아이들 머리통만 했고, 아무리 작아도 내 주먹은 훌쩍 넘을 듯 했다. 그런데 그 눈들! 아, 개구리들이 그렇게 영롱한 슬픔의 눈을 하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눈망울들은 왜들 그렇게 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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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까지 살아남아 있던 개구리, 아마 지금쯤 그도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개구리들을 우선 육안으로 감별했다. 어느 놈이 가장 실하고 싱싱한지 가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다음엔 손으로 꼬집어보기도 하고 뒤쪽에서 ‘아귀’를 움킨 채 들어 올려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무력한 개구리는 버둥거리며 슬픈 눈동자만 굴리는 것이었다. 상자 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사람들이 혹시 자신을 선택하지나 않을까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이나 눈동자를 살피는 중국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관찰하니, 사람들은 대개 두서너 마리를 비닐봉지에 골라 넣는 것이었다. 가족 당 한 마리씩 먹기 위해 고른 것이리라. 개구리와 자라 상자들이 4각으로 늘어선 안쪽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큼지막한 도마 앞에서 ‘무시무시한’ 칼로 연신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치마는 이미 붉게 착색되어 있었고, 붉은 고무장갑 또한 더욱 또렷한 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 앞에는 비닐봉지를 든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쉼 없이 단칼을 내려치고 있었다.
고객으로부터 받은 비닐봉지를 열고 큼지막한 개구리를 끄집어내어 널찍한 도마 위에 엎어 놓는다. 한 번쯤 버둥거릴 만도 한데, 목욕탕 때밀이에게 몸을 맡기듯 그 ‘망나니’의 손에 잡힌 개구리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도마 위에 쭉 뻗고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망나니의 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 부분에 내려 꽂혔다. 순간 물갈퀴도 선명하게 뒷다리를 쭉 뻗으며 개구리들은 최후를 고하곤 했다.
그야말로 칼날에 막걸리 한 입 뿜어 바르지도 않고, 아니 최후 진술의 기회조차 주지도 않은 채 망나니들은 속전속결로 개구리들의 머리를 끊어내고 있었다. 끊긴 머리들은 도마 아래쪽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썩은 밤톨처럼 내동댕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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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향한 개구리의 항의(?) 그 역시 누군가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참으로 허망한 개구리들의 운명이었다. 상자 안에 엉겨 있는 그들 가운데는 가족들도 있었으리라. 형장에 끌려온 줄도 모르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괜찮을 테니 걱정 말아라!’고 입에 발린 위안을 주어야 하는 개구리네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빙 둘러선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을 보듬어 주는 모정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몸으로는 한기가 느껴졌다. 뒷다리를 쭉 뻗는 개구리들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중국인들이 갑자기 저승차사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승차사들이 빙 둘러선 그곳은 생지옥의 현장이었다. 개구리들이 엉겨붙어있는 유리 상자는 이승이었고, 그들을 골라 온 ‘차사’들이 빙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사형을 집행하는 곳은 저승이었다.  그래, 이승과 저승의 경계란 종이 한 장의 두께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아니, 그 두 공간은 아예 공존하고 있는 것을! 지금까지 어리석은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호텔로 돌아온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자연의 물상들을 지배하며 그들을 먹고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신으로부터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꼭 그토록 적나라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살아 있다’는 현실과 ‘앞으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괴리와 모순이 이처럼 처절하게 나의 내면을 흔든 적이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우리의 행동과 삶의 방식을 컨트롤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비로소 심각한 자문을 하기 시작했다. 천재지변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중국 땅에서 개구리를 만났고, 과연 나는 그들의 눈망울을 통해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천재지변’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