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08. 6. 16. 21:21
* 이 글은 <<불교문예>> 41호(불교문예출판부, 2008년 여름)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연행록 - 자료2008. 6. 15. 19:51
안녕하십니까?

아래와 같이 숭실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봄 학술대회를 갖고자 하오니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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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숭실 인문학 전통
  때   : 2008. 6. 19(목) 오후 3시~5시 30분

                순서

3:10~3:40  무애 양주동 선생과 우리 노래문학
                   발표   조규익(국어국문학과 교수)
                   토론   엄경희(국어국문학과 교수)

3:40~4:20  김양선의 기독교 사학
                  발표   박정신(기독교학과 교수)
                  토론   김권정(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4:20~4:50  이당 안병욱의 철학과 실천
                  발표   김선욱(철학과 교수)
                  토론   김태완(철학과 강사)

4:50~5:20   종합토론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6. 11. 12:07
 

*이 글은 『어문생활』 127호(한국어문회, 2008. 6.)의 ‘나를 움직인 한 권의 책’에 실려 있습니다.



   역사의 진화(進化)는 완성되었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읽고-


                                          조규익(숭실대 교수/한국어문교육연구회 이사)


 엄혹(嚴酷)한 냉전체제 속에서 내 삶은 시작되었고, 3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공산진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암울하던 어린 시절. 등굣길에 나서는 아침마다 북으로부터 날아온 삐라를 줍는 게 일이었다. 동네 어귀까지 바닷물 들어찬 어느 보름사리 한밤중엔 간첩선이 들어와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다. ‘야수 같은’ 공산당을 저주하며 우리는 온몸에 소름 돋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틈날 때마다 너덜거리는 세계지도를 보며 빨갛게 칠해진 공산주의 국가들이 왜 그리도 넓고 위압적인지,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실체를 보지 못한 공산당이 내 실존을 위협하는 불안과 초조의 근원이었다. 라디오에서는 툭하면 간첩단 사건이 보도되고, 툭하면 ‘북괴타도 궐기대회’가 열리곤 했다. 거동이 수상한 사람들을 지체 없이 신고해야 했고, 여차하면 얇은 고무신 벗어들고 달아날 태세를 갖춘 채 산길을 가야 했다.

 그렇게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산업화 사회로 진입했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도 치러냈다. 그 무렵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소련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몰락의 대서사시가 전 세계에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장년을 눈앞에 둔 내 정신세계에도 드라마틱한 파도가 일었다. 그 때 이미 우리는 정보화 사회를 거쳐 고도 정보화 사회에 진입하려던 차였다.

 그 무렵 우리는 어린 시절의 굶주림을 거의 완벽하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역설하며 좌익사상에 빠져든 친구들도 배고픔을 참으려 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누리는 자본주의의 풍요를 저주하는 모순을 범하곤 했다.

 그렇게 ‘도둑처럼’ 찾아온 세계의 변화를 설명해줄만한 선생님이 내겐 없었다. 그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 권의 책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역사의 종언(終焉)과 최후(最後)의 인간’이란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헤겔이 신봉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야말로 후쿠야마가 명쾌하게 설명한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이었다.

 5공, 6공,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권력자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도 존엄한 존재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처럼 인류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 ‘멋진 사건’을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행복이었다. 흡사 길바닥에서 말라가던 물고기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연못으로 던져진 격이었다. 연못 안에는 뱀도 있고, 생활쓰레기도 있으리라. 그런 것들을 몰아내고 치워가면서라도 살아야지, 이곳을 떠나면 갈 곳 없는 우리들이다.

 보라, 우리의 반쪽은 아직도 진화의 물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유년시절의 굶주림과 절망이 그들의 산하를 덮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노동자 농민의 천국’임을 강변하고 있다. ‘이밥에 고깃국’ 타령을 얼마나 더 읊어야 그들이 소원(所願)하는 ‘역사의 종말’은 올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6. 9. 21:16
 


 내 생애 쉰 두 번째의 단옷날이다.

분주하게 살다보면 깜빡하는 수도 있으나, 대개 하루해가 저물기 전에 단옷날임을 알게 되고, 내 젊음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음도 깨닫게 된다. 이 날만 오면 반드시 한 토막씩 행사소식이나 기사를 내 보내는 언론 매체들 덕분이다.

 어릴 적 이맘때쯤은 이른 보리 베기와 모내기가 대충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산에 들에 살진 고사리며 수리취 등이 지천으로 자라긴 하나 집집마다 쌀독들은 밑바닥을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 이른바 보릿고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 얼굴에 허옇게 버짐 피어오르는 춘궁기가 바로 이 때였다. 제사 때 메를 지어 올릴 요량으로 숨겨 두었던 몇 홉들이 쌀도 죽음 문턱의 허기에는 남아날 재간이 없었다. 밥 굶지 않을 정도의 집들에서는 거칠거칠한 수수로 수수팥떡을 만들어 아이들로 하여금 생일을 기억하게 하거나, 나처럼 단옷날에 태어난 친구들은 간간이 수리취떡을 얻어먹는 수도 있었다. 가뭄이 들어 모내기를 못하는 해에는 그나마도 생략하는 게 관례였다. 지금 4, 50대 이전 세대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50의 문턱을 넘고도 작은 언덕 둘을 넘었다. ‘무정함’이 아니라 ‘무서움’으로 탓할 만한 시간의 빠름이다. 이루는 것 없이 앞뒤로 몇 번 두리번거리다 보면, 뚝딱 한 해가 저 멀리 사라지곤 한다. 읽어야 할 책들은 안두(案頭)에 쌓이는데 눈은 침침해지고, 채워야 할 원고지의 칸들은 빈 바둑판처럼 정연한데 펜 잡은 손에 힘이 빠지고 있으며, 술잔으로 챙겨야 할 친구들은 늘어서 있는데 몸의 나약함은 술을 이기지 못한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셔놓곤 “어허 이것 봐라 하늘이 도는구나/뱅글뱅글 물매아미같이/하늘이 돈단 말이/저 놀랍고도 새로운 천문학적 진실 위에/세대의 윤리는 성좌같이 찬연하다”고 너스레를 떤 시인 김동명.   그 역시 술의 힘을 빌려 덧없는 세월의 시름을 달랜 것이나 아니겠는가.


***


 이번 생일엔 제자 아들의 돌잔치에 들렀다가 강화도 전등사를 찾았다. 묘한 대조였다. 터질 듯 말랑말랑한 아가의 볼은 무한한 미래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러나 꺼칠한 내 볼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버린 내 청춘을 조상(弔喪)하듯, 여름 장마 같은 궂은비에 흙탕물이 튀었다. 날아갈 듯 호젓한 전등사의 대웅전은 옛날 보던 그대로였다. 세월의 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빛바랜 단청. 소박하고 솔직해서 좋았다. 그 대웅전은, 칠이 벗겨지기 시작하자마자 냅다 원색으로 덧칠해대는 우리네의 천박함과 달랐다. 이 절의 주지는 누굴까. 그는 어쩌면 그 속진(俗塵)의 굴레로부터 멀리 벗어난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 오는 날 오후여서였을까. 그 흔한 목탁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비에 젖어 몸을 떠는 까치들의 울부짖음만이 가끔 빗소리의 고즈넉함을 깨고 있었다.

 경내 안의 찻집을 찾았다. ‘참 좋은 인연’이라든가, 이름 한 번 그럴 듯 했다. 통나무를 어슷비슷 잘라내어 만든 다탁과 의자에는 선남선녀들이 마주앉아 속삭이고들 있었다. ‘솔바람차’를 시켰다. 그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수면에 어렸다가 풀어지는 솔향기가 가슴을 적셨다.

 찻집의 인테리어를 뜯어보며 마음속으로 열심히 설계도를 그리는 아내. 새 집 지을 꿈에 부풀어 있으리라. 배산임수의 명당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토방 있는 다실(茶室)을 만들겠노라는 푸진 꿈을 솔향기 속에 갈무리하고 있었으리라. 모처럼 우리는 호사스런 백일몽을 즐길 수 있었다.


***


 50대의 생일은 어떠해야 할까. 선배들은 50대의 생일을 어떻게들 보냈을까. 이 물음들의 해답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우리네 삶의 무게가 갈수록 더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짐 지고 걸어온 길. 자식들에겐 더 큰 짐을 지워주고 싶은 욕망. 아니 그들에게 그런 욕망을 강요하는 우리네 삶. 내 몸에 얽힌 삶의 사슬이 무자비하고, 그들의 어깨 위에 걸린 삶의 무게가 안쓰럽다. ‘훌훌 털고 가볍게 살다 가자!’고 무소유의 삶을 주창한 어느 노 선사를 아는가. 지금 과연 그는 가벼움을 즐기고 있을까. 무거운 짐들을 잔뜩 지고 길 가득 걸어가는 중생들의 땀 흘리는 얼굴을 보며, 과연 그는 홀가분함을 즐기고 있을까.


 갈수록 두 어깨의 짐은 무게를 더하고, 길의 끝 부분 저 먼 곳이 자꾸만 궁금해지는, 내 삶의 기울어버린 한낮이다. (2008. 6. 6.)    

   

Posted by kicho